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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단기서(段祺瑞): 그는 어떻게 북양정부의 2인자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2. 3. 10.

글: 왕사군(王仕軍)

 

단기서(돤치뤼)는 북양군벌사상 명성을 떨치면서 논쟁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굴기는 비록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어떤 각도에서 분석하더라도, 대포(大砲)와 긴밀하게 관련있다. 그는 대포로 인하여 유명해진 인물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어렸을 때의 단기서는 공부에 그다지 취미가 없었다. 그러나, 총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은 좋아했다. 그는 자주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나중에 이 말은 과연 사실이 된다. 1879년, 단기서의 조부가 사망한다. 14세의 단기서는 생활의 뒷밤침을 잃었다. 그는 장남이기 때문에 아래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2명이 있었다. 그래서 생활이 아주 궁박해진다. 1882년, 그는 웨이하이(威海)로 가서 군대에 들어가 관대(管帶)로 있던 집안 숙부 단종덕(段從德)에 의탁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1원 은양을 가지고 2000여리를 걸어서 웨이하이까지 간다. 단종덕은 그를 군대내에서 사서(司書)직을 하도록 안배한다. 단기서는 이때부터 군인으로서의 생애를 시작한다. 나중에, 그는 자주 자녀들에게 이때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랑스럽게, "1원으로 집안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1885년, 이홍장(李鴻章, 리홍장)은 텐진 자죽림에서 무비학당(武備學堂)을 개설한다. 그는 회군(淮軍) 사병들 중에서 학생을 선발하고자 한다. 단기서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는 시험에 합격하여 제1기 예비생이 되고, 포병과에 들어간다. 천진무비학당은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을 학문이념으로 하여 서양식의 병법, 지리, 군기, 포법, 산법, 측회등 과정이 있을 뿐아니라, 전통의 경사(經史)교육도 있었다.  단기서는 전력을 다하여, 힘들게 공부했고, 포병과의 최우수 학생이 된다.

 

한번은 학당에서 독일에서 구입해온 관퇴포(管退砲)의 조준기가 고장났는데, 아무도 수리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단기서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고 도면을 그린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측으로부터 중시된다.

 

이홍장은 자신이 친히 만든 북양무비학당을 아주 중시했다. 자주 학당으로 시찰을 갔다. 하루는 오후에 포병실탄연습을 보고 있는데, 하늘이 장난을 쳐서인지 비가 내렸다. 바다위의 바람은 4급에 달했다. 바다 위의 움직이는 표적은 파도에 보였다 말았다 했다. 훈련의 난이도가 몇 배나 증가되었다. 평상시에는 이런 날씨라면 훈련을 취소했을 것이지만, 이홍장은 이미 산꼭대기에 설치한 천막에 앉아 있었다. 학생들은 날씨가 나빠서, 투덜거리며 날짜를 바꾸자고 했다. 교관도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한 관대가 마음을 굳게 먹고 이홍장을 만나러 가서 훈련날짜를 바꾸자고 건의한다.

 

비록 비바람은 불지만, 이홍장은 기분이 좋아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망원경을 들고 표적을 바라보며 관대에게 말한다: "비 조금 오는 것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 빨리 시작해라." 군사훈련은 그냥 예정대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훈련성적은 아주 엉망이었다. 처음에 사격한 몇 대의 포는 과녁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홍장의 얼굴은 하늘색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관리들도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곡이어 몇 개의 포도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 이홍장은 망원경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관리들은 얼굴색이 대변한다. 이홍장은 화를 내며 관전하던 천막에서 떠났다. 그런데,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명중. 명중." 그리고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났다. 시종은 급히 망원경을 이홍장에게 건네고, 이홍장은 포성을 따라서 보니, 3발이 모두 명중했다.

 

군사훈련이 끝나고, 이홍장은 그 포수를 불러오라고 한다. 얼마후, 튼튼하게 생긴 청년이 들어왔다. "너는 이름이 뭐냐?" "학생은 단기서입니다." "어디 사람인가?" "학생은 합비 사람입니다." 단기서는 자신의 고향사람인 것을 듣자 반가웠다. 안휘사람일 뿐아니라, 합비 사람이다. 그래서 이홍장은 더욱 주목하게 된다. 나중에 단기서의 조부인 단패(段佩)와 숙부가 모두 회군 장령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단기서의 조부는 이홍장을 따라 태평군을 토벌하는데 참가했다. 이홍장은 옛 부하의 자제인 것을 알자 더욱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1887년, 단기서는 최우등으로 졸업한다. 이홍장은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단기서를 칭찬한다.

 

1889년, 청나라정부는 5명을 선발하여 독일에 군사를 배우도록 보내기로 한다. 명단이 이홍장에게 올라갔는데, 이홍장은 눈썹을 찡그린다. 명단에 있는 5명중 3명은 산동출신이고 안휘출신이 2명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비학당을 졸업한 단기서를 생각해내고, 명단에서 1명을 지워버리고, 단기서를 명단의 제일 윗자리에 올린다.

 

1889년 봄, 단기서는 독일 베를린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군사이론과 각종 훈련과정을 배운다. 1년후, 그는 다시 명을 받아, 루르의 Essen Krupp병기공장으로 간다. 거기서 화포 싨브을 한다. Krupp가족은 위력이 큰 선진적인 대포를 여러가지 만들다. 여기서 단기서는 그들의 기술에 매력을 느낀다.

 

1890년, 청나라조정의 특사인 홍춘(洪春)은 덕일의 Essen으로 유학생들을 만나러 간다. 단기서 및 동료들은 익숙한 기술로 각종 구경의 Krupp대포를 조종했다. 그리하여 프리츠 크룹의 칭찬을 받는다. 단기서와 그의 동료들은 학업을 완성한 후, 이홍장은 다시 단기서 1명을 독일 Krupp대포공장에 남겨서, 대포제조의 모든 과정을 공부한다. 이홍장은 두번이나 단기서에게 서신을 보내어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하고, 단기서에게 큰 기대를 건다.

 

청일전쟁은 이홍장이 여러해동안 고심하여 경영해온 북양해군을 거의 전멸시킨다. 회군과 상군도 일패도지했다. 청군의 부패와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일시에 조야의 상하에서는 군대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내우외환과 각종 압력하에, 청나라정부는 어쩔 수 없이 군사제도개혁을 결정하고, 신형육군을 건립하게 된다.

 

1895년, 원세개는 명을 받아 천진 소참(小站)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며, 널리 인재를 모집한다. 선발기준은 "숙장 및 기반이 좋은 학생"이다. 단기서와 강계제, 양영태, 공원우, 조곤, 장훈, 단지귀등이 모두 그 휘하에 운집한다.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민국의 풍운인물이 된다. 당시에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북양삼걸(北洋三傑)로 왕사진(王士珍), 단기서, 풍국장(馮國璋)의 세 사람이다. 단기서는 북양의 '호랑이'로 불리웠다.

 

단기서는 소참에서 포영통대(砲營統帶)로 있었다. 휘하에는 이천명이 되지 않는 포병이 있었고, 백문에 되지 않는 대포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최초로 정규장비를 갖춘 포병부대이다. 그는 이로 인하여, '중국근대최초포병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포병부대의 통상업무외에 그는 규정을 만드는 중요업무에도 관여한다. 예를 들어, <편련장정> <전법조전> <훈련조법상세도설>등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외에 단기서는 군대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한번은 그의 고향사람이 군령을 어겼다. 여러 단계를 거쳐 원세개가 단기서에게 봐달라고 요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기서는 큰 소리로 답한다: "이 사람은 내 고향사람입니다. 내가 만일 그를 봐주면, 이후 누가 나를 따르겠습니까?" 원세개는 이로 인하여 그를 더욱 중시한다. 왕사진이나 풍국장보다도 더 위로 대해주었다.

 

1901년 11월, 원세개의 추천을 받아, 단기서는 보용지부(補用知府)로 승진하고 삼품의 관직을 얻는다. 동시에 충무위우군각학항 총판, 포병통대(단장)를 겸임한다. 그후, 단기서는 원세개를 계속 따른다. 그를 따라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대를 끌고 다니고, 농민의 난을 진압하며, 혁명당과 투쟁하고, 원세개가 총통의 보좌에 오르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