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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소흥사야(紹興師爺)"에 관하여

by 중은우시 2012. 4. 2.

글: 담여위(譚汝爲)

 

"사야(師爺)"는 하나의 직업군이고, 오랜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명,청이전에는 사람들이 "막료(幕僚)"라고 불렀다. 문학작품 <삼국연의>에 나오는 조조의 막료 장간(蔣干), <수호전>에서 산에 오르기 전의 압사(押司) 송강(宋江), <홍루몽>에 나오는 가정(賈政)의 청객(淸客) 첨광(詹光), 단빙인(單聘仁)등이 모두 이 직업이다. 당나라말기 시단의 거두인 이상은(李商隱)은 성장급간부의 수하로 반평생 비서역을 하며, 여러해동안 막료생활을 지낸다.

 

"사야" 직업이 진정으로 발생한 것은 명나라 중후반기이고 청나라때 성행하고 청말민초에 몰락,쇠망한다. 중국고대사회에서 약 3백년간 활약했다. 명청시기, 특히 청나라때, 절강소흥 출신의 사야들이 전국각지의 대소아문에 퍼져 있었다. 청나라때 비교적 중요한 삼부의 막학(비서학 및 공문작성) 전문서적인 <좌치약언> <설홍헌척독> <추수훈척독>의 작자인 왕룡장, 공악, 허사미는 모두 소흥사람이다. 공악의 <헐홍헌척독>에는 "나의 고향에서 이 업종에 종사하는 자가 만명에 이른다" 즉 소흥출신으로 사야로 있는 사람이 만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들 사야는 전국각지의 대소아문에 널리 분포해 있고, 방대한 지역적 "사야방(師爺幇)"을 형성한다. 이들은 서로 성원하고 서로 지원하며 다른 지방출신의 사야들을 배척한다.

 

사야는 왜 소흥관적이 가장 많았을 까? 그 원인을 따져보면, 개략 아래의 4가지이다:

 

첫째, 자고이래로 소흥은 문풍(文風)이 흥성했다. 소흥은 청나라때 소흥부로 불리웠다. 산음, 회계, 소산, 제기, 여요, 상우, 승현, 신창의 팔개현을 포함한다. 항주만 남안에 위치한 회계산을 중심으로, 포양강과 조아강을 두 날개로 하여, 산수가 수려하다. 동진때로부터, 소흥은 전국의 저명한 문화중심중 하나가 된다. 이곳의 독서인은 아주 많고, 문인이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현지 과거는 경쟁률이 치열했다. 소흥의 속담에 "일백명이 수재가 되었다고 기뻐하지 말라. 7명이 공생이 되고 3명만 거인이 된다; 45명은 평범하게 살고, 45명은 가난하게 산다" 소흥에는 글을 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이 곳에서 과거로 남들보다 뛰어나기는 확실히 어려웠다. 이런 배경하에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육체노동은 할 수 없고, 집안에 농지도 없으면 어떡할 것인가? 그런 사람들은 그저 '사야'라는 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둘째, 소흥에서 사야를 배출한 것은 현지가 '어미지향이지만 사람은 많고 땅은 적다'는 경제상황때문이다. 소흥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기풍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도 큰 관계가 있다. 명나라이래로, 인구가 증가하여, 소흥은 땅은 좁으나 인구는 조밀한 지방이 된다. 그리하여 많은 소흥인들은 부득이 외지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았다. 그중 문화소양이 있는 문인은 각급 아문의 사야가 되어 사방에 퍼진다. 그외에 소흥의 사람들은 이주하고 유랑하며 모험성, 개척성이 넘쳤다. 고향에 눌러앉아야 한다는 관념이 비교적 약했다. 이들 요소는 사야가 각지를 떠다니는 직업이라는 특징과 맞아떨어졌다.

 

셋째, 소흥에서 사야을 많이 배출한 것은 소흥사람들이 세심하고 꼼꼼했으며, 어떤 일을 꾸미고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특징과 관련있다. 이것은 사야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직업소양이었다. 예를 들어, 형명사야는 복잡한 법령, 판례와 복잡한 사건내용을 반드시 세심하고 꼼꼼하게 판단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기록에 착오가 생기고 심각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청나라때 한 죽지사에 이런 말이 있다. 부판반분미입류(部辦班分未入流), 소흥선위일신모(紹興善爲一身謀). 그 뜻은 중앙의 육부의 서리(書辦)들이 모두 소흥사람이라는 것이다. 비록 관료사회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일을 꾸미고 세심하게 처리하는데 뛰어났다는 것이다.

 

넷째, 봉건사회의 막료학을 배우는 것은 지금처럼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직업훈련같은 것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공무원시험같은 것도 없다. 일반적으로 친척친구들 중에서 도제식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친구친척은 대부분 현지인이다. 소흥인들은 사야로 있는 사람이 원래 많았다. 한 소흥출신의 사야는 고향의 여러 제자들을 가르친다. 그러다보니 소흥출신 사야들이 갈수록 몇 배씩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야들이 대부분 소흥출신인 중요한 원인이다.

 

마지막으로 "소흥사야"의 최후를 얘기해보자.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관제개혁과 신학교설립으로 각성, 각부, 각현에서 소송을 담당하다가 전문적인 법원의 법조인이 담당했다. 동시에 귀국유학생과 각지 법정학당의 졸업생들이 아문을 채운다. 그리하여 새로운 법률수단이 소흥사야의 전통적인 심판방식을 대체했다. 새로운 사법인재가 형명사야를 대체한다. 이리하여 근본적으로 소흥사야들이 사법심판을 독점하던 기반이 무너진다. 소흥사야가 형명과 전곡의 두 가지 우세를 지녔던 것은 점차 약화된다. 그리하여 그 집단이 와해되고 몰락한다. 그리하여 삼백년간 흥성하던 "소흥사야"는 결국 봉건왕조와 함께 목숨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