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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휘상(徽商)의 400년 부침

by 중은우시 2012. 3. 19.

글: 담홍안(譚洪安)

 

1961년, 휘주(徽州) 휴녕(休寧)의 현성에서 호홍춘(胡洪椿)이라는 68세된 노인이 50년의 상인생애를 마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호홍춘은 근 200년역사를 지니고, 한때 중국 먹(墨)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던 호개문(胡開文) 묵호(墨號)의 "제6대전인(第六代傳人)"이다. 그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던 때는 그가 묵호를 승계한지 5년후인 1915년, 그가 장인의 정신을 살려서 만든 "지구묵(地球墨)"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거행된 파나마-태평양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이다.

 

그가 서거하기 4년전인 1957년, 그가 힘들게 지탱해왔던 '호개문' 휴성의 본점은 이미 문을 닫았다. 옛 휘상의 마지막 여맥이 이로써 중단된 것이다.

 

시간을 거꾸로 400년 거슬러 올라가면, 1559년(명나라 가정 38년), 휴녕의 동북쪽 수백리 지점에 있는 항주성에 휘주출신의 '외구' 두령인 왕직(王直 혹은 汪直)이 2년간 연금되었다가 결국 관청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은 사건이다.

 

휘상의 흥망성쇠는 사백여년을 이어왔고, 그동안 적지 않은 풍운이 있었고, 적지 않은 풍류인물들이 있었다. 왕직과 호홍춘은 그중 두 개의 물보라에 불과하다.

 

소위 "휘상"은 신안강유력을 중심으로 한 휘주부(徽州府)의 일부육현(一府六縣, 흡현, 이현, 휴녕, 적계, 기문, 무원)의 상인들을 말한다.

 

휘상의 기원은 언제부터인가? 일찌기 1940년대에 휘상연구의 제일인인 부의릉(傅衣凌)은 "최초에는 송나라때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며, 송나라때 차상(茶商)은 중국최대의 상업자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휘주는 마침 저명한 차의 산지이다. 송나라황실이 남으로 이전한 후, 경제중심도 남으로 이전한다. 안휘, 절강의 두 곳은 경제관계가 원래 밀접했다. 그리하여 수공업 및 무역활동이 촉진된다. 부의릉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휘상은 중국상업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개략 명나라중엽을 전후해서이다."

 

최근에 출판된 <휘주문화전서>의 <휘상>을 보면, 안휘사범대학의 학자인 왕정원(王廷元)이 여러 방면의 고증을 거친 후,휘상이 널리 영향력을 지닌 대규모 상방이 된 것은 명나라 성화(1465-1487),홍치(1488-1505)연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명태조 주원장이 건국한지 이미 100년이 지났고, 사회는 대체로 안정되었으며, 농업생산력이 제고되었고, 상품경제가 송원시대를 거쳐 충분히 자라날 수 있는 토ㅑㅇ을 갖추었다. 휘상은 이 좋은 기회를 붙잡은 것이다.

 

이 때부터 명나라 만력(1573-1620) 중엽까지의 100여년간은 휘상이 대거 발전한 시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해상상인(海上商人)과 왜구의 신분을 모두 가진 왕직이 처형받은 날로부터 휘주상방은 첫번째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왕직이 죽은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명가정40년(1561년), 휘상은 최초의 상호부조조직인 "흡현회관"을 북경에 창설한다. 왕직의 고향이 바로 흡현이다.

 

일반적으로, 소금, 전당포, 차, 목재가 휘상이 경영하는 주요 업종이라고 본다. 양식, 면포, 비단, 자기, 종이, 먹, 각서, 식당업이 그 뒤를 잇는다.

 

최초로 신안상인(즉, 휘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일본학자 등정굉(藤井宏)은 휘상자본의 7가지 원천을 정리했다. 즉, 동업경영의 공동자본, 전수자금의 위탁자본, 처가제공 혹은 혼인예물이 전환된 혼인자본,친구동족이 지지한 원조자본, 상속으로 인한 유산자본, 관리가 출자한 관료자본, 그리고 맨손으로 일어선 노동자본 등등이다.

 

예를 들어, 청나라 건륭연간에 만든 "호개묵" 묵호의 호천주(胡天注)는 바로 십여세때 적계 고향을 떠나 묵점(墨店)에 점원으로 들어간다. 휴녕의 먹제조명가 왕시(汪氏)의 인정을 받아 사위가 된다. 나중에는 모든 사업을 물려받는다. 그리하여 200년간 휘황하게 되는 가업을 개창한다.

 

부의릉은 휘상이 명나라상계를 웅비하게 된 이유는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그들이 금융업무를 겸업했다는 것이다. 외부의 예금을 받고, 이를 통하여 송금환전업무 즉 회표제도(匯票制度)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휘상은 사업에 필요한 대량의 운전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휘주인의 상업도덕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이다. 재물에 현혹되지 않고, 주운 돈은 돌려준다는 이야기 그리고 차입의 신용은 휘주 각 지방지등 사서에 많이 기록되어있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중엽, 휘주상방에는 이미 거액을 지닌 부호등이 나타난다. 그중에는 은정을 백만이나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최고의 전성기인 청나라 건륭연간에 이르러서는 천만을 가진 대상인도 나타난다.

 

휘주는 장강 중라휴와 운하수로의 교통선을 따라 상업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남경, 무호, 안경, 무한, 양주, 소주, 항주, 임청등이 도시에 상업식민지를 건걸한다. 이들 지역까지 합쳐서 "대휘주(大徽州)"로 통친된다.

 

휘상의 족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국각지에 미친다. 명청기간이 민간에 이런 속담이 있다: 찬천동정편지휘(鑽天洞庭遍地徽, 동정상인 즉 소주상인은 하늘을 뚫고, 휘주상인은 온 세상에 퍼져있다), 무휘불성진(無徽不成鎭, 휘상이 없으면 도시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를 보면 그들의 상업활동범위가 아주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왕직이 동해에서 왕을 칭할 때는 명나라의 '왜환'이 갈수록 심해질 때이다.

 

"왜구"는 원래 명나라때 중국연해를 약탈하는 일본해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정연간의 45년간(1522-1566), "왜환"은 628회에 이른다. 기록된 총수의 80%에 해당한다. 가정후기 즉 1552-1566년의 15년간 "왜환"의 수는 609회이다. 가정연간 전체의 97%에 해당한다. 역사상 "가정왜환(嘉靖倭患)"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러나, <명사>를 보면, "대체로 진짜왜구는 열에 셋이고, 따르는 자들이 열에 일곱이다." '진짜왜구'는 일본사람을 말한다. '따르는 자'라 함은 연해지구의 삼교구류의 중국인이다. 사실상,'왜구'의 수령은 모조리 밀수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의 해상모험가들이다.

 

가정19년(1540년) 혈기방장한 왕직은 동료들과 함게 광동으로가서 큰 배를 만든다. 그리고 명나라정부가 금지하는 유황, 비단등의 물건을 싣고 일본, 섬라(태국)등 여러나라에 판매한다. 5,6년동안 거액의 자본을 모아서, 각국상인들 사이에 이름이 높아진다. "오봉선주(五峰船主)"로 불린다.

 

1544년, 그는 흡현의 고향사람인 허동(許棟)의 해상딥단에 가입하여 요직을 맡는다. 나중에 허동이 관군의 토벌로 사망하자, 왕직은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정해왕(靖海王)'이 된다. 절강의 주산에서 대외무역을 시작한다. 그리고 조정에는 해금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한다. 기록에 따르면, 왕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국에는 비단이 모자라니 시장을 열어주면 왜환이 해결될 것입니다." 이를 보면 그는 해상상인의 본색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 유대유(兪大猶)에게 병력을 이끌고 가서 포위공격하게 한다. 왕직은 할수 없이 활동기지를 일본의 평호(平戶, 일본 나카사키현)로 옮긴다. 그리고 "휘왕(徽王)"이라는 깃발을 내건다. 중국인 부하는 최소 3천명이고, 공개적으로 명왕조와 대항했다.

 

부의릉, 등정굉을 이어 휘상연구를 개척한 공로가 있는 광동학자 섭현은(葉顯恩)은 왕직을 휘주무장해상집단의 대표로 본다. 당시 남겨진 많은 사료를 보면 글을 쓴 사람의 대부분은 정통의 '방왜금해(防倭禁海)"의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해상상인의 파괴적인 일면만을 강조하여 묘사했고, 관청이 토벌, 회유한 과정을 주로 적었다.

 

그는 지적한다. 남겨진 문헌기록에서 이미 알 수 있다. 16세기중엽이후, 동아시아해상무역국면이 이미 변화한다. 해상밀수활동은 항주만바깥의 주산열도로 옮겨가고, 쌍서항, 열항등이 중심이 된다. 휘주는 안휘의 남쪽에 있어 절강, 강서의 양성과 이웃하고 있다. 신안강은 항주만으로 통하므로, 해양과 연락이 가능하다. 때마침 굴기한 휘상은 민감한 상인의 후각으로 외부세계에서 일고 있는 해양붐, 향료붐, 황금붐을 맞이한다. 그러다보니 거기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는 또한 상해사범대학 학자인 당력행(唐力行)의 관점을 소개한다. 휘주해상은 해적식의 밀수무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3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해상을 운송하는 사람을 핵심으로 하고, 육상의 행상을 중개로 하며, 강남의 도시에있는 휘주상인의 점포나 수공업공장을 외곽으로 한다.

 

한쪽 끝은 휘상이 중국내지에 건립한 혈연과 지연을 결합시킨 방대한 상업네트워크이고, 다른 한쪽 끝은해외 각지(동남아 위주)에 거주하는 화인(華人)이다. 휘주해상은 이 네트워크를 통하여, 거대한 증식자본을 만들고, 명나라 가정후기에 중국해양무역의 첫번째 바람을 불러온다.

 

그러나, 휘주해상은"상인이며 해적"이다. 이들은 치열한 업무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연해지구의 경제사회에 거대한 충격과 파괴를 불러왔다. 이에 대하여 섭현은은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적 범위로 보면, 고대에 해상무역은 해적, 밀수, 약탈 및 노예매매와 연결되어 있다. 16세기 유럽인들은 해적과 합법적인 무역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러 유럽이론계에서 국제법상의 해적과 합법무역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섭현은은 감탄한다. 왕직을 대표로 하는 휘주해상은 막 일어난 세계적인 해양도전의 행렬에 가담했을 뿐아니라, 의식이 시대를 앞서갔다. 그러나,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특히 당시의 집권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다.

 

섭현은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왕직과 호종헌(胡宗憲, 당시 병부시랑 겸 직절총독을 지내며 왜구를 평정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같은 고향사람이라는 것을 들어 왕직을 유인하여 체포한다)에 관한 문헌기록을 보면, 국가의 발언권을 나타낸 것이 있을 뿐이다. 즉 권력지배자의 역사이다. 일개평민 왕직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국가권력의 엘리트와 어용지식 엘리트들에 의하여 정치범으로 취급되어 판결받았다.

 

왕직이 죽은 후, 호종헌 및 그가 발탁한 명장 척계광, 유대유는 계속하여 토벌을 강화한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절강연해의 "왜환"은 점차 평정된다.

 

비록 나중의 융경연간(1567-1572) 조정은 "개해(開海)"를 결정하여, 해상무역을 일정정도 회복시키지만, 휘주해상은 이미 원기를 크게 상하여, 민상(閩商, 복건상인)이 휘상을 대체하여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그들이 바로 명나라말기의 정지룡, 정성공 부자휘하의 복건해상집단이다. 이들은 동남지역에 할거하며 대만을 수복하고, 청나라조정에 항거한다.

 

명말청초에 전란이 빈번하고, 휘상은 크게 타격을 입는다. 사업도 한때 바닥을 긴다. 강건성세(1681-1796)동안,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며, 인구가 증가한다. 청나라조정은 염상의 세습과 독점경영을 보호하는 '강염법"을 실시한다. 일찌기 명나라 가정, 만력년간에 염업에 진출한 휘주의 부상들은 속속 권토중래하여 양주로 들어간다. 다시 한번 염업을 장악한다. 당시 양회영업의 8명의 총상(영업공회의 우두머리)가운데 휘주 흡현에서 온 사람이 항상 4명을 차지했다. 이들 대염상의 부유함에 대하여는 양주를 남순하던 건륭황제조차도 "이들 상인이 부유함은 짐조차도 따를 수가 없겠다"라고 놀랄 정도였다.

 

이들 휘주염상중에서 건륭연간에 총상을 40년간 담임하고, 포의(布衣)로 천자와 교류한 강춘(江春)이 가장 유명하다.

 

조적이 휘주 흡현인 강춘은 영업세가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총상을 여러해동안 역임했다. 그는 염정관리들과 잘 사귀었고,청나라조정에 잘보이기 위하여, 각종명의로 기부한 금액만 1120만냥에 이를 정도이다. 건륭제가 6번이나 강남을 순시했을 때,양주는 반드시 거친 곳이다. 강춘은 매번 만금을 아끼지않고 건륭제를 맞이하여, 황제의 환심을 산다. 건륭50년(1785년) 북경에서 천수대연이 개최될 때 강춘은 연회에 참석하여 사장(賜杖, 지팡이를 하사받다)의 영광을 누린다.

 

휘주염상은 청나라조정의 보호하에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다보니 정부의 착취에 집안이 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해동안 정부에 돈을 바치면서,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게다가 청나라중엽이후 염상이 전체적으로 몰락하게 되자, 강춘은 만년에 "가난하여 집안에 저축한 것이 없고, 가산이 없어지는' 곤경에 처한다. 나중에는 오히려 건륭제가 은혜를 베풀어 국고에서 돈을 빌려주어 생활하게된다. 건륭54년(1789년)에 이르러, 병사할 때, 한대 국가에 대적할 부자였던 대염상은 거의 재산을 남기지 못한다. 그 후인들은 기본생활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강춘이 사망한 후 100년만에 또 다시 유명한 휘상이 나타난다. 그는 바로 호설암이다.

 

이 홍정상인의 흥망성쇠에 대하여는 최근 들어 상계인사들이 많이 언급하고있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특히 광서8,9년(1882-1883) 서양상인과 벌인 생사(生絲) 대전에서 일패도지한 것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탄식을 불러왔다.

 

사실, 호설암의 인생의 전성기는 기꺼해야 쇠락의 길을 걷던 휘상의 마지막 사양(斜陽)이었다. 일찌기 왕직은 해금을 돌파하고, 체제에 도전하다가 비명횡사하고 오명을 뒤집어 썼다. 그러나 여전히 상승기에 있던휘상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할 능력이 있었다. 강춘이든 호설암이든 관상일체를 추구하고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 이익을 얻는다는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중국전통상인의 독립인격이 결핍된 비극적인 색채를 잘 보여준다.

 

안휘사범대학의 왕세화(王世華)는 <휘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휘상의 몰락과정은 대체로 도광30년(1850)을 경계로 하여, 전후 두 단계로 ㄴ나뉜다. 가경(1796-1820), 도광(1821-1850)시기에 휘상의 중견인 염상이 '강염법'이 무너지면서 사염이 성행하고 소금가격이 폭락하여, 세력이 점차 약화된다. 도광30년, 회남염업이 '개강위표(改綱爲票)'되면서 독점적인 보호를 상실한다. 휘주염상은 이로써 신속히 쇠망한다.

 

곧이어 함풍, 동치연간(1851-1874)에 태평천국과 태평군이 청나라조정과 오랜 시간동안 밀고당기는 전투를 벌인다. 각지의 휘상들은 손실이 심각했다. 휘상의 본거지인 휘주도 전쟁의 피해를 입는다. 비록 휘주차상이 한때 중흥하기는 했지만, 광서중엽대,차엽판매시장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최후의 버팀목까지 잃은 휘주상방은 마침내 역사무대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호홍춘의 아들 호옥린(胡玉麟)의 회고에 따르면, 1956년, 사회주의개조운동이 고조될 때, 그의 부친은 휴녕현정부에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호개문' 묵호의 휴성노점포를 몇 개의 분점과 합병하여 "공사합영둔계호개문묵창'을 만들자고. 그러나 허락받지 못한다. 주요이유는 현에서는 이 점포가 유규한 역사를 지닌 유명점포이기 때문에 보류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1957년, 이 백년점포는 영업을 중단한다.

 

1966년 9월, 영업중단된지 10년도니 휴성의 노점포는 "파사구(破四舊)"의 첫번째 대상이 된다. 호씨 후인의 일가는 쫓겨난다. 문혁이 끝난 후, 호옥린은 겨우 파괴되어 형편없는 일부의 부동산만을 돌려받았다. 그 안에 있던 대량의 묵모(墨模, 먹을 만드는 형틀), 완성품 및 증국번이 써준 간판은 일찌감치 찾을 수가 없었다. 1995년, 이 오래된 건물은 주인이 바뀌어 두부공장으로 된다. 2005년에 매체에서 보도된 후, 현지정부가 회수하여 보호하겠다고 밝히게 된다.

 

마찬가지로 2005년초, 남경과 절강 여수의  두 대학교수가 밤에 흡현으로 쳐들어와서 왕직의 묘비를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의 이유는 이 묘는 일본인들이 만든 것이고, 왕직은 "왜구", "한간(漢奸)"이라는 것이다. 이를 참으면 더 참을게 뭐있느냐는 것이다. 사건이 발발한 후, 다시 왕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논쟁이 벌어진다. 그는 휘주해상의 선열인가? 아니면 늑대를 집안으로 끌어들인(引狼入室) 패류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이미 75세가 되고, 반생의 정력을 휘상연구에 바친 섭현은이 하는 말처럼, 400년전의 논란이 꺼지지 않는 "가정왜난"의 역사 및 왕직등 휘주해상(해적)의 정사난변(正邪難辨)의 지난 일들은 오늘날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영원히 계속될 이슈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역사를 당시의 배경하에서 이해하고, 현대의 안목으로 살펴서 진실에 가까운 분석을 하는 것이다.

 

400년 휘상의 역사는 그렇게 하면 보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