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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임대옥(林黛玉)이 가부(賈府)에 들어갈 때 몇 가지 이상한 점들

by 중은우시 2012. 9. 20.

 

글: 조염(趙炎) 

 

 

 

문예계에는 이런 말이 유행한다: "멋진 장면은 보통 뒤에 나온다고". 그렇다면, 문예작품인 <홍루몽>의 "멋진 장면"은 가장 뒤에 나오는가? 필자는 하루종일 생각을 해보았지만, 제3회 임대옥이 가부에 들어갈 때가 "멋진 장면"이라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몇몇 주인공이 멋있게 등장하며 각각의 성격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그들의 이후 각자운명에 대하여 최종판결을 내려준다. 둘째, 임대옥의 시각과 마음속 생각을 통하여, 곧 몰락할 호족의 마지막 번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연히 이는 홍학가(紅學家)들이 연구할 과제이다. 조설근이 그렇게 쓴 것은 역사적 원인이 없는게 아니다. 대다수 어린아이가 먼 길을 떠날 때처럼, 6살짜리 임대옥은 도중에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가마에 올랐을 때부터, 성안으로 들어갈 때 사창(紗窓)으로 바깥을 쳐다보았다. 길거리의 번화함과 사람이 많은 것이 다른 곳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는 우리에게 말려준다. 청나라초기 옹정,건륭시기의 북경성의 상황을. "편액에 큰 글씨로 '칙조녕국부(勅造寧國府)'라는 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임대옥은 생각한 후 말한다. 이것은 반드시 외조부댁 큰 집이다." 소위 '칙조'는 황상이 돈을 내어 건축했다는 말이다. 이는 집주인이 공신이나 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3회에 나오는 역사든 개략 이러하다. 이제 임대옥을 따라서 가부를 들어가보자. 본격적인 역사수업을 들어보자.

 

외할머니 가모(賈母)를 만난 후, 가모는 하나하나 소개해준다. 대옥은 각각 큰외숙모 형부인(邢夫人), 둘째외숙모 왕부인(王夫人), "돌아가신 가주(賈珠) 큰오빠의 부인인 주대수(珠大嫂) 이환(李紈). 가모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허가하여, 영춘(迎春), 탐춘(探春), 석춘(惜春)의 세 아가씨도 얼굴을 드러낸다; 조금 있다가, 왕희봉(王熙鳳)이 요란하게 등장한다. 차과(茶果)를 마친 후, 임대옥은 다시 큰외숙 가사(賈赦)와 둘째외숙 가정(賈政)을 찾아간다. 비록 만나보지는 못하지만, 예절상으로는 인사를 간 것이다. 그 다음에 가모가 베푸는 저녁만찬에 참가하고, 가보옥(賈寶玉)을 만난다.

 

이것은 임대옥을 위하여 베푸는 저녁만찬이다. 여기서 기괴한 장면이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다: "후방문을 들어가니 이미 여러 사람들이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왕부인이 오는 것을 보자 비로소 탁자와 의자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가주의 처인 이씨는 밥을 들고, 왕희봉은 젓가락을 들고, 왕부인은 국을 들었다. 가모는 정면의 걸상(榻)에 혼자 앉아 있었고, 양쪽에는 4개의 빈 의자가 있었다. 왕희봉이 급히 임대옥을 끌어서 왼쪽 첫번째 의자에 앉혔다. 임대옥은 사양했다. 가모는 웃으며 말한다: "너의 외숙모와 올케들은 여기서 밥을 먹지 않는단다. 너는 손님이니 원래 이렇게 앉는 것이다."

 

왜 왕부인이 오고나서야 비로소 탁자 의자를 차리기 시작할 것일까? 왜 이환, 왕희봉과 왕부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녀들은 '이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일까? 이 세 가지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임대옥을 따라들어가며 배워야할 첫번째 수업이다.

 

첫째, 고대에는 "중궤(中饋)"라는 법도가 있다. 중궤는 정처(正妻)가 가정의 음식을 주재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부(榮國府)에는 형부인이 명목상으로 큰집의 정처이다. 그러나 가모가 좋아하지 않아서, 왕부인이 실질적으로 집안의 권한을 장악했다. 즉 "식처(食妻)"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부의 정규연회에는 왕부인이 도착해야 비로소 탁자와 의자를 배치하는 것이다. 저녁식사는 비록 가모가 베푸는 것이지만 이 노부인은 그래도 왕부인의 '중궤' 권한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임대옥이 자리에 앉은 후에, 가모는 왕부인에게는 자리에 앉으라고 하지만, 왕희봉, 이환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둘째, 만일 집안에 여러 대의 부부가 있으면, 중요한 명절이나 경사를 맞이했을 때, 혹은 내빈이 있을 때, 아랫대의 정처는 상징적으로 웃대의 정처의 식사를 모신다.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가모의 식사를 모시는 것은 효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고대의 "칠출(무자, 음일, 시댁식구를 모시지 않는 것, 구설,도절,투기,악질)과 "삼불출(돌아갈 집이 없는 경우,시부모를 위하여 삼년상을 치른 경우, 남편과 결혼햇을 때 빈천했으나 나중에 부귀해진 경우)"등 혼인제도외에 "시부모주도권"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녀들은 부득이 이러할 수밖에 없었다. 설사 상징적으로라도 모셔야 하는 것이다. 만일 시어머니나 시할머니가 좋아하지 않으면, <공작동남비>의 류란즈가 바로 그녀들의 운명이다.

 

셋째, 고대에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가정에서는 배분, 등극(예를 들어 처,첩)에 따라 식사를 따로 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가모는 아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환, 왕희봉과 왕부인등 서로 다른 배분의 정처들은 내빈이 출석한 더 높은 배분의 어른이 베푸는 만찬에서 식사를 할 수는 없다. 식사의 규격, 규모등은 차이가 있다. 주로 '예'의 제약이다. 임대옥은 비록 어리고, 왕부인보다 배분이 낮지만, 그의 내빈신분으로 인하여 엄숙하고 융통성없는 '예절'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저녁연회를 얘기하자면, 마찬가지로 가부의 '며느리'이지만, 임대옥의 '준외숙모'인 조이낭(趙姨娘), 주이낭(周姨娘)은 아예 참가자격조차 없다; 마찬가지로 가씨집안의 혈통이지만, 가환(賈環)은 남자인데, 영춘등 세 명의 여자아이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차별을 이렇게 심하게 한단 말인가? 먼저 탄식을 하게 된다. 이것이 임대옥의 두번째 역사수업이다.

 

조이낭, 주이낭 두 사람은 모두 가정의 첩이다. 그녀들은 독자적인 측실이 있고, 지위는 시녀(평아, 습인)보다 높다; 그러나 조이낭은 탐춘과 가환을 낳았다. 특별히 가환을 낳았으므로, 지위는 다시 자식이 없는 주이낭보다 높다.

 

고대의 '중궤'제도에 따르면, 만일 이 만찬을 가정 혹은 왕부인이 주최한 것이라면 조이낭, 주이낭도 참가할 수 있다. 식사시, 왕부인은 가정의 옆에서 정좌하고, 그녀들 두 명은 그 옆에 앉게 된다. 그러나 이 만찬은 가모가 베푸는 것이다. 아랫대의 첩은 모실 자격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출석하지 않았다.

 

임대옥은 왜 두 '준외숙모'들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았을까?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하나는 고대의 친척친구가 방문하고 접대할 때, 첩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적서의 구별이다. 상하와 귀천을 분명히 한다" 명률과 청률은 모두 '처첩의 질서를 어긴 것"을 처벌하는 별도 조문이 있었다. "무릇 처를 첩으로 삼는 자는 장100대이고, 첩을 처로 삼는 자는 장 90대이다. 그리고 시정해야 한다" 만일 임대옥이 가면, 행위상 조이낭, 주이낭 두 사람의 첩을 '정부인'으로 인정하는 셈이므로, '처첩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어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율법에 어긋날 뿐아니라, 왕부인에게 득죄(得罪)할 일이다. 임대옥은 비록 배분은 조이낭, 주이낭보다 낮았지만, 신분은 조이낭, 주이낭보다 높았다. 마치 탐춘이 왕부인을 모친으로 여기고, 친생모친을 '이낭'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인정미없는 법도를 고대의 민간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가환은 임대옥의 친사촌오빠인데, 왜 나와서 사촌여동생을 만나지 않는 거냐고. 가모 혹은 왕부인은 왜 사람을 보내어 부르지 않았느냐고. 만일 '서출'이라는 이유만이라면 탐춘도 마찬가지로 '서출'인데, 그녀는 왜 만찬에 참석했는지?

 

이는 가환의 잘못이 아니다. 가환은 그저 가부의 내부투쟁의 희생물일 뿐이다. 얘기하자면, 가탐춘은 행운이다. 일생동안 가모의 곁에서 자랐다. 고대에 "첩의 자녀든 부친의 정처를 모친으로 부른다"는 규정에 따라, 왕부인은 이 딸을 받아들였다. 가환은 그러나 때를 잘못 만났다. 그가 출생했을 때, 정부인인 왕부인이 이미 적자인 가보옥을 낳은 상태였다. 그리고 가보옥은 옥을 물고 나왔다. 그리하여 가모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가보옥을 평생 의지할 사람으로 생각한 왕부인이 어찌 가환을 다시 아들로 여기겠는가? 그리고 어찌 그가 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가환은 친모 조이낭과 생활했다. 확실히 이러한 조치는 왕부인이 법도를 어긴 것이다. 실제로, 가환과 가모의 조손감정이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가환을 권력핵심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단절시켜 버렸다. 그로 인하여 가보옥의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공개적으로 조이낭을 탄압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아주 자주 벌어지는 '처첩쟁총(妻妾爭寵)"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고대에는 "모친은 아들때문에 귀해진다(母以子貴)"는 관례를, 아들이 잘나면 모친도 잘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형부인이 원앙에게 이렇게 권한다: "네가 문을 넘어 들어오고 1년반이 지나서 아들을 낳으면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이낭은 가환을 낳았을 뿐아니라,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그리고, 가정은 조이낭을 아주 아낀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자면 적서간의 갈등이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왕부인은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조이낭을 괴롭히는 수단은 많고도 많았다. 예를 들어, 암중으로 왕희봉에게 그녀들의 '월분전(月錢)' 혹은 '지분전(脂粉錢)'을 깍도록 해도 된다. 조이낭은 확실히 힘들게 살았다. 가환을 꼼짝못하게 막아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부저추신(釜底推薪)이다. 아들이 성공할 기회가 없으면, 모친이 귀해질 수 없다.

 

류신우 선생은 가부를 이렇게 평가했다. "허위(僞)"라고. "가정은 위군자이고, 위도학이며, 왕부인은 위자비, 위선인이다. 조이낭과 가정은 위부부로 기한만료로 폐기되었다." 등등. 그러나 류선생이 못보고 넘긴 역사요소가 있다. 고대의 생활은 무슨 예의제도, 규범 권력분쟁등으로 점철된 압박이 심한 환경이다. 거기서 '허위'스럽지 않으면, 생활해나갈 수가 없다. 임대옥을 따라서 가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서 많은 점들은 '부득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