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유문전(劉文典): 민국기인(民國奇人)

중은우시 2013. 4. 1. 22:41

글: 노선성(魯先聖)

 

 

 

20세기 가장 황당하고 괴이한 중국학자는 유문전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정면으로 당시의 지도자인 장개석을 들이받았고, 심지어 장개석과 주먹질까지 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대학의 수업때 아편을 피웠고, 심지어 아편산지로 가서 아편을 구매하기 위하여 수업을 반년이나 빼먹기도 했다. 그는 젊은 재능있는 인재들을 멸시했고, 사람들 앞에서 심종문(沈從文)과 전종서(錢鍾書)를 모욕주기도 했다. 그는 광망하게 스스로 중국역사상 장자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의 여러가지 언행과 행적은 중국현대문학사상 독보적이다. 동시대의 괴이한 문인들 중에서도 압권이다. 당시의 중국문단에 많은 골치거리와 불유쾌한 일들을 가져왔다. 나중에 중국문인들에게는 식후에 얘깃거리를 많이 제공해주었다. 오늘날까지 그의 여러가지 황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느낀다.

 

유문전은 <장자>를 연구하는 전문가이다.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자고이래로 두 사람 반 만이 장자를 알았다. 한 사람은 장자 자신이고 또 한 사람은 그가 말하지 않았고, 반명은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남조시인 사령운(謝靈運)의 "재고팔두(才高八斗)"와 나란히 얘기할 만하다. 당시의 사령운도 심고기오(心高氣傲)한 인물이다. 그가 쓴 시는 예술성이 아주 강하다. 특히 형식미에 주의했고 많은 문인아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편이 나오면 사람들은 앞장서서 이를 베꼈고, 널리 퍼졌다. 송문제는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ㄱ, 특별히 그를 경도로 불러 직위를 맡겼다. 그리고 그의 시작과 서법을 "이보(二寶)"라고 칭했다. 그리고 자주 그는 연회를 베풀면서 시를 썼다. 스스로 비범하다고 느낀 사령운은 이런 예우를 받은 후, 더욱 광망자대해졌다. 한번은 그가 한편으로 술을 마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 과장하여 말했다: "위진이래 천하의 문학지재는 모두 일석(一石)인데, 조자건(曹子建)이 혼자서 팔두(八斗)를 차지하고, 내가 일두(一斗)를 얻었으며, 천하의 나머지 사람들이 일두(一斗)를 나눠가지고 있다." 두 사람의 고오함은 같은 유형이라고 할 만하다.

 

유선생의 가장 경전적인 괴이한 이야기는 1928년 그가 안휘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발생한다. 안휘대학에는 학생운동붐이 불었고, 장개석은 안경(安慶)으로 가서 시찰했다. 장개석은 그의 겉모습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유문전인가?" 그러자 유문전은 불쾌하여 반문한다: "당신이 장개석입니까?" 장개석은 그에게 수업거부학생들을 징벌하라고 지시한다. 그는 말했다. "여기에는 단지 교사와 학생이 있습니다. 누가 공산당인지 모릅니다. 당신은 총사령관이니 당신의 병사들을 잘 거느리면 됩니다. 나는 대학총장이니, 학교의 일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장개석은 아주 화가나서, 심하게 유문전이 학생을 단속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질책한다. 유문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장개석의 코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군벌이다." 그리고 뛰어나오며 장개석을 치려고 했다. 그가 끌려나간 후, 장개석은 혼자서 욕을 했다: "정말 미치광이로군"

 

고전문학을 연구해왔던 유문전은 신문학운동을 멸시했다. 그리하여, 신문학 백화소설의성취로 국내에 읾을 떨쳐서 교수로 임용된 심종문은 유문전으로부터 공개적인 모욕과 멸시를 당한다. 유문전은 공개적으로 힐문한다: "그 심종문이 무슨 교수의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수업때 이렇게 말한다: "만일 교수가 되려면, 진인각은 1위안이고, 나 유문전은 1마오이다. 심종문 그 교수는 그저 1푼의 가치밖에 없다." 곤명이 일본의 공습을 받을 때, 유문전은 학생과 함께 진인각을 보호하여 방공동으로 도망쳤다. 심종문도 급히 따라오는 것을 보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욕을 한다. "내가 폭약을 맞아 죽으면, 아무도 학생들에게 장자를 가르칠 수 없다. 너 심종문은 왜 도망치는 거냐.' 다행히 젊은 심종문은 수양이 있었다. 그래서 그와 이를 따지지 않았고, 못들은 척 바로 몸을 숨긴다. 아마도 그렇지 않았다면, 유문전은 젊은이의 주먹질을 한 대 받았을 지도 모른다.

 

1943년, 연대 중문과의 대리주임인 문일다(聞一多)는 유문전을 해임하기로 결정한다. 유문전이 임의로 학교를 떠났서,운남 보이현의 마흑(磨黑)에서 반년을 머물렀기 때문이다. 원인은 그가 아편을 피우기를 좋아했고, 마흑에는 좋은 아편이 나왔기 때문이다. 현지의 친구들은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대학자를 초청한 것이다. 그는 스르로 이를 응락하고 그저 소수인들과 구두로 인사만 하고 수업을 버리고 떠나갔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번 가자 반년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그가 평소에 수업을 할 때도 아편을 피우면서 강의했다는 점이다. 학교측에 잡역부를 시켜서 차호를 들고 언제든지 그에게 물을 따르도록 시키게 했다. 그 영향은 아주 나빴고, 여러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문제를 삼게 된다. 문일다는 그를 다시는 채용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언어학자인 왕력(王力)이 유문전을 위하여 얘기해주었다. 그는 노선생은 북평에서 학굘르 떠나 남으로 이주했는데, 이것은 애국적인 것이라고. 그러자, 문일도가 화를 내며 말한다:" 설마 매국노만 되지 않으면 마음대로 자리를 떠나도 된단 말인가. 학생을 가르치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민국시대의 중국문단에 괴인, 기인은 아주 많았다. 그러나 유문전은 그 중에서도 첫손꼽히는 인물이라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