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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조여림(曹汝霖): 중국의 제1호 변호사

by 중은우시 2012. 12. 22.

글: 유전(劉典) 

 

"천명의 눈에는 천명이 햄릿이 있다" 역사는 바로 이러한 다원적 사고로 넘쳐나며, 이것이 바로 역사의 매력이다.

역사교과서를 보면, 조여림은 "이십일조"을 체결하여 매국노로 낙인찍혔다. 여러 역사서적에서 그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민국시대 중국변호사제도가 건립된 후 최초의 변호사로서 그의 법률업계에서의 업적은 대단하다.

 

기실 많은 글과 자료에서 오정방(伍廷芳)을 "중국의 제1호 변호사"라고 칭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 오정방(1842-1922)은 1874년에 영국으로 유학가서 영국의 변호사자격을 획득한 후 홍콩으로 가서 변호사업무를 한다. 손중산이 남경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사법총장에 임명된다. 그리고 남방을 대표하여 원세개와 청제퇴위(淸帝退位)등 구체적인 사무에 대하여 협상을 진행한다. 정확히 말해서, 오정방은 중국인이 외국변호사자격을 최초로 취득한 사람이고, 조여림이야말로 중국변호사자격을 최초로 취득한 사람이다.

 

1912년, 북경임시정부는 사법부를 두고, 9월 16일, <율사잠행장정>을 반포시행한다. 여기서 법정소송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중국의 변호사제도는 이렇게 건립되었다. 이때 조여림은 관직에 나가는 것이 순조롭지 못하여, 원세개의 집에서 공직을 사임하고, 일본에서 배운 법률지식을 응용하여 변호사로 일하겠다고 결정한다.

 

당시의 <율사잠행규정>에 따르면, 집업변호사가 되려면, 변호사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건국초기에 해야할 일이 많았다. 당시 정부는 아직 변호사시험을 조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장정>에는 이런 규정도 두었다: 법률교육을 받고, 법학교육 및 법률직업경력에 종사한 등을 보아, 변호사시험에 참가하는 자격보다 더욱 높은 자격을 갖춘 자는 시험을 거치지 않고 직접 변호사자격을 취득할 수있다.

 

예를 들어, 외국대학 혹은 전문학교 및 중국의 국립,공립대학 혹은 전문학교에서 법률을 3년이상 배우고, 졸업증서를 취득한 자"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바로 변호사자격을 획득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해외유학파로 법학과 졸업생인 조여림은 시험면제요건에 해당하였다.

 

순조롭게 변호사자격을 취득한 후, 조여림은 증서의 일련번호가 민국제1호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중국에서 변호사제도를 만든 후 최초의 본토집업변호사가 된다.

 

1912년, 당시의 민중들은 변호사(율사)라는 단어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변호사를 고대의 송사(訟師), 속칭 "송곤(訟棍, 소송꾼)"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당시에, 변호사제도를 건립하는 것은 사회의 광범위한 관심을 얻지 못한다. 조여림이 중국제1호변호사가된 사적도 나중에 그의 관료사회에서의 성공으로 가려지게 된다.

 

민국원년 9월에서 12월까지 4개월의 기간동안, 조여림이 대리한 소송사건은 28건에 이른다. 그리고 당시 대리원상소형사사건중 반수이상의 변호업무를 맡는다. 이때의 경력은 2009년 대륙에서 출판된 <조여림일생의회고>에서 조여림이 자신의 변호사생애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처음에 변호사를 할 때, 규정에 따른 비용 이외에 보수를 따지지 않고, 당사자의 편의에 따랐다. 그때는 기풍이 아직 열리기 않아서, 선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중에 사건이 하나 있는데, 1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고 2심에서는 원심이 유지되었는데, 상고하여 대리원으로 왔다. 이 사건은 사실대로라면 사형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법률에 명문규정이 없어서 상황이 특수했다. 제1심은 사실에 따라 사형을 판결한다. 제2심도 여전히 원심을 유지했다. 피고는 불복하여 대리원에 상고했고, 나에게 변호를 요청한다. 나는 법률에 명문규정이 없으면 죄로 판결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대리원은 원래 서면심리를 하여, 변호장을 제출했다. 결과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로 다시 판결했다. 그래서 피고의 온 집안 사람들이 나의 사무실로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인사를 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가난하여 겨우 토산품을 보내어 감사를 표시하였다."

 

바로 이 형사사건을 성공적으로 변호함에 따라, 조여림은 일거에 유명해진다. 조여림의 만년의 회고록을 보면, 이 당시의 일을 언급하면서 자부심을 드러낸다: "이때부터 모두 소송을 하려면 변호사를 반드시 선임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름이 소리소문없이 퍼져갔고, 문전성시를 이룬다...나중에, 법정대학 학생이 간판을 걸고 변호사업무를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조여림이 변호사를 한 것에 대하여 그의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여림에 대하여 좋게 평가하고 있던 원세개도 일찌기 "왜 변호사를 하려는 것이냐. 변호사는 이전의 송사와 같은 게 아닌가?" 조여림은 이에 대하여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변호사와 송사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변호사는 법률에 근거하여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고, 송사는 사실을 왜곡시켜 이익을 취하려는 자입니다."

 

원세개와 같은 민국총통을 지낸 인물도 변호사에 대한 이해가 송사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보면 당시의 국민들이 현대법치의 정신과 이념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대에, 각양각색의 기이한 사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여림이 일찌기 취급한 "기녀와 태감의 이혼사건"이 그중의 하나이다.

 

청나라말기에 장정헌이라는 태감이 궁을 나와 혼자 살고 있었다. 장태감은 나이가 들어서 혼자 살다보니 부인을 구하고자 했다. 나중에 매파의 소개로 정월정이라는 기녀를 알게 된다. 정월정의 모친은 만일 장태감이 정월정에게 300냥의 몸값을 지불하고 모든 채무를 상환재준다면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한다.

 

장태감은 모친의요구를 들어주고, 정월정은 태감에게 시집을 간다. 결혼후 1년여가 지나서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청왕조는 무너진다. 하루는 정월정 모녀가 장태감이 외출하여 손님을 만나는 틈을 타서, 몰래 금은악세사리를 가지고 떠났다. 장태감이 사방으로 찾아다니는데, 돌연 법원의 소환장이 날아온다. 원래 정월정은 이미 법원에 소장을 제출하여 장태감과의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정월정이 선임한 변호사가 바로 조여림이다. 조여림은 소장에서 정월정이 이혼을 요구하는 사유로 첫째, 장정헌은 태감으로서 결혼하는 것이 풍속을 해치며 비인도적이다; 둘째, 장정헌은 학대습성이 있어 정월정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셋째, 장정헌은 일찌기 결혼한 바 있으나, 전처를 방치하고 다시 결혼해서, 중혼을 이룬다.

 

개정때 쌍방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한다. 장정헌은 이혼은 괜찮으나, 정월정은 반드시 그녀와 결혼할 때 받아간 300냐의 몸값과 훔쳐간 금은악세사리를 돌려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혼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조여림은 이렇게 지적한다: 사람은 소유권의 대상이 아니고, 이는 이미 청나라때부터 엄금한 일이다. 하물며 현재는 이미 민국시대이다. 만일 정월정이 300냥의 몸값을 상환한다면 그것은 인신매매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혼인관계를 해제하는 것은 몸값과는 무관하다. 원래 정월정을 취할 때의 몸값은 상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월정이 휴대한 재물은 상당한 일부분이 그녀 자신의 악세사리와 물품이므로 정월정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

 

장정헌은 다시 주장한다. 일찌기 정월정이 출가하기 전에 그녀를 대신하여 채무를 상환했으며 이는 증거가 있다. 조여림이 다시 반박한다: 장정헌이 당초에 정월정을 위하여 채무를 갚아준 것은 자원해서이다. 정월정은 장정헌이 그녀를 대신하여 채무를 갚아주었기 때문에 결혼하고자 한 것이다. 그녀가 장정헌에게 채무가 있기는 하지만, 노동력으로 채무를 갚았다. 그리고 장정헌은 정월정을 처로 삼은 후 부부재산에 구분이 없었다. 혼전의 각자 재산의 다과에도 불구하고, 혼인이 성립될 때 재산은 공동소유이다. 장정헌과 정월정간의 채권채무관계는 이미 소멸한 것이다.

 

조여림은 장정헌이 입궁하여 태감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하였으며, 지금 당시의 부인이 건재하고 이혼하지 않았으나, 장정헌은 전처를 방치하고 있으니 이는 불의하다. 조여림은 더 나아가 이혼관계를 공익으로까지 확대하여 말했다. 만일 돈때문에 이혼의 자유를 박탈당한다면, 공화체제 및 민국법률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법정심리에서 조여림은 자유, 인도의 새로운 단어와 풍속을 해치고 인의에 어긋난다는 옛 도리를 모두 들어서 변론한다. 말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최종적인 판결은 법관들이 조여림의 의견을 거의 들어주고 이혼을 허락한다. 다만 정월정이 휴대한 금은악세사리는 장정헌에게 반환하라고 한다. 조여림은 이 이혼사건으로 다시 한번 경성에 이름을 떨친다.

 

큰 사건들을 하나하나 잘 처리하면서 조여림의 출중한 능력이 드러나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진다. 민국시대에 출판된 변호사의 소장모음집인 <도필정화>에는 당시 33편의 뛰어난 변호사소장을 모았는데, 그중 첫부분의 2편은 바로 조여림이 처리한 두 건의 소장이다. 그중 하나는 <간비치사(奸非致死)의 변소장>이고 다른 하나는 <연안구발(煙案俱發)의 상소장>이다. 이를 보면 당시 조여림이 처리한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한때 명성을 날렸지만, 조여림의 변호사비는 비싸지 않았다. 조여림은 보수를 많이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어떤 때는 수속비도 받지 않았다. 조여림의 자술에 따르면 변호사를 시작한 후 사건의 대소를 따지지 않고 찾아오는 사건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매월 수입은 약간 남는 수준으로 개략 2000위안가량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여림은 친일파의 대표인물이었다. 조여림은 자신의 '친일' 입장을 부인한 바 없다. 그는 회고록에서, 일본인에 대한 호감은 러일전쟁부터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그때 조여림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친히 메이지유신후의 일본의 흥성하는 목격했고, 개전때 일본인들이 용감하게 군에 입대하는 광경도 목격했다. 마음 속으로 이것이 향후 중국발전의 모범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일본과 중국은 모두 동아시아의 국가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일관계가 원세개정부의 대외관계에서 점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자, 친일파인 조여림은 바로 원세개에 의하여 중용된다. 그는 1913년 8월 원세개정부의 외교차장이 된다.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에 악명이 자자한 "이십일조"를 요구한다. 원세개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리하여 외교총장 육정상(陸定祥), 외교차장 조여림, 비서 시이본(施履本)을 중국측 대표로 파견하여 일본과 담판하게 한다. 조여림은 매일 새벽에 원세개의 집으로 찾아가서 보고했고, 대책을 논의했으니 그가 구체적인 기획자이다. 5월 7일, 일본은 최후통첩을 보낸다. 중국정부에게 5월 9일전에 답변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원세개정부는 결국 "우리나라의 국력이 아직 모자라고 아직은 군사적으로 부딪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서명한다. 5월 9일은 '국치기념일'로 지정되고, 매국노라는 모자가 조여림에게 씌워진다.

 

1919년, 대일외교와 '파리평화회의'의 실패로(조여림은 당시 외교총장이었음), 민중과 학생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5.4운동이 벌어진다. 그 결과 "화소조가루(火燒趙家樓)"가 일어나고, 조여림은 결국 사직하고 만다. 기실, 5.4운동의 발생은 아주 복잡한 여러가지 요소가 있다. 조여림 1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단기서는 나중에 조여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번 일은 그들이 원래 나를 향한 것인데, 너희들에 연루되었다. 나는 마음이 좋지 않다." 나중의 교과서에서도 조여림은 '매국노'로 규정되고, 조여림은 영원한 '매국노'가 되어버린다.

 

항전이 시작된 후, 조여림은 공개적으로 친일정권에서 직책을 맡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말년의 절개를 지켜서 이전에 잃은 명성을 만회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화북친일정부를 수립하면서, 한때 조여림을 총리대신의 이상적인 후보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여림은 시종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 친일화북정부는 그에게 '자문위원'이라는 명목상의 직책을 부여한 바 있으나, 조여림은 시종 직책을 수행하지 않고 아무런 활동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국민당정권이 대륙에서 쫓겨난 후, 조여림은 대륙을 떠나 홍콩으로 간다. 나중에 일본에서 8년간 머물다가 다시 미국의 딸 집으로 가서 기거한다. 1966년 미국에서 사망하니 향년89세이다.

 

말년에, 조여림은 <조여림일생의 회고>라는 글에서 "화소조가루'에 대하여 언급한다. 읽으면서 음미할만하다고 느꼈다. "이 일은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의 일이다. 회상해보는 것은 나에게나 남에게나 모두좋은 일이 있다. 비록 잘 모르는 와중에 우리 세 명이 희생되었지만, 다수인의 애국심을 환기시켰고, 어쨌든 댓가는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여림일생의 회고>라는 책에서, 조여림은 "이 일은 나의 일생의 명예에 관계가 아주 컸다"고 적어서 5.4운동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적었다. 그는 "이십일조"를 체결한 내막, 니시하라차관의 경위, 그리고 자금의 용도에 대하여 모두 상세히 설명했다. 자신이 5.4운동때 당한 처지에 대하여 약간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각도에서 보면, 그는 이런 업무에 참여했지만, 이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고,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비록 조여림은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지만, 그의 말을 믿을지 말지는 독자들이 평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