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휘(抒暉)
매(鷹)때문에 두 민족이 원수가 되고, 결국 그 중 한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이것은 듣기에 터무니없는 말같지만, 이런 기이한 일이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실제로 발생하였다. 진실한 역사이다.
거란족과 여진족은 모두 중국동북지방에서 발원한 소수민족이다. 거란족은 요나라를 건립하기 전까지는 여진족과 화목하게 잘 지냈다. 서로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거란족이 나라를 세운 후, 야만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다. 미친듯이 여진의 각 부족을 착취했다. 특히 요나라 천조제 야율연희가 집정하던 기간동안, 그는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음탕하며 놀기좋아했다. 그리고 폭정과 가렴주구를 했다. 착취의 강도가 더욱 강해진다. 여진인들은 요나라에 대량의 특산품, 소, 말, 가축을 진공으로 바쳐야 했을 뿐아니라, 대량의 희귀한 동물과 조류를 바쳐야 했다. 요나라 천조제는 사냥을 좋아했고, 매번 사냥을 떠날 때마다 매와 개를 데려갔다. 해동청은 사냥의 고수이므로, 그는 여진인들에게 해동청을 잡아서 바치도록 요구했다.
해동청은 "바다의 동쪽에서 날아온 파란 색의 매'라는 뜻이다. 당나라때 대시인인 이백은 "편편무광수(翩翩舞廣袖), 사조해동래(似鳥海東來)"라고 읊은 적이 있다. 여진족의 마음 속에, 해동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이 날고 가장 재빠른 매이다. '만응지신(萬鷹之神)"이다. 전설에 따르면 십만마리의 매중에 해동청 1마리가 나온다고 한다. 여진인의 후예인 만주족의 토템은 바로 해동청이다. 이것은 용감, 지혜, 견인, 정직, 강대, 개척, 진취, 향상, 견지의 민족정신을 대표한다.
요나라 천조제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여진인들은 모든 부족역량을 모으로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대량의 해동청을 붙잡아 진공한다. 그러나, 그래도 요나라 최고통치자의 후안무치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한내에 일정 수량의 해동청을 바치지 못하여 벌을 받았다. 여진인들은 백산흑수(장백산과 흑룡강)유역에서 살아간다. 이곳은 산은 높고 물도 많다. 온 산에 들짐승과 날짐승이 넘쳐나고 온 강에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할 수 있다. 해동청이 먹거리를 찾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많은 여진인들은 해동청을 붙잡아 훈련시켜서 생계를 유지하므로, 그들에게서 해동청을 빼앗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밥통'을 빼앗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진인들은 뼛속까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다. 원성이 온 거리에 가득해진다. 동시에 요나라의 일부 황실종친들은 자주 여진부락을 순시한다는 명목으로 마음껏 여진여인들을 유린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여자가 결혼을 했던 말건, 집안이 좋건 나쁘건 가리지 않고, 예쁜 여자만 만나면 반드시 데리고 잤다. 그리고 이를 장난스럽게, "천침(薦枕)"이라고 불렀다. 특히 한번은 '두어연(頭魚宴)'에서 천조제는 여진족부랑의 우두머리인 완안아구타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게 했다. 이는 그에게 엄청난 치욕을 안긴 것이다. 그리하여 어진족의 원한은 더욱 깊어지고, 북수의 씨가 뿌려졌다.
<금사.태조기>의 기록에 따르면, 1114년 9월(천조제 천경4년), 완안아구타는 이천오백명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래류수 남안(지금의 길림성 부여현 서가점향 석비위자)에서 항요서사대회를 거행한다. 이것이 바로 요금전쟁사상 저명한 "래류수서사(淶流水誓師)"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서사대회후, 완안아구타는 부대를 이끌고 요나라의 전진기지인 녕강주(지금의 길림성 부여현 여백도납고성)으로 진격한다. 녕강주의 여진인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완안아구타와 안팎에서 호응한다. 녕강주는 금방 점령된다. 곧이어 완안아구타는 다시 승기를 틈타 출격하여 출하점(지금의 흑룡강성 조원현)에서 십여배나 많은 요나라군대를 무찌른다. "가속, 금백, 우양, 기계를 모조리 여진인들이 얻었다" 요나라군대는 열중 일곱여덟이 사상당한다. 이것은 바로 역사책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긴 "출하점전투"이다. 이번 전투후 완안아구타는 바로 병사와 전마를 모아 군대를 확충한다. 곧이어 빈주(길림성 농안현 고산향 광원점고성), 상주(지금의 농안현 동북만금탑고성)을 점령한다.
"내류사서사"의 다음 해, 완안아구타는 황제를 칭한다. 그가 금태조이다. 국호는 대금이라 한다. 이 해에, 여진군대는 황룡부의 서북성진인 달로(達魯, 지금의 길림성 부여현 고성자)등지를 점령한 후, 혼동강(지금의 송화강)을 넘어, 마침내 9월에 요나라의 군사중진 황룡부를 점령한다. 패국을 되돌리기 위하여, 요나라 천조제는 친히 전투에 나선다. 그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70만대군을 모은다. 일거에 신생 금나라정권을 소멸시킬 기세였다. 당시 금나라군은 2만명에 불과했다. 양군의 비율은 1:35이다. 이것은 인류전쟁사상 불가사의한 대항전이다. 양군이 결전을 벌일 때, 요나라의 내부에 정변이 발생한다. 천조제를 끌어내리기 위하여 야율순이 새로 황제에 오른다. 요나라 천조제는 할 수 없이 금나라와의 전투를 포기하고, 병력을 돌려서 반란을 진압한다. 완안 아구타는 이런 호기를 놓칠 리가 없다. 맹렬히 추격하였다. 마침내 호보답강(지금의 흑룡강성 오상시 서쪽)에서 요나라군대를 따라잡는다. 요나라군대는 대패한다. 1118년, 요나라와 금나라는 화의를 시도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금태조는 병력을 이끌고 요나라의 수도 상경(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파림좌기 경내)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요나라 천조제는 서경(지금의 산서성 대동시)로 도망간다. 1125년, 천조제는 금나라장수 완안루실에게 생포된다. 이제 중국 북방에서 200여년간 웅거하던 대요제국은 멸망한 것이다.
여진족은 거란족에게 뼛속까지 원한을 품고 있었으므로,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여진인들은 거란족이 만든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한다. 지금 요나라의 황제른은 일찌감치 황량해졌다. 다른 유적지도 부서진 조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여진족과 거란족의 원한은 모조리 해동청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해동청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이기 때문이다. 요나라의 멸망은 거란통치자의 혼용과 탐욕이 부른 필연적 결과이다. 여진족이 야만적으로 요나라의 많은 문화유산을 파괴한 것은 후세인들에게 커다란 유감을 남긴다.
역사가 전진함에 따라, 여진인들이 만든 금나라도 징기스칸의 철기에 멸망한다. 그러나, 해동청은 금나라의 멸망으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진인의 후예인 만주족들은 해동청을 남달리 사랑했다. 기록에 따르면, 1682년, 강희제는 열병시 해동청을 어깨에 앉힌 어림군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해동청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 "우충삼백유육십(羽蟲三百有六十), 신준최수해동청(神俊最數海東靑), 성병금령함화덕(性秉金靈含火德), 이재상영요광간(異材上映瑤光墾)"
지금 동북지방의 여진족의 후예들은 여전히 매를 훈련시키는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관광의 볼거리가 되었다. 유일하게 전승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사회학자는 길림시의 '타어루'촌을 '관동대지상의 마지막 응둔(鷹屯)'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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