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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고대 검(劍)의 발전역사

by 중은우시 2012. 6. 11.

글: 계대(季黛)

 

검(劍)은 고대병기의 하나이고, 일찌기 "백병지군(百兵之君)"이라는 별칭이 있다.

상고시대의 도검(刀劍)은 대부분 청동기이다. 검의 역사는 도(刀) 보다 길다. 도의 출현은 검을 역사무대에서 퇴출시켰다. 검은 더 이상 군용무기가 아니고, 민간으로 흘러들어갔고, 소수인들이 수련하는 병기가 된다.

검은 상(商)나라때 출현한다. 당시의 검은 일반적으로 조금 짧았다. 약 20-40센티미터 가량이었다. 모습은 유엽형(柳葉形, 버드나무잎모양)이거나 예삼각형(銳三角形, 끝이 날카로운 삼각형)을 나타낸다. 검은 처음에 청동으로 만들었다. 서주(西周) 시대에 전쟁은 주로 거전(車戰)을 위주로 했다. 멀리 있으면 활고 화살로 쏘면 되고, 가까이 있으면 과(戈), 극(戟), 모(矛)등 장병기로 싸웠다. 오로지 육박전에서만 검으로 찌른다. 그래서 검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그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검은 보병전투의 주요병기가 되고, 계속하여 길이가 길어진다.

 

춘추시대에, 서로 원수가 된 오,월 두 나라는, 검을 잘 주조하는 것으로 당대에 유명했다. 그 기술이 정교하고 공법이 아름다운 것은 거세무쌍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검신(劍身)의 표면처리는 신비화려한 꽃무늬를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2500년후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고, 새것처럼 칼날이 날카롭다. 이런 처리기술은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춘추이후, 보병이 흥기하면서 검은 일종의 무기로서 중시된다. 길이는 28-40센티미터 사이이다. 특히 오, 월지역은 물길이 종횡으로 나 있어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다. 그래서 검을 쓰는 보병이 큰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검의 주조수준은 중원의 제국보다 훨신 뛰어났다. 당시의 유명한 주검대사(鑄劍大師)인 구야자(歐冶子)와 간장(干將), 막야(莫邪) 부부는 바로 오월지구에서 생활했다.

전국시대가 되어, 거전이 점차 줄어들면서, 검은 일종의 보병무기로 더욱 중시받는다. 전쟁의 필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검의 위력을 제고시킨다. 전국시대 말기, 검의 총 길이는 초기의 50센티미터에서 81-91.3센티미터로 늘어난다.

 

전국후기의 진나라는 이미 청동검, 철검을 병용한다. 동시에 검의 형태도 변화한다. 길이는 100센티미터가량으로 늘어난다. 검신은 좁고 길며, 표면은 자세히 연마하고 한층의 크롬산화합물을 덮어 검은 광택을 내면서 부식방지작용을 했다. 섬서 진나라묘에서 출토된 장검은 거의 새로운 모양이었다. 다른 병기들인 피(鈹), 모(矛), 수(殳), 촉(鏃)등도 이 방법을 응용했다.

이런 길이의 청동검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다. 청동기는 단단하고 잘 부서지는 성질로 지나치게 긴 검은 쉽게 부러진다. 그러므로 검의 길이는 계속 제한을 받았던 것이다. 진나라때의 장검은 단단하게 처리한 중탄강(中炭鋼)과 같았다. 이런 길이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출토후에 사람들이 믿기 어렵게 하였다.

학자들의 연구를 거쳐, 검신이 규칙적으로 여러 단계로 늘어나면서, 검신의 너비는 계속 좁아지고, 두깨는 비율적으로 커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렇게 하여 물리적인 성능이 아주 완벽한 지경에 이른다. 병마용이 출토될 때, 대량의 조각편이 청동장검을 누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각들을 제거하고 나니, 장검은 즉시 원상을 회복했다 이를 보면 이런 청동검의 인성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가 청동병기의 제2차, 그리고 최후의 전성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