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무창의거가 발발하기 전날, 의거소식이 누설되었다. 여러 혁명지사들이 연이어 피해를 입었다. 위난의 시기에 정정영은 앞장서 들고 일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청나라조정의 충실한 조아(爪牙)이자 공정영 2배 배장(排長)인 도계승(陶啓勝)을 총을 들어 쏘았고, 중국국내외를 깜짝놀라게 한 신해혁명의 첫 총성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린 역사적인 순간에 중대한 공로를 세운 정정영이 나중에 부끄러운 혁명이 반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정정영은 자가 정국(定國)이고, 호북 무창 사람이다. 청나라말기 호북신군 공정병 팔영에서 군인으로 있었고, 일찌기 공정영 혁명대대부 참의를 지냈다.
무창의거는 원래 1911년 10월 6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은 누설되고, 의거날은 할 수 없이 10월 11일로 연기되었다. 이 기간동안, 다시 사건이 벌어진다. 손무(孫武)등 혁명당인들은 러시아조계의 완선리에서 폭약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부주의하여 폭약이 폭발하고 만다. 폭발후, 큰 불이 나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짙은 연기가 창문과 지붕으로 뿝어나가고, 사방의 이웃들이 불끄라고 소리지른다. 그리하여 러시아조계의 순포들이 달려와서 아직 가져가지 못한 의거명단, 깃발, 포고문, 탄약, 인장서신등을 압수해 갔다.
호북총독 서징(瑞澂)은 러시아조계에서 전해져온 의거명단, 깃발과 포고문을 본 후, 즉시 명을 내려 무한삼신의 성문을 걸어잠그게 한다; 그외에, 군대는 일체 외출과 휴가를 중지하고 감시감독을 강화하였다. 서징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 무창은 졸지에 백색공포에 힙싸이고 혁명당인들은 모두 위기에 처한다.
상황이 아주 위급해지자 의거를 앞당길 수밖에 없게 된다. 10월 10일, 공정영의 혁명당인들은 영대표와 혁명군대대장 웅병곤(熊秉坤)의 지휘하에, 앞당겨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의거의 도화선은 금방 나타난다. 그날 저녁, 공정영 이배배방 도계승은 병력을 이끌고 순찰을 나선다. 그리고 김조룡(金兆龍), 정정영등 혁명당인들이 총을 닦고 탄을 장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질책하며 묻는다: "너희들 뭐하려는 거냐?" 김조룡은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말한다: "불측한 사태를 대비하는 겁니다." 도계승은 대노하여, 앞으로 나아가 김조룡을 붙잡고 말한다. "너희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냐?" 김조룡은 말한다: "반란을 하면 하는 것이지 네가 어떻게 하겠느냐?" 도계승은 후위병에게 김조룡을 체포하라고 말하자, 김조룡이 크게 소리친다: "아직도 손을 안쓰면 언제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냐?"
정정영은 총을 들고 사격을 하여, 도계승을 맞춘다. 도계승은 부상을 입고 도망치나, 상처가 심하여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바로 무창의거로 청나라를 전복시킨 첫번째 총성이다. 이는 천년동안 계속된 황제제도의 검은 밤의 고요를 끝장낸 것이다. 이 총성은 청나라 봉건통치의 상종(喪鍾)이다. 이 총성이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총탄이 비오듯 내리며, 무창의거가 발발한다.
이 첫번째 총소리를 듣고, 공정제8영의 대래관대 완영발, 우대대관 황곤영, 사무장 장문도는 각각 권총을 들고, 나와서 탄압한다. 정정영은 다시 총을 쏘아 우대관과 사무장을 맞춘다. 완영발은 정정영이 두 명을 연속으로 죽이는 것을 보고 도망치고자 한다. 그러다 돌연 정정영이 쏜 총을 맞고 한발에 죽는다. 정정영은 수의제일창을 쏘았을 뿐아니라, 도계승, 완영발, 황곤영, 장문도 4명을 총으로 죽였다.
신해혁명의 승리후, 정정영은 국민혁명정부가 수여한 "1등공신"과 "수의제일창"이라는 금으로 된 편액을 받는다.
무창의거때 호북신군 제8진공정제8영 총대표를 맡았던 웅병곤은 1918년 상해의 거소에서 쓴 <무창기의담>에서 이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다. "이배장 도계승은 동생이 권하는 것을 듣지 않고 호위병 2명을 이끌고, 나의 병영으로 왔다. 선발제인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사 김조룡에게 소리쳤다: 너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냐. 김이 대답했다: 어르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네가 어떡하겠느냐. 도계승은 체포하라고 소리쳤고, 김과 도는 서로 맞붙었다. 김이 이길 수 없게 되자 소리를 쳤다. 우리 사람들이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냐. 같은 병영의 정정국(정정영)이 이에 호응하여, 총을 들어 도계승의 머리를 쏘았고, 피가 흥건했다. 도는 김을 풀어주고 도망쳤다. 정정영은 다시 한발을 쏘아 도계승의 허리를 맞추었다. 이것이 의거 첫번째 총성이다." 웅병곤의 이 글은 모두 의거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쓴 것이다. '실록'에 속한다. 그러므로 신뢰도가 높다.
그렇다면, '무창의거 제1총성'을 쏜 사람인 정정영은 나중에 별달리 이름도 남기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다. 어떻게 된 것인가. 원래 정정영은 진정한 혁명당인이 아니다. 그가 쏜 첫번째 총성은 완전히 우연한 사정으로 발생한 것이다. 무창의거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정영은 북양군벌에 의탁한다. 그는 혁명당인들을 해치는 반동세력의 조력자가 된다. 나중에는 혁명당인 가정괴(賈正魁)에게 체포된다. 가정괴는 그에게 술을 먹여서 취하게 한 후 장강에 빠트려 죽인다. 그는 무창의거의 첫번째 총성을 쏜 공로가 있지만 그이후 그는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더 이상 그를 언급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진다.
그의 친구인 김조룡도 좋은 자는 아니다. 그는 무창의거때 아주 용감한 모습을 보였다. 무창의거후에는 의거군의 현상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떠난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김조룡은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금방 북양정권에 몸을 답는다. 그는 "호북세무집사대장'의 자리를 차지한다. 일찌기 호북독군차파견원 겸 육군부 후차원, 무한총계사처 정탐원이 된다. 그는 혁명당인들과 적이 되어 사람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멀리한다. 북벌군이 무창을 함락시킨 후, 김조룡은 면직된다. 나중에 그는 소리소문없이 살아간다. 9.18사변후 김조룡은 다시 나타나서 호북성 '청향'총국 황경현단좌가 된다. 나중에 1933년에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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