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 고거(故居) 편액의 변천사

중은우시 2009. 12. 26. 17:42

 

"중국인민위대적영수모주석적가(中國人民偉大的領首毛主席的家)"

중국인민의 위대한 영수 모주석의 집.

 

신중국이 설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산(韶山)의 모택동 고거에는 첫번째 편액인 "중국인민위대적영수모주석적가(中國人民偉大的領首毛主席的家)"가 걸렸다. 이 편액은 '소산일지필(韶山一支筆)'이라고 불리우던 모우거(毛宇居, 모택동의 스승)가 쓴 글이다. 당시 중앙지도자의 고거에는 모두 유사한 '명칭'을 걸었다. 예를 들어, 상담현 팽덕회의 오석 고향집에는 "중국인민지원군사령팽덕회적가"라고 쓰여 있었다.

 

"모택동동지고거(毛澤東同志故居)"

 

1953년 모택동이 북경에서 회견시 고향의 친우들은 만난다. 모추월(毛秋月, 모택동의 숙부)가 모택동에게 소련과 동독의 손님들이 고향집에 와서는 위에 걸려 있는 ""중국인민위대적영수모주석적가(中國人民偉大的領首毛主席的家)"라는 편액을 보고 모두 좋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모택동은 "그건 안맞다. 안맞다. '위대'라는 두 글자는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위대'하다고 쓴다고 해서 '위대'하게 되는 가? 내 생각에는 편액을 바꾸는게 좋겠다."

 

그때, 화국봉은 이미 상음현에서 상담현위서기로 옮겨와 있었다. 그는 몇번 현위에서 회의를 개최한 후, 모주석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널리 의견을 모은다. 결국 첫번째 편액은 갈아치우리고 결정한다. 1953년 3월, 고향집에는 두번째 편액인 "모택동동지고거(毛澤東同志故居)"가 걸린다.

 

"모택동동지구거(毛澤東同志舊居)"

 

1961년 4월 9일, 유소기와 왕광미가 모택동고거를 참관한다. 유소기는 "모택동동지고거"라는 큰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 편액은 누가 이렇게 쓰도록 했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업무인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유소기가 이어서 말했다: "모택동동지고거의 '고(故)'자에는 '과거'라는 뜻과 '고인'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의 모주석은 아직도 몸이 건강하니, 당연히 '고(故)'자는 '구(舊)'자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택동고거관리인원은 유소기의 지시를 기록해서, 상부에 보고한다. 오래지 않아, 호남성위 판공청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모택동동지고거"를 "모택동동지구거"로 바꾸는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1961년, 전인대 부위원장인 곽말약(郭沫若)이 "모택동동지구거"라는 편액의 글씨를 썼다.

 

"모택동동지고거(毛澤東同志故居)"

 

1983년, 소산관리국은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등소평에게 고거와 기념관의 편액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4월 2일, 등소평은 글씨를 몇번 고쳐쓰다가 최종적으로 "모택동동지고거"와 "소산모택동동지기념관(韶山毛澤東同志記念館)"이라는 두 개의 편액을 쓴다. 지금까지도 고거와 기념관에는 이 편액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