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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조설근(曹雪芹)의 마지막 거처는 어디인가?

by 중은우시 2013. 8. 4.

글: 정계진(丁啓陣)

 

 

 

 

지금까지, 조설근의 마지막 거주지에 대하여는 최소한 아래의 6가지 학설이 있다.

 

1. 육랑장 바깥의 소관제묘;

2. 서교 건예영;

3. 홍산구에서 온천진으로 가는 길의 상황기영 부근;

4. 남신장 행석구, 열무루와 보승사의 사이;

5. 온천진 백가동촌, 소석교 부근;

6. 정백기촌 38호, 북경식물원내, 지금의 "조설근기념관" 소재지

 

6가지 학설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추측에 민간전설을 더한 것이다.

 

추측은 각각 일정한 근거가 있다. 다만, 이들 근거는 명확하게 구체적인 마을이름, 지명 혹은 방위거리를 묘사한 것이 없다. 돈성, 돈민, 장의천등 생전의 가까운 친구들은 조설근의 만년거주지와 관련한 싯구를 남겼다. 싯구들을 개괄하여 보자면 가치가 있는 정보는 기껏 "서교(西郊)", "황엽촌(黃葉村)", "문대산수(門對山水)"등으로 구체적인 장소를 확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기 때문에, 향산 정백기촌에서 "제벽시(題壁詩)"등 증거물이 발견된 후, 여러 학설중 두드러지게 된다. 많은 홍학가들은 이곳을 조설근이 <홍루몽>을 저술한 "도홍헌(悼紅軒)"의 소재지로 본다. 그리고 관련부서를 움직여 "조설근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곳의 제벽시중에 "원부근빈이예상교천하소(遠富近貧以禮相交天下少), 소친만우인재이산세간다(疏親慢友因財而散世間多)"등 구절과, 한 쌍의 서상(조설근이 재혼할 때 친구가 보내준 선물)의 낙관 "졸필(拙筆)"에 그린 한 폭의 그림, 그림에는 완석(頑石) 하나와 난초 한 무더기가 있다. 그림의 곁에는 "제근계처사구(題芹溪處士句)"라는 글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조설근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조설근은 개략 건륭29년, 즉 1764년에 죽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전이다. 이 정도의 시간간격이라면 거의 10대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민간전설은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의 사이에 놓여 있다. 아마도 이러한 원인으로 온천진 백가동촌이 조설근의 마지막 거주지라는 전설은 믿을만 하다. 어떤 사람은 확실하게 말한다: 건륭23년 봄(무인 1758년) 조설근이 44살때, 백가동촌으로 이주했다. 돈민의 <병호무재기성>에선느 조설건의 거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작은 냇물이 길을 막고, 냇가를 마주보며 있고, 흙으로 만든 집 4칸이 있으며,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고, 가지를 잘라서 서까래(椽)로 삼았다. 담장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문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집은 깨끗하고 방석을 깔았으며, 등나무가 자란다...." 어떤 사람은 고찰을 거쳐, 오늘날 백가동천 서부의 소석교 부근이 조설근이 마지막 거주지라고 밝혔다. 아마도 향산식물원내의 "조설근기념관"과 직접적인 경쟁이나 충돌을 막기 위하여인지, 어떤 사람은 "이주" 혹은 "왕래"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마을의 뒤의 향산식물원과 가장 가까운 골짜기에는 "조설근소도"라는 석비가 새겨져 있다.

 

<홍루몽>의 독자로서, 필자는 색인파가 아니다. 다만, 필자는 조설근, <홍루몽>과 관련한 전설에 대하여 모두 상당히 농후한 흥미를 지니고 있다. 향산식물원에 있는 "조설근기념관" 및 그 부근의 영도구 수원에 사람들이 <홍루뭉>의 통령보옥, 목석전맹의 영감을 받은 그 원보형 암석이 있다. 백가동촌의 뒤에 있는 "조설근소도"는 필자가 여러번 가 본 적이 있다. 최근 다시 백가동촌의 서부에 있는 소석교 일대를 가보았다.

 

필자는 이처럼 민간전설과 추측에 의하여 조설근의 최후거주지를 토론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 학술가치나 예술가치가 거의 없다. "홍학"에 있어서, 조설근의 최후거주지가 아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홍루몽> 자체의 사상내용과 예술성취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이다. 

 

다만, 엽기, 회고, 관광등을 포함한 인문적 가치는 수치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날, 나와 두 친구가 이미 물이 흐르지 않고 두 조의 2미터길이의 4개의 돌이 이미 진흙속에 반쯤 묻혀있는 소석교 위치에 도착했을 때 마음 속으로 쓸쓸함이 밀려왔고, 담담한 우상(憂傷)이라고 할 만했다; 남녀촌민들은 외부인이 조설근고거를 찾아온 것을 보고 모두 우리에게 웃는 얼굴로 대했다. 확실히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우상이든 자부이든 필자는 우리가 위대한 문학작품창작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좋은 감정이다. 모두 우리의 인생에서 간직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