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홍루몽

홍루몽은 어떻게 중국제일명저로 되었는가?

중은우시 2013. 12. 24. 01:13

글: 주가웅(朱家雄)

 

 

 

"사대명저(四大名著)"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다.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책이 만들어진 순서)의 이 4권의 거작은 중국백성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소설이며, 방대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을 뿐아니라, 중국고전소설의 최고성취를 대표한다. 단, 이 4부의 위대한 작품은 언제부터 "사대명저"로 통칭되었는가? 아마도 이것은 모두 아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근원을 따져보면 명나라때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이 "사대기서(四大奇書)"라는 말을 한 것이 "사대명저"의 남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여 명나라 통속문학의 제일인이라고 불리는 풍몽룡은 고전송속소설집 "삼언(三言)"(<유세명언>, <경세통언>,.<성세항언>)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이 명말의 문학가는 먼저 윌에게 명나라때의 "사대기서"를 언급한다: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 및 <금병매>. 명말청초의 문학가 이어(李漁)는 이 견해를 이어받아, <삼국연의>를 "제일기서(第一奇書)"라고 불렀다. 비록 이어와 동시대의 문학비평가인 김성탄(金聖嘆)은 몇 권의 재자서(才子書)라는 말을 내놓기도 했지만, 명말청초에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사대기서"라는 말이다. 나중에, 조설근(曹雪芹)이 건륭전기 창작한 위대한 작품 <홍루몽>이 <금병매>를 대체하여 명대 "사대기서"라는 말은 "명청사대기서"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대명저"라는 말은 아무런 의문없이 <홍루몽>이 쓰여진 후에 나온 말이다. 이 주장이 청나라때 틀을 갖추지는 않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도 민국연간의 신문화운동때 초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마도 신중국성립이후 내지 1970년대말 개혁개방초기에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사대명저"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중국고대문학작품을 읽고, 연구하고 검토하는 기나긴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컨센서스를 이룬 것이고, 최종적으로 확정, 명명된 것이다.

 

사대명저중 <홍루몽>이 가장 늦게 쓰였다. 그러나 후래거상(後來居上)이라고, 그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공인받고 있다. 중국고전문학의 최고봉이다. 다만, <홍루몽>이 이런 지위를 획득한 것은 확실히 기니간 과정을 겪었다. 구파홍학가중에서 최초의 홍학가인 지연재(脂硯齋) 그리고 청나라때의 왕희렴(王希廉), 장신지(張新之) 및 요섭(姚燮)등은 모두 "평점파(評點派)"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색은>을 저술한 왕몽완(王夢阮), 심병암(沈甁庵)등은 "색은파(索隱派)"의 대표이다. 건륭시대에 <홍루몽제사(紅樓夢題詞)>를 쓴 섭숭륜(葉崇侖)등등은 개략 "제영파(題詠派)"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홍학(紅學)"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광서초기 <홍로몽>을 즐겨읽던 경사의 사대부들 입에서이다. 반은 농담식으로 붙인 말이다. 민국초기에 이르러, 소설을 읽기 좋아하던 주창정(朱昌鼎)이라는 사람이 <홍루몽>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친구가 어느 날 방문했을 때 그가 머리를 쳐박고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선생은 무슨 경전을 공부하시는지요?" 주창정이 답한다: "딴 것이 아니고, 내가 전공하는 것은 '홍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널리 알려진 후, "홍학"이라는 단어는 점차 <홍루몽>을 연구하는 학문의 전용명칭이 된다.

 

국학대가 왕국유(王國維)는 1904년에 <홍루몽평론>이라는 글을 쓰면서 철학과 미학의 측면에서 <홍루몽>의 예술적 성취를 분석했다. 이 소설은 "철두철미한 비극이다"라고 하고, "해탈을 이상으로 하는" 예술적 성취가 아주 높은 "일대저술"이라고 한다. 왕국유는 색은파, 평점파도 아니고, 제영파, 고증류도 아니다. 다만 그는 <홍루몽>을 높이 평가하여 <홍루몽>의 문학사적 지위를 끌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운다. 청나라조정의 은혜를 입은 왕국유는 "청유(淸遺, 청나라 유신)"로 자처했는데, 그의 <홍루몽>에 대한 높은 평가는 아마도 그것과는 직접 관련이 없을 것이다.

 

민주혁명가로 '현대성인'이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는 저명한 교육가 채원배(蔡元培)는 1917년 9월에 출판한 <석두기색은>이라는 첵에서 이런 견해를 내놓는다: <홍루몽>은 은우성(隱寓性)이 아주 강한 정치소설이다. '작자는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책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을 애도하고, 청나라의 잘못을 들추어, 특히 한족의 명사로 청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 대하여 통석(痛惜)하는 뜻을 나타냈다" <홍루몽>이 쓰여질 때는 문자옥으로 유명한 건륭연간이었다. 그래서 작자는 아주 은회적인 수수께끼식의 어법으로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홍루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채원배는 혁명당의 원로이다('반청복명'을 정치적 선전구호로 내걸었다). 국민당(청왕조를 전복시킴)의 원로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각도에서 <홍루몽>을 연구하고 이해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운명일지 모른다. 채원배의 견해는 당시에 크게 환영받는다. 채원바의 사회영향력도 거대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홍루몽>의 명성을 떨치게 만든다. 그 때, <홍루몽>의 작자가 도대체 누구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었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조설근은 그 조상이 한족이다. 다만 명말청초때 이미 만주족에 편입되어 건륭황제의 인정을 받았다. 조설근의 가족은 조부와 부친의 시대에 부귀영화를 맘껏 누린다. 그가 어렸을 때, 조설근가족은 옹정제의 명으로 가산몰수당하고, 조씨집안은 이때부터 몰락한다. 다만 조설근은 기적(旗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생 노동을 하지 않고도 매월 정부에서 몇 냥의 은자를 받아서 만주족으로서 대우를 받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글을 쓸 때 채원배가 후세인들이 보편적으로 작자가 확실히 조설근이라고 인정할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조설근의 신분과 가족연원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홍루몽>이 '반청복명'에 뜻을 둔 걸작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저명한 학자 겸 문화명인 호적(胡適)은 소위 신홍학의 창건자이다. '정리국고(整理國故)'의 배경하에, 그는 1921년 <홍루몽고증>이라는 책을 써서 새로운 관점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홍루몽>의 작자가 조설근이라고 확정한다. 예를 들어, <홍루몽>은 조설근이 전80회를 완성하고, 고악(高鶚)이 후40회를 완성했다, 다시 예를 들어, 호적은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전적 소설이다. 등등. 호적의 새로운 관점 및 그의 고증식 연구법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심지어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철저히 이전의 홍학연구의 견강부회, 수수께끼풀이식의 방법을 벗어났다. 호적이 <홍루몽고증>을 쓴 것은 상해아동도서관이 출판하는 신표점본 <홍루몽>의 서언으로 쓴 것이다. 다만, 그의 행위는 순수히 학문을 위한 학문은 아니었고, 구전통을 타파하고, 신문화운동에 조력하려는 동기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호적은 이 글에 정말 많은 노력을 들인다. 그리고 이 서언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그래서, 그는 이로써 홍학연구의 신천지를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호적은 <홍루몽>에 대한 평가를 그다지 높게 해주지 않았다. 왜 호적은 <홍루몽>에 대한 평가를 그다지 높지 않게 한 것일까? 이것은 호적 개인의 문학가치관이 주요한 작용을 하였다. 다만 아마도 당시의 시대배경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어쨌든 북대교수로서의 높은 급여를 주는 중화민국은 청왕조를 전복시킨 것이니까. 어쨌든 <홍루몽>은 기인이 쓴 청왕조의 저작이니까.

 

호적의 관점은 직접적으로 홍루부회학(紅樓附會學)을 일소하는 동시에, 그를 북대교수로 데려오고, 그에게 큰 은혜가 있는 채원배 선생의 <홍루몽>에 관한 관점을 뒤흔든다. 채원배는 호적의 도전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경용병포(兼容幷包)"로 호적이 고증을 중시한 연구방법을 긍정한다. 그는 그저 1927년이 되어서야 다른 사람의 책의 서문을 쓰면서 반격을 하였을 뿐이다. 다시 한번 자신의 관점에 대한 변호를 약간 한 것이다. 채원배와 호적의 논쟁은 당시에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다. 객관적으로 <홍루몽>이 '4대고전명저'의 반열에 오르는데 좋은 기반을 닦게 해준 것이다. 또한 홍학의 형성과 추가적인 발전에 아주 좋은 기초를 닦는다. 호적의 '고증파'와 채원배의 '핵은파'는 이로부터 홍학에서 장기간 병존하며 21세기의 오늘날까지 서로 연구하고 논쟁한다.

 

신중국의 창건자, 일대위인 모태도오 홍학연구에 심득을 얻은 전문가이다. 다만 그는 실증파홍학가는 아니고, 색은파홍학가도 아니다. 그의 <홍루몽>에 관련되는 여러가지 말고 관점을 보면, 아마도 그를 "계급투쟁파홍학가"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모택동은 사상성과 문학성에서 모두 높은 성취를 이룬 <홍루몽>은 아주 정교하게 봉건사회와 봉건사회의 쇠망사를 그렸다. 독자들에게 무엇이 봉건사회인지를 인식하고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계급분석의 관점과 방법으로 <홍루몽>을 해독하도록 주장했다. 모택동은 일찌기 청년시대에 장사(長沙)에서 공부할 때 <홍루몽>을 읽었다. 그후, 혁명전쟁연대이건 신중국성립이후 일리만기(日理萬機)하던 연대이건, 그는 이 책에 대하여 강렬한 열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여러번 통독했을 뿐아니라, <홍루몽>을 아주 잘 알았고, 자주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각종회의에서의 말씀에서, 보고서를 만들 때도 <홍루몽>의 전고를 인용한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고 공개적으로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1954년과 같은 경우, 모택동은 이희범(李希凡), 남령(藍翎)의 두 청년학자가 <문사철>잡지에 글을 빌어 유평백(兪平伯)의 홍학관점을 비판한 일로 전국적인 범위에서 <홍루몽>연구의 선풍을 불러일으킨다. <홍루몽>작품 자체의 성취 그리고 모택동과 같이 영향력이 아주 크고 말한마디가 일언구정(一言九鼎)인 지도자의 전례없은 숭상은 <홍루몽>으로 하여금 최대의 사회적 영향력을 얻게 만든다. 그리고 <홍루몽>을 중국고전문학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

 

이상의 여러가지 일들을 거처 당초 명조의 "사대시서"는 최종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누ㄱ나 알고 있는 <홍루몽>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국고대 "사대명저"로 바뀌어 갔다.

 

1970년대말 80년대초, <홍로뭉학간> 잡지가 창간된다. 중국<홍루몽>학회가 성립된다. 이렇게 하여 홍학은 심지어 체재내에서 안정적이고 유력한 지지를 받게 된다. 홍학의 발전은 끝이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홍루몽>이 받은 관심과 영광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비록 <홍루몽>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지. 홍학이 정말 그렇게 대단하게 자랑할만한 것인지, 심지어 홍학이 정말 존재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의문의 목소리가 계속 있어왔지만....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당랑거철과도 같았다. <홍루몽>은 여전히 봉쪽하늘에 뜬 태양처럼 현란했다. 홍학은 여전히 도도한 장강처럼 장대하게 앞으로 밀려나갔다.

 

신시대이래 특히 최근 6,7년간 일부 중량급의 심지어 대가급의 학자, 작가, 평론가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홍루몽>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연이어 <홍루몽>에 대한 뛰어난 글들을 발표한다. 이들 저작과 글은 이들 작가, 학자, 평론가의 <홍루몽>연구등 방면에서의 남다른 조예와 견해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를 포함한 아직 <홍루몽>에 대하여 진정으로 진지하게 연구해보지 않은 일부 젊은 사람들로서는, 이같은 거작과 여러가지 연구저작과 연구논문들의 앞에서 정말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고 우러러 볼 수밖에 없다. 함부로 부닥치고, 연구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아마도 20,30년이후, 이들 젊은 이들 중에서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그때 아직도 정력이 남아 있고, 기연이 있다면, 필자를 포함한 이들이 아마도 이전의 선배들이 걸었던 족적을 뒤따라서 이 위대한 거작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