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비(吳非)
[주: 이 수필은 개략 1999년에 썼고, 3년전에 수정을 했다. 그러나 어느 신문잡지에도 발표할 수 없었다. 연초에 남방의 어느 잡지가 이미 싣기로 하고, 편집인이 제목을 "모택동은 소년때 논밭노동을 좋아했을까"로 두 글자를 추가시켰다.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래도 최종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 세계는 화해(和諧)세계이다. 할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한다면 '화해'사회인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반화해사회가 아닌가. 2008년은 곧 끝날 것이다. 나는 여기에 글을 실어, 50주년 기념으로 삼고자 한다.]
1950년대에 나는 소학교를 다녔다. 당시 소학교 교과서에는 몇 편의 소련혁명지도자 레닌의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아주 열심히 배웠고, 인상이 아주 깊었다. 40여년후, 소련의 옛날 사건들이 기밀해제되어, 비로소 그 이야기들(<<이발소의 레닌>>,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다>>등)이 작가 미하일 조시첸코(Mikhail Zoshchenko)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 그는 "형세를 따라가지 못하여" 관방에서 낙후작가로 찍혔다. 먹고 살기 위하여, 레닌에 관한 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발표후에는 심지어 골치를 앓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쓴 <<레닌과 위병>>에서 그 소리지르는 "젊은 수염있는 사람"은 바로 스탈린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지도자의 고상한 품성에 관한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우리를 감동시켰다. 당시 선생님은 자주 지도자들의 어린시절의 각종 미덕을 얘기했다. 국어시간에는 "모택동이 어려서부터 노동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노동을 좋아했을 뿐아니라, 다른 농민을 도와주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오는데, 그는 자기 집의 곡식을 거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곡식거두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자신보다는 남을 생각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개략 1957년과 1958년이었다.
십년후, 모택동이 "농촌은 하나의 광활한 천지이다. 그곳에는 크게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줄을 서서 농촌으로 갔다. 불행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농민이 된 후에, "모택동이 어려서부터 노동을 좋아했다"는 주장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의문이 든 것은; 농업노동에 종사해본 사람이라면 다른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모택동은 1958년에 농업문제에서 거의 모두 상식적인 잘못을 저지른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그가 친히 농업노동을 해본 적이 있는지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1무(畝)의 땅에서 양식을 얼마나 수확할 수 있는지, 이것은 농사짓는 사람의 상식이다. 나는 농사지은지 1년후에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경작상태하에서 강남지역의 쌀,보리의 두 계절의 1무당 생산량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북방의 상황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모택동이 왜 그렇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었는지. 그는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지도자가 아닌가? (나중에 그는 스스로 과학자인 전학삼에게 속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이런 것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전학삼도 농업노동의 경험이 없지 않은가?) 당시 우리가 보도록 허락된 읽을 거리는 아주 적었다. 문혁때 반복해서 본 것은 <<서행만기(西行漫記)>>였다(이 책이 공개적으로 판매된 것은 아마도 문화독재자의 착오였을 것이다). 이 책은 나의 의심을 측면에서 확인해 주었다.
어떤 의사결정의 착오가 반드시 사람의 입장관점, 사상품격, 혹은 IQ에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 대약진이라는 "과시병"을 회고하게 된다. 하남 수평현 위성공사에서 "보리를 1무에 1,075킬로그램이나 생산했다"는 허풍에서 시작하여 신속히 사천성 비현이 "벼를 1무에 45,217.58근 생산했다"는 수퍼허풍으로 발전한다. 겨우 3개월만의 일이다. <<인민일보>> 9월 5일자에는 광동 연현에서 1무당 6만근을 생산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9월 25일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보리의 1무당 최고생산량은 청해성 시달목분지 새습극농장 제1생산대대의 8,586근이 되었고, 벼는 1무당 최고생산량이 광서성 환강현 홍기인민공사의 130,435근이 되었다....
모택동은 이를 사실로 믿었다. 심지어 양식생산이 많아지면 보관할 곳이 없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과거 우리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이는 모택동이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보니 군중에게서 멀어지고, 실제에서 멀어져서, 아부잘하는 부하들이 하는 말을 믿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 설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다만, 나는 농민출신인 모택동이, 오랫동안 농민운동에 종사해온 모택동이고, 일찌감치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을 알았던 모택동이었지만, 그의 경력에서 한가지 사실을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았다. 즉, 그는 비록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제대로된 농민이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농업생산노동에 참가해본 적도 없고, 농업경험을 쌓지도 않았다. 일찌기 글을 읽을 때, 모택동은 농업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농삿일을 묻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 시대에 농업생산류의 숫자에 대하여 이해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생산대에 있는 동안, 여러번 농민들과 창고의 곡식을 꺼내서 말린 적이 있었다. 많은 "우경농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만일 1무당 정말 5만킬로그램을 생산한다면, 그것은 수확한 벼를 1무의 땅에 쌓을 때, 높이가 3,4십 센티미터가 충분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무당 "41만킬로그램"을 생산하면? 이것은 아주 간단한 계산법이다. 농업생산에 약간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계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1969년, 나는 생산대에서 두번째 해를 보내는데, 가난한 농민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원래의 지주부농도 이렇게 나에게 말해주었다.
스노우의 <<서행만기>>에 기록된 모택동자술을 보라: "부친은 내가 불효하고 게으르다고 혼내기를 좋아했다. 나는 그러면 어른은 인자해야한다는 말로 대응했다."; "그는 나를 게으르다고 지적했다. 나는 반박해서 말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한다고. 나의 부친은 나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으니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개략 13살때, 한번은 "부친이 나를 여러 사람 앞에서 게으르고 쓸모없다고 욕한 바 있다. 이것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도 그를 욕했다. 그리고 집을 떠났다." 이번 가출은 그냥 가출이었다. 나중에 다시 돌아갔다. 책을 좀 읽고는 그는 또 말했다: "나는 점차 논밭에서 노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모택동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농업노동에 참가한 것이 부친의 핍박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친의 눈에, 모택동은 제대로된 농삿꾼이 아니었고, 힘든 농업노동을 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와 부친의 계속된 충돌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모택동의 부친인 모순생(毛順生)은 수십무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장기공과 단기공을 고용했다. 이외에 양식을 운송판매했다. 모택동이 어렸을 때 부친을 도와서 장부를 정리했다. 이를 보면 사업규모가 적지 않았던 것같다. 모택동이 만일 힘을 다해서 세심하게 일을 했다면, 이런 일을 할 때 반드시 적지 않은 농업생산지식을 쌓았을 것이다. 아마도 바로 논밭노동을 싫어했고, 그저 "천하를 얻겠다"는 홍곡지지만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방면의 지식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방면의 지식이 필요하게 된 1958년에는 벌써 그는 더 이상 "배의 맛"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물며 그는 기고만장해서 귀에 거슬리는말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를 속이려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다. 마침내 인류역사상 공전절후의 큰 화가 닥치고, 수천만의 공화국공민이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만일 모택동이 과시병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 그가 큰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군중에서 멀어졌다고 한다면 그 이유도 성립된다. 다만, 또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는 1950년대의 소학교 어문교과서에 실린 것처럼 어려서부터 농업노동을 좋아하고, 농업생산을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왜 상식문제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 현재 과시병이 다시 도졌다. 나는 건의하고 싶다. 전문적으로 "숫자를 내놓는" 사람들은 그들의 IQ를 검증해봐야 할 뿐아니라, 그들의 진실한 경력도 조사해보아야 한다.
1958년, "과시병"이 창궐할 때, 일찌기 섬북에서 모택동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 스노우는 미국에서 맑은 머리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가 그 사태를 어떻게 보았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곁에서 보면 잘보인다(傍觀者淸). 서양인이 이 문제에 대하여 몇 마디 진실된 말을 하더라도 우경으로 몰리지도 않을 것이고, 관직에서 파면되지도 않을 것이며, 더더구나 감옥에 갇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만일 1958년에 해외매체에서 중국의 "과시폅"에 대하여 평가를 한 것을 모아서 책으로 펴낸다면, 그것도 아주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현재 누군가 이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십여년전의 세계지리교과서에는 세계의 민족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는데,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그 민족은 성격이 나태하다"고 말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것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종족우열론"이다. 만일 어느 나라의 교과서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써버린다면, 반드시 외교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근면하고 용감한 민족도 있고, 나태하고 비겁한 민족도 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는가?
우리는 이전에 공자를 "사체불근 오곡불분(四體不勤 五穀不分, 사지를 써서 노동을 하지 않고, 오곡을 구분하지 못한다)"이라고 비판하는데, 아무런 책임도 부담하지 않았다(지금 공자가 게을러서 보리와 콩(麥菽)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거리낄 것이 없다). 현재 모택동이 소년시대때 농업노동을 좋아했느냐 여부를 논의하는 것도 무슨 원칙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더 많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이 즐겨 말하는 지도자께서 "3개월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문제도 연구해볼만하다. 어떤 일은 우리는 확실히 하지 않고 넘어가고자 해도, 우리의 후손은 반드시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넘어가줄지는 모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모든 것을 믿어버린다면, 반드시 문명사상 새로운 멍청함의 한 페이지를 남기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당연히 "우리는 다시 속지 않겠다"는 구호를 외치며 누구와 일도양단으로 관계를 자를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우리들 교사는 어찌 되었건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속였던 것으로 다시 학생들을 속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최저한도의 회의비판의식이 있어야 한다. '통일사상, 통일인식'의 낡은 원칙을 절대로 받아들여 맹종하거나,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 똑바로 서서 사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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