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민국기안(民國奇案): 남편은 장모와 결혼하고, 처는 시아버지와 결혼하다.

by 중은우시 2012. 9. 26.

글: 이자지(李子遲)

 

1911년 선통제가 하야한 후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되기까지, 중화민국은 38년간, 심지어 더욱 일찌기 청나라 중,후기부터 시작하여 특히 1840년 아편전쟁이후, 이 100여년간 중국은 천하가 동란에 빠지고,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 사회였다. 많은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처자식과 헤어져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고통 속에서 생활했다. 백성들은 힘든 고난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중 가장 비참한 것은 8년 혹은 14년간이라고 불리는 항일국난시기이다. 일본인의 발굽이 중화대지를 유린하고, 중국은 하마터면 멸망할뻔했다. 중국인들은 하마터면 망국노로 전락할 뻔했다. 생령은 도탄에 빠지고, 거처를 잃고 헤매야할 뻔했다. 여기서 소개할 기이한 이야기는 바로 이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원래 한 중국현대저명작가가 쓴 다큐멘터리 문학작품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래 전에 이 작품을 읽어보았으므로 원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스토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동북(만주)지방의 한 가난한 가정이다. 한 젊은 부부(아이가 있었는지, 아이가 몇명인지, 몇 살인지, 남자아이가 몇이고 여자아이기 몇인지...여기에서는 더 이상 소개하지 않겠다)가 있었는데, 1931년 일본이 동북삼성을 점령한다. 그들은 온 가족이 관내로 옮겨와서, 원적지인 산동으로 간다. 그러나, 다시 일본이 화북까지 공격하고, 황하지역이 다시 점령당한다. 장개석은 화원구댐을 폭파하도록 명령하여, 일본인들의 남하를 막았다. 이때 그들은 다시 장강하류지역으로 떠난다. 1937년 일본이 남경대학살을 벌이자,  그들은 거기서도 견디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난민행렬에 끼어 호남호북, 사천으로 도망친다. 이 도망길에서 그들 일가는 불행히도 서로 헤어지고 만다.

 

어린 부부가 동북에 있을 때, 남자의 부모 즉 여자의 시아버지, 시어머니중 시어머니는 이미 병사했다; 여자측 부모 즉 남자의 장인, 장모중에서 장인은 이미 사망했다. 그래서 그들이 남으로 도망칠 때, 두 노인 즉 시아버지와 장모를 데리고 떠난다. 나중에 강소에서 안휘, 강서를 거쳐 호북으로 도망치는 길에, 부부 둘과 그들 두 노인은 서로 흩어져 버린다. 그후 그들은 계속 걸어가면서 서로를 수소문해서 찾기 시작한다. 호북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장모를 만나고, 처는 시아버지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피난을 가면서 계속 가족을 찾았다. 이 기나긴 피난길을 가면서, 남편과 장모, 처와 시아버지는 모두 한쌍의 남녀이다. 서로 신체와 생리상의 필요에 따라, 윤리, 도덕, 수치를 따지지 않고, 남녀관계가 된다. 함께 살면서 실질적인 '부부'가 된다.

 

사실 이것을 그들 본인의 잘못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위기가 사방에 놓여 있으며, 앞날이 어떻게 될 지 알 수도 없고, 내일은 없는 나날이었다.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이렇게 계속해서 나가고 나가는데, 어디까지 갈지, 언제까지 갈지, 그리고 끝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 보살피면서 피난을 간 것이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래서 잘못이 있다면 그 고난의 시대의 잔혹한 전쟁을 탓해야 하고, 잘못이 있다면 일본인, 일본의 군국주의분자를 탓해야 한다.

 

이 두 쌍의 특이한 전란중의 '부부'가 그 중의 한 두 사람이 죽어버렸거나(내가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그들이 서로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운'이 좋았고, '명'도 질겼다. 4명은 죽지 않았을 뿐아니라, 서로를 찾는다. 그리고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미 1939년 하반기이 일이었다. 그들은 사천까지 도망쳤고, 거기서 다시 가정을 꾸린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그들 부부가 부부관계를 회복했는지, 장모와 시아버지가 결합했는지(만일 그랬다면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는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이 특수한 경력으로 4사람간의 칭호와 관계는 이미 복잡할대로 복잡해졌다.

 

남편은 처를 계모라 부를 수도 있고, 장모를 후처라 부를 수도 있고, 부친을 처의 후부(後夫)라 부를 수도 있다;

처는 남편을 계부라 브를 수도 있고, 시아버지를 후부(後夫)라 부를 수도 있고, 모친을 남편의 후처라 부를 수도 있다.

시아버지는 아들을 처의 전남편이라 부를 수도 있고, 며느리를 후처라 부를 수도 있고, 사돈을 며느리라 부를 수도 있다.

장모는 딸을 남편의 전처라 부를 수도 있고, 사위를 후부라 부를 수도 있고, 사돈을 사위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특이한 전란 '부부'는 도중에 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 네명의 어른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네 명의 어른은 그들을 또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만일 이 젊은 부부에게 원래 자녀가 있었다면, 그들과 이들 형제자매간에는 서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어쨌든 어지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