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촉(洪燭)
장중행(張中行) 노인이 1920년대 후반기에 통현(通縣)에서 사범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북경에 들어가 보았다: "걸어갔던 길은 임대옥(林黛玉)이 걸어서 입경했던 그 길이다. 조양문을 들어가서 계속 서쪽으로 갔다. 더 앞으로 가서, 나는 동사패루(東四牌樓)의 저시대가(猪市大街)를 지나서 취화후통(翠花胡同)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기억력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그는 반세기 전에 처음 입경했던 인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이것을 가지고 바로 임대옥이 대관원을 가기 위해 걸어갔던 노선을 연상했다.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이라면 홍루몽을 꿀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임대옥이라는 여인이 정말 존재했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그저 조설근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임)대옥은 그날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올랐다. 그리고 영국부에서 가마를 보내주었다. 짐을 끌고가는 차량도 기다린지 오래였다...가마에 오르자, 성안으로 들어갔다. 비단창을 통하여 바깥을 내다보니, 도시는 번화했고, 사람은 아주 많았다. 다른 곳과는 달랐다." 작은 도시사람이 처음으로 대도시를 온 기분은 모두 비슷할 것이다. 그 당시 남방사람(소주 여학생 임대옥)이 북상하려면, 경항대운하의 수로를 따라서 통현(지금의 통주)이 종점이 될 것이다. 거기사 다시 가마나 말을 타고 북경성으로 들어간다. 임대옥이 입경한 것은 친척에 의탁하기 위하여이다. 이 강남아가씨는 나중에 경성에서 병으로 죽는다.
임대옥보다 입경할 때 더 유명했던 것은 이자성이다. 극중에 <<틈왕진경(闖王進京, 틈왕은 이자성의 별호)>>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북경으로 말을 타고 뛰어들었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마를 이끌고 팔달령장성에서 쳐내려왔다. 태산압정(泰山壓頂)의 기세로. 성북의 사하 혹은 순의 일대의 십자로에는 이자성이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달리는 청동 동상이 서 있는데, 이것은 그의 북경진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자성의 입경은 강산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
1949년 모택동은 하북 서백파(西柏坡)를 떠나서, 북경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고자 했다(그는 서백파에서 3대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중요한 말을 한다. 그 뜻은, "우리는 이자성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당의포탄(糖衣砲彈, 설탕을 입힌 포탄)을 방지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 이는 그의 안목을 보여주는 것이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모택동은 해방군을 데리고 북경으로 진입해서 신중국을 성립시킨다. 역사는 이로써 새로운 장을 연다. 황진 장군은 서백파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신중국은 여기서 걸어왔다"
모택동은 기차를 타고 북상했다. 첫날 밤에는 향산의 아래에 있는 이화원에서 잤다. 나중에 중남해로 들어간다.
모택동이 북경성으로 진입할 때, 이자성보다 조심하고 겸허했다. 그는 말했다 : "우리는 과거를 보러 온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그는 시간의 시험을 견뎌냈던 것이다.
선구자였던 이자성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서, 일찌감치 도태되었다.
모택동의 견해에 따르면, 이자성은 당의포탄에 당했다. 당의포탄이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궁금해졌다. 북경의 빙당호로와 같은 것을 말하는가? 그 명중률은 왜 그렇게 높은가? 포탄이 비오듯이 내리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진 공산당원들이 왜 그렇게 경계해야 했을까?
보기에 당의포탄은 빙탕호로처럼 맛있는가보다. 그러나 극독을 품고 있는가보다. 이자성은 바로 '암기'에 맞아서, 낙마한 것이다.
사실, 군수물자제조상들이 이런 '비밀무기'를 개발한 적은 없었다. 소위 당의포탄은 원래 살상력도 없는 것이나, 우리 내심의 욕망이 바로 도화선이다.
이자성이 북경에 들어온 것은, 시한폭탄 위에 앉아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겨우 42일만에 폭발했다). 멋진 기둥과 서까래, 붉은 등과 술집, 거기에 멋진 의복과 여인. 이자성은 금방 어질어질해졌다. 그리하여 대순의 황제가 되어 충분히 황제의 재미를 즐겼다. 그의 수하에 세상물을 먹어보지 못한 병사들은 스스로 큰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고, 북경에서 먹고 즐기며, 더 이상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자성이 꿈에도 그리던 자금성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스스로 즐기고자 했다. 황제가 누렸던 것은 모조리 누려보려고 했다. 비록 수만명의 환관들은 모조리 궁에서 쫓아냈지만, 3천의 궁녀는 남겨두고 자신이 썼다. 밤마다 미친 듯이 놀고 즐겼다. 심지어 며칠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가 등극후에 한 유일한 치적이라면 바로 '탐관오리의 돈을 빼앗은 것'이다. 명왕조의 탐관오리들을 처결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다(모두 합쳐서 백은7천여만냥이다). 그 후에 논공행상을 벌여서 장병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기뻐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그저 양산박 호한을 모방한 것이다. 진보한 것이 없었다. 개국후의 첫번째 일이 '혁명을 하고, 생산을 늘이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빼앗는 것이었다. 확실히 사람들을 실망시킨 짓이었다.
모택동은 위대했다. 그는 이자성의 결함을 잘 들여다 보았다. 그는 북경에 들어간 후, 해방군이 국민당의 근거지 남경을 점령했다는 첩보를 듣는다. 그러자 그는 바로 시를 썼다: "의장잉용추궁구, 불가고명학패왕(宜將剩勇追窮寇, 不可沽名學覇王)"(마땅히 남은 힘을 다해서 궁지에 몰린 적을 쫓아야 한다. 명성을 탐하거나 패왕을 배워서는 안된다)."
이자성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은 바로 사기를 북돋아서 전과를 확대하려는 웅심이었다. 결국, 그는 초패왕의 복사판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이러한 전철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이자성을 넘어설 수 없고, 이자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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