중국과 문학/홍루몽

조설근이 홍루몽을 썼다는 것이 왜 의심을 받는가?

중은우시 2013. 5. 22. 01:20

글: 정계진(丁啓陣)

 

 

 

 

왜 <홍루몽>과 같은 위대한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를 문제로 삼을까?

 

첫째, 후세의 독자들의 "믿기 어렵다"는 심리이다.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른다. 범인은 천재의 재능과 학식을 이해할 수 없다. 특별히 위대한 작품의 앞에서 후세의 독자들은 쉽게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말 그(그녀)가 쓴 작품이란 말인가? 그(그녀)가 어찌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류의 의문은 중국의 특유한 것이 아니다. 외국에도 있다. 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수많은 유명한 희극작품이 있다. 이것도 의심을 받는다. 그들은 말한다. 강호의 연극단 주인이 어찌 궁정생활가 귀족생활을 잘 알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기실 진정한 작자는 바로 프란시스 베이컨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명한 철학가, 과학자, 사상가이고,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 본인이 나중에 대법관이 된다. 동시에 그는 책을 좋아했고, 지식이 박학했던 학자이다. 생활경력이나 학식수양이나, 모두 이런 백과전서적인 희극작품을 써낼만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대인들이 소설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조비는 말한다. "문장이라는 것은 경국의 대업이요, 불후의 성사이다."(<전론.논문)>. 여기서 '문장'이라는 것은 산문과 시가를 가리킨다. 소설은 포함하지 않는다. 소설가의 지위는 계속하여 미천했다. "소설가와 같은 류는 대부분 패관(稗官)출신이고, 항간의 이야기나 길거리에서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념이 중국역대문인의 머리 속에 부리깊게 박혀 있었다. 근현대에 이르러 서방의 영향을 받아, 소설의 지위가 제고되고, 문인들은 소설을 씀으로써 명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명과 저작권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된다. 이전에, 소설을 쓰는 것이 원고료나 인세등의 이익을 얻을 수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내용이 경전적이지 않아서 악명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약간의 정통사상을 지닌 문인이라면 모두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는 것은 멸시하게 된다. 중국문학사상 첫번째로 한 작가가 독립하여 완성한 장편소설 <금병매>의 작자는 자신의 진실한 성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난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라는 서명만 남겼다. 그 결과, "난릉소소생"이 누구인지는 중국문학사상 골드바흐의 추측'이 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내놓은 사람만 60여명이다. 영향이 비교적 큰 주장으로는 왕세정, 도륭, 서위, 이개선, 가삼진, 왕치등, 채영명, 조남성, 이어, 노남, 풍몽룡, 정순부자, 설응기, 가몽룡, 왕도곤, 이선방, 심덕부, 풍유민, 사진, 장진숙, 김성탄, 전예형, 왕채, 당인, 이번룡, 소명봉, 호충, 유수정, 이탁오, 도망령, 정요항, 구지충, 원굉도 형제 등등이 각양각색의 설이 있어 결정하기 어렵다. 청나라 강희연간에, 장편소설가는 비록 자신의 진실한 성명을 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무시당했다. 오늘날의 소설가들처럼, 자신의 작품을 아끼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소설가들처럼 각종 방법을 통하여 성명하고 주석을 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하지 않았다. 조설근이 백거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을 아꼈고, 동시에 자신의 시문을 간행할 능력이 있으며, 자신이 죽은 후에 작품이 흩어져버릴 것을 우려하고, 이름이 인멸될까 우려하여 약간의 책을 가행하여 각 명찰에 보존시켜두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시문의 보존상황은 많이 나아졌을 것이다. 저작권귀속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셋째, 작자의 생전생후의 처지가 달랐다. <홍루몽>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비록 지연재등 작자의 생전친구들이 비주, 평점을 하였고, 아주 열정적이었지만, 나중에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고, 세계적인 거대한 영향을 일으키며, 중국장편소설 사대명저중 하나가 되어 중국역사상 첫손꼽히는 장편소설이 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작자 조설근은 18세때, 집안이 몰락하여 북경의 서부교외 '황엽촌' 도홍헌에서 거주하며 홍루몽을 썼다. 그때 생활은 이미 곤란해졌고, 집안에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아파도 의원에게 보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설근의 생전에 비록 "피열십재, 증산오차"하였지만, 나중에 세상에 알려진 것은 여전히 잔본(殘本)이다. 이를 가지고 추측해보면, 조씨는 생전에 전체 소설의 창작을 완료하지 못했다. 사후의 천고명저의 작자는 생전에 그저 '만지황당언(滿紙荒唐言)', '만파신산루(滿把辛酸淚)'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조설근은 우리의 오늘날처럼 자신의 노동성과를 그렇게 아끼지 않은 것이다.

 

넷째, 전파과정에서 필요한 작자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지금의 저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방법은 서문이나 표지안쪽에 작자를 소개하고 있다. 옛날 특히 소설의 경우 이런 방식이 사용되지 않았다. 소설애호가, 서적간행상은 스토리에만 관심이 있고, 이윤만 추구했지, 작자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다섯째, 사귄 친구들이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조설근의 생전친구는 돈성, 돈민 형제등이다. 비록 시문이 후세에 남아있기는 해도, 그다지 저명한 문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설근이 <홍루몽>을 썼다거나, 조설근의 평생사적을 묘사함에 있어서 말이 모호했고, 믿을만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여섯째, 통치자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고대에 일부 문인의 저작은 그들의 사후에 통치자들이 중시하여 수집, 정리되어 세상에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나라때의 사마상여의 부(賦)는 바로 한무제가 사람을 보내어 사마상여의 집에서 수집한 것이다. 조설근의 <홍루몽>은 통치자의 중시를 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오랜 기간동안 '회음(誨淫)'의 서적으로 규정되어 엄격히 금서로 취급되었다.

 

일거에 여섯가지 원인을 이야기 하였지만, 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포전인옥(抛塼引玉)하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