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세기
상장한지 단 3일만에, 산동성 즈보(淄博) 만창과기(萬昌科技)의 동사장 가오칭창이 산동 즈보에서 투신했다.
사건은 5월 23일 새벽에 발생했다. 전날, 산동 즈보시정부는 막 만창과기의 상장성공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었다. 가오칭창은 회의상에서 흥분한 상태였고, 만창과기근 그가 세번째로 만들어 상장시킨 기업이었다. 앞의 2 기업은 모두 요절했다.
5월 26일, 만창과기의 상장 5일째 주가는 23.54위안에서 19.08위안으로 하락했다.
5월 25일, 오전 10시, 즈보장례식장에서 가오칭창의 추도회는 오전10시에 시작하여 12시경에 끝난다. 좁은 추도식장과 바깥의 절반의 정원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가오칭창의 유골은 장덴(張店)시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옥황릉공묘로 보내어졌다. 언덕위에,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검은 묘비가 있고, 10여센티미터의 자그마한 영패가 묘비 앞에 놓여 있다. 새로 가져다 놓은 화환도 있다. 주위는 고요했고, 벌이 날아다니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릴 정도였다.
만창과기의 공장은 즈보 남구의 한 작은 골목안에 있다. 주위의 많은 화학공장과 비교하자면, 만창과기의 규모는 약간 큰 편이다. 그러나 절대로 대단히 큰 수준은 아니다. 공장은 깨끗한데 특히 주위의 공장환경과 비교하자면 그렇다. 만창과기의 보안은 예의있고 숙련되게 취재요구를 거절한다.
즈보 당지의 여러 상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가오칭창이 상장성공하자마자 투신자살하지 않았다면, 가오칭창과 만창과기라는 회사가 즈보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즈보에는 화학공업에 종사하는 기업이 너무 많다.
1943년에 출생한 가오칭창은 중국공산당원이며 전문대학졸업학력을 지니고, 고급경제사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생전에 만창과기의 동사장, 만창집단의 집행동사, 산동만창주식의 동사장, 부우치업의 집행동사, 만창화공의 설비동사를 맡았고, 즈보시 13기 인민대표대회의 대표이기도 하다.
5월 23일 새벽, 가오칭창은 즈보의 루신(魯信)화원 1호루 23층에서 투신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의심을 품고 있다. 누군가 밀었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가오칭창과 함께 떨어진 것에는 앉은뱅이의자가 있고, 다리가 앉은뱅이의자에 걸려서 함게 23층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충격이 너무 컸으므로, 사후에 손발이 끊어진 것도 정상이다.
만창과기는 이미 가오칭창이 세번째로 상장시킨 기업이다. 이전의 두번은 그가 만창주식의 동사장, 총경리를 맡고 있는 기간동안에, 만창주식이 산동화관(山東花冠)과 묶어서 하나로 상장된 바 있다. 그러나 재무에서 허위사실이 드러나서, 상장에 성공하지 못하고, 산동화관은 중국주식시장에서 유사이래 유일하게 두번이나 심사에 통과하고도 상장에 성공하지 못한 기업으로 남는다.
가오칭창의 생전에 가오칭창이 만창주식의 자산을 빼돌려서 만창과기를 새로 만들어 상장하려 한다는 고발이 많이 들어왔다.
만창주식의 전신은 즈보임치석화기계공장이다. 원래는 촌정부에서 설립한 기업이다. 1992년 즈보석유화학기계사업주식회사로 구조조정된 후, 황성진정부가 52.55%를 보유하고, 개인이 47.45%를 보유했다. 나중에 주식발행등으로 정부지분비율은 감소한다.
1996년, 회사는 만창주식으로 개명한다. 1997년 5월, 만창주식의 직원주는즈보증권거래소의 장외거래시스템에 등록되어 거래된다. 당시에는 50여개의 기업이 이곳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이런 지방거래센터의 주식거래는 당시에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즈보 당지의 만창주식의 주주가 하는 말이다. 1998년 6월, 국무원은 지방거래센터를 정리하고, 즈보증권거래소 장외거래시스템도 거래가 중단된다. 만창주식은 산동산권등기유한책임공사에서 위탁관리받는다.
1999년, 가오칭창이 지배하는 만창실업 즉 나중의 만창집단은 진정부가 보유한 지분을 인수하여, 만창주식을 지배하게 된다. 같은 해, 산동성 체제개혁위원회는 화관주식과 만창주식의 흡수합병후 상장방안에 동의한다. 화관측에서는 왕스판(王士范)이 동사장, 가오칭창이 부동사장을 맡고, 만창주식은 총주식의 30%를 보유한다.
그러나, 왕스판과 가오칭창의 협력은 순조롭지 못했다. 왕스판은 가오칭창이 만창주식에서 자산을 빼내어 단독으로 만창과기를 설립하는 것을 묵인한다.
1999년과 2002년, 화관주식은 관리감독부서에 상장신청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제1차상장은 화관내부인원이 재무문제를 고발하여 성공하지 못한다. 두번째는 가오칭창이 만창주식의 단독상장을 원하여 고발하고, 화관주식의 상장은 두번째에도 실패한다.
2000년 1월, 만창과기발전유한공사를 설립하고, 가오칭창은 3200여만주를 보유한다. 그의 아들 가오바오린(高寶林)이 893만주를 보유하고 36.4%의 지분을 갖는다.
만창과기가 기세등등하게 상장할 때, 전 만창주식의 주주들은 만찬과기의 자산출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만창주식의 주주인 아이췬처(艾群策)는 만찬과기가 증감회의 발행심사위원회를 통과하자마자 실명으로 고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가오칭창은 주주들에게 회사경영상황을 공개하기 거부했다. 회사도 증발했다. 가오칭창이 원래 만창주식에 속한 자산을 2000년에 설립된 만창과기로 이전하여, 만창주식의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했다.”
상장에 성공하지 못한 만창주식의 주식모집설명서를 보면, 2010년말까지, 만창주식의 총자산은 3억위안이고 순자산은 7500만위안이다. 대외에 913만주를 발행했다.
만창주식의 사무실주소를 찾아가보면, 문에걸린 간판은 만창화공설비공장이다. 공장안의 직원은 공장이 이미 가오칭창과는 관계없다고 말한다. “이 공장은 최초에 촌정부기업이고, 망한 후, 가오칭창이 수급을 받아서 운영했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1990년이후 가오칭창은 즈보시로 가서 사업을 했다.” 그 직원의 말이다. 현재 공장의 책임자인 장시콩(張希孔)은 여하한 질문에도 대답을 거절했다.
“만창주식은 사무(四無)회사이다. 간판도 없고, 직원도 없고, 주주총회개최도 없고, 재무제표도 없다.” 아이췬처의 말이다.
만창주식의 원주주들은 여러 번 가오칭창에게 주주총회를 개최하도록 요구했고, 재무제표를 공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가오칭창은 만창주식의 부지에 대하여 그력 회피하고 말을 우물쭈물했다. 만창과기 종합판공실 주임인 펑증즈(逢增志)는 “찾지도 못했고, 대표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만창주식과 만창과기간의 자산이전문제에 대하여 가오칭창이 투신하기 전에 이미 아이췬처와 합의를 이룬다. 5월 17일, 정부의 조정하에, 가오칭창과 아이췬처는 서면합의서를 체결한다.
가오칭창이 사망한 후, 전만창주식의 913만주를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는 다시 난제로 남았다. 현지의 일부 투자자들은 만창주식과 유사한 현상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전 즈보증권거래소 장외거래시스템이 폐쇄된 후, 많은 회사들은 이런 종국을 맞이했다. 자산은 다 사라지고, 새로 회사를 만들어 상장한다. 그리고 구주주의 손실을 보상받을 길이 업삳.
그는 성격이 견인불발하여, 내가 자살하면 했지, 그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아이췬처는 가오칭창이 스스로 투신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또 소식통에 따르면, 가오칭창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된 3000만주의 만창과기주식중에서 600만주만이 자신의 것이고 나머지는 다른 관리들의 것을 명의만 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5월 26일, 만창과기의 공고에서는 가오칭창이 보유한 3256만주의 주식은 모조리 그의 아들 가오바오린의 소유로 귀속된다고 발표했다.
가오칭창의 주변에서 일하던 사람은 이렇게 말하다: “가오칭창은 좋은 사람이다. 인터넷에 그를 비난하는 글이 많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가오칭창사건에 대한 정보통제가 아주 심하다. 그와 여러해동안 같이 사업을 해온 파트너조차도 그에 대하여는 언급을 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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