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중국에서 해적은 대부분 연해지구의 주민이다. 그들은 해양을 의지하여 살아가조자 하면서 약탈행동을 한다. 관청과 토호에 반항하기도 하며, 해적(海賊), 해구(海寇), 양비(洋匪), 도구(島寇), 녹객(綠客)등으로 불린다. 중국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4명의 해적을 얘기하자면 아래와 같다.
1. 방국진(方國珍): 관청의 양곡을 약탈하고 명나라에 귀순한 영웅
연대: 원나라 말기
별명: 해정(海精)
세력범위: 절강과 강소
경영수단: 관청양곡을 약탈
방국진은 절강동부 태주 사람이다. 사서에 따르면 그는 "키가 칠척이며, 덩치가 컸으며, 튼튼하고 용감했으며, 달리는 말과 다툴 정도로 힘이 강했다. 속요에는 "양서청(洋嶼靑). 출해정(出海精)"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방국진의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여론준비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해정"이라는 별호를 얻는다.
1348년, 방국진은 해상에서 거병하여 강소, 절강일대를 전전한다. 20년간 절강동부의 3개군을 점령한다. 세력은 해상을 횡행하여 양곡운송선을 약탈했고, 원나라정권을 무너뜨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방국진은 나중에 주원장에 귀순하였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반항하다가 다시 귀순한다. 그가 죽은 후 주원장이 친히 제사를 지낸다.
2. 왕직(王直): 왕직은 공로가 있음에도 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피살당한다.
연대: 명나라
별호: "정해왕(淨海王), "휘왕(徽王)"
세력범위: 주산군도, 일본해역
경영수단: 밀수, '해적을 치는 해적'으로 유명
<케러비안해적1>에서 <케러비안해적3>까지 해적붐은 영화업계에서 크게 일었다. 그리고 현실생활에서도 가끔 한두건의 해적사건이 나타나서 매체의 뉴스에 등장한다. 해적은 우리들에게서 먼 것같으면서도 가깝다.
왕직은 휘주 흡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협의정신과 지모가 있었다.
왕직은 오랫동안 해외밀수무역에 종사한다. 그는 해상집단의 우두머리이면서, 해적의 두목이기도 하다. 그때 강소, 절가으이 해상해적은 무리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왕직의 세력이 가장 컸고, 여러 해적을 없앴다. 그래서 천리해역이 왕직의 지배하에 놓인다.
왕직은 해적소탕에 공로가 있으며, 여러번 상소를 올려 해상무역을 개방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오리혀 관군수군의 공격을 당하게 된다. 왕직은 포위망을 뚫고 일본으로 가서 세력을 재정비한다. 얼마후 왕직은 대무장선단을 이끌고 동남연해를 침범하여 약탈한다. 강소, 절강일대가 이로 인하여 동요하고, 관군은 그저 당하고만 있었다.
명나라조정은 무력으로 소탕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수법을 바꾸어 왕직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왕직을 유인하여 체포한다. 왕직은 나중에 조정에 의하여 참살당한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왕직은 해상이 위신을 크게 세웠고, 죄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3. 정지룡(鄭芝龍): 상(商), 도(盜), 관(官)을 겸하고 10만부하를 호령하다.
연대: 명나라말기
별명: "해상대왕(海上大王)"
세력범위: 복건연해, 대만, 일본해역
경영수단: 주업은 해적, '해적을 치는 해적'으로 유명, 해외무역을 경영함. 상인이며 해적임.
정지룡은 민족영웅 정성공의 부친이다. 그는 해상에서 수십년간 활약했고, 자칭 '해상대왕'이라 한다. 일찌기 고향을 떠나 세상을 누빈다. 이어서 해적이 되고 해상이 된다. 상인이며 도적이었다. 나중에는 도적에서 벗어나 관직을 얻는다. 그리하여 상인이며 관료가 된다. 그처럼 상인, 해적, 관료의 신분을 모두 가진 사람은 중국역사상 보기 드물다.
정지룡은 해상활동에 종사하는 범위가 넓었다. 해상에서 육지까지, 국내에서 국외까지, 일본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네덜란드인과 접촉을 가졌다. 해적으로 있을 때, 천척의 배와 십만의 부하를 보유했다. 명왕조에 관직을 받은 후, 각종해선 만척을 통제한다. 대해선 삼천척을 모을 수 있었다. 세계사상 첫번째 선왕(船王)이라 부를 만하다.
해외상업경쟁에서 그는 장사에 능해서 큰 이익을 보았다. 그는 재물이 나라와 맞먹는 대부호가 된다. 명나라말기, 정지룡은 무장선단을 이끌고 해상을 종횡했고, 쇄국정책을 쓰던 명나라에 타격을 가한다. 여러번 관병을 무찔렀고, 네덜란드식민자도 이기고, 다른 해적세력도 소탕한다. 그리하여 해양을 통일하고, 동남해상에 명성을 떨친다. 나중에 해강장관의 관직을 받아 해외무역을 독점한다.
4. 장보자(張保仔): 홍콩을 개척하였으며 고향사람들 것은 빼앗지 않고 양인들의 배를 약탈하였음.
연대: 청나라
별명: "제2의 정성공"
세력범위: 홍콩, 주강삼각주, 남해해역, 동남아, 싱가포르
경영수단: 관선, 양곡운반선, 서양선박 약탈, 동인도회사 및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등 선박의 약탈
장보자는 중국판 해적왕이라 할 만하다. 새로 상영된 영화 <케러비안해적 3- 세계의 끝>에 나오는 주윤발이 분장한 중국계해적인 소풍의 원형의 바로 그이다.
장보자의 원명은 장보(張保)이고, 광동 강문 사람이다.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영위했다. 청나라수군의 착취에 항거하다가 배가 파괴되고 온가족이 흩어진다. 장보자는 어민에 의해 길러지며, 어려서 무예를 익힌다. 그가 15살때, 사람들을 따라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 그러다가 해적에 붙잡혀 간다. 해적의 두목은 장보자가 총명하고 기민한 것을 보고, 그를 자신의 곁에 남긴다. 장보자는 이렇게 하여 해적이 된다.
해적두목이 죽은 후, 대권은 장보자에게 넘어온다. 그는 홍콩을 근거지로 하여, 자신을 '제2의 정성공'이라 칭한다. 그리고 자주 해외화교와 왕래하며, 당시 황량했던 홍콩섬을 흥성시켜 주민이 20만명에 달하게 만든다.
청나라 가경 중엽, 장보자는 큰 선박 800척, 작은 선박 천여척, 무리가 수만에 이른다. 주강삼각주에서 홍콩 대서산 일대에서 활약한다 나중에 무리가 가장 많았을 때는 10만에 이른다.
장보자는 고향사람들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그의 선단은 홍콩, 마카오 각처를 돌아다니며, 유럽인의 상선을 약탈하고, 무기등을 빼앗는다. 한번은 남해에서 포르투갈 선박과 충돌이 발생하고, 포르투갈인들을 모조리 죽인다. 그리고 포르투갈인 배의 재물은 모조리 중국의 배를 약탈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장보자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는 자주 선단을 이끌고 해상을 종횡하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승의 상선을 습격한다. 그들은 장보자의 이름을 들으면 깜짝깜짝 놀라는 지경이 된다.
청나라 가경 14년(1809년) 구월 십칠일, 장보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선박을 포획한다. 선주를 가두고 재물을 뜯어낸다. 돈 만원과 아편 두 상자, 화약 두상자등을 획득한다. 나중에 청나라정부가 영국, 포르투갈의 선박과 합세하여 그를 공격한다.
나중에 장보자는 청나라조정에 투항하고 관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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