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력건(信力建)
모택동과 코민테른(共産國際)의 관계는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좋거나 나쁘거나간에 모두 그의 운명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코민테른이 모택동에 처음 주목한 것은 1927년이다. 이해 3월, 모택동의 <<호남농민운동고찰보고>>는 중공중앙의 기관지인 <<향도>> 주간에 실렸다. 5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기관지인 <<코민테른>> 러시아어판에 이 글이 전재된다. 6월에는 영문판 <<코민테른>>>에 이 글이 전재된다. 그리고 첫페이지에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중국농촌상황을 소개한 영문판 간행물중에서 이 글이 가장 명확하다" 코민테른의 의장인 부카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8차 전체회의에서의 보고에서 중국농민운동을 설명하면서 모택동의 글을 인용했다. 그는 모택동의 보고서를 아주 뛰어나게 잘 썼다고 평가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모택동은 중국특색의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혁명의 길을 시도한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강조하는 도시를 중심으로한 혁명노선과 배치된다. 코민테른은 비록 모택동이 택한 노선을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모택동 및 그 홍군의 상황에는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1928년 1월, 코민테른 주상해대표인 미트케비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보낸 서신에서, "호남에서, 모택동의 군대는 지금 확충되고 있다"고 보고한다. 1929년 1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방서기처 극동부는 호남, 강서의 두 성에서 국민당군이 정강산을 소탕하는 것을 알고, 그 달 29일에 회의를 개최하여, 주덕,모택동의 홍군을 지원하는 방안을 토론한다. 그리고 중공중앙의 명의로 명망이 있는 전문가를 주모홍군의 지구로 파견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혁명군사위원회에 주모홍군을 실제로 원조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타진한다. 주모홍군이 커지고 정강산혁명근거지가 마련되면서, 모스크바는 모택동 및 그가 이끄는 홍군유격전쟁을 점점 더 중시하게 된다. 이해 7월 2일, 소련의 프라우다는 사론을 통하여, 주덕,모택동이 이끄는 홍색유격대의 활약을 칭송하고, 모택동이 중국유격활동의 뛰어난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1931년 3월, 코민테른은 소비에트구와 홍군의 발전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5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의장단은 중공중앙에 지시하여, 모택동의 홍군유격전쟁에서의 좋은 경험을 널리 보급하도록 한다.
그러나 1931년초에 이르러, 미푸의 도움하에 왕명(王明)이 중공중앙의 지도자로서의 권력을 장악한다. 모택동은 그로부터 배척을 받고 타격을 받는다. 코민테른은 모택동이 소비에트지구에서 실행한 몇 가지 정책에 아주 불만이 많았다. 이런 배경하에서, 모택동은 홍군내에서의 지휘권을 상실한다. 그저 중화소비에트 주석의 한직을 가지고 소비에트지구내에서 할 일없이 지낸다. 장정이 개시되기까지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장정에서 준의회의는 모택동의 운명에서 전환점이다. 이 전환점이 나타난 것은 역시 코민테른과 관련이 있다. 이덕(李德)은 회고록인 <<중국기사>>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1934-1935년, 당의 지도부는 완전히 외부와 격리되었다. 이 일이 조성한 결과는 아주 심각했다. 그들은 국제공산주의 노동자운동, 구체적으로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쁘띠부르조아계급농민의 지방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마르크스레닌주의 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통용되었다. 심지어 이들 간부들 마저도 이런 정서에 부분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덕의 회고록에서 공개한 바에 따르면, 당시 중공중앙이 장정을 결정하고 장정의 도중에 준의회의를 개최한 것을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에서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원래, 준의회의의 소집개최 및 회의상의 모든 결정에 대하여 코민테른은 전혀 몰랐다. 중앙홍군은 중앙소비에트지구를 떠나기 2달전에, 이미 코민테른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 중공임시중앙이 1933년 상해에서 중앙소비에트지구로 이전한 후, 코민테른과 임시중앙의 모든 연락은 새로 성립된 중공중앙 상해국의 통신팀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노복단, 강생, 이죽성, 성충량은 중공중앙 상해국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치열한 백구투쟁에서, 상해국은 연이어 타격을 받고 파괴된다. 4명의 서기중에서 강생이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대표단의 부단장(단장은 왕명)을 맡은 이외에 나머지 3명은 체포, 배반한다. 상해국의 마지막 서기인 성충량이 1934년 8월에 체포된 후, 상해국은 중공비밀통신팀의 팀장인 무자명에게 적시에 통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자명이 적의 손에 넘어간다. 이때부터 상해국의 통신팀이 중개했던 코민테른과 중공중앙의 무선연락은 철저히 중단된다.
이 우연한 사건은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던 중국공산당에게 의미가 깊다. 이덕은 <<중국기사>>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중앙위원회 상해국은 통신팀마저도 국민당 비밀경찰에 발각되어 버린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코민테른대표단 및 코민테른집행위원회와의 연락이 완전히 중단된다. 이때부터 중앙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다. 이후의 사태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덕이 말하는 영향이라는 것은 자신과 같은 좌경주의자들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고, 중국공산당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만일 코민테른이 여전히 무선통신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을 리모트콘트롤했다면, 중국공산당이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지 않았ㄷ면, 준의회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혹은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결과가 나왔겠는가? 모든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주로 영향을 미치던 사람은 왕명과 강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역사는 모택동을 선택했다. 코민테른과의 연락중단은 모택동이 굴기하는데 객관적인 조건을 형성해주었다.
당연히, 준의회의의 결과는 나중에 코민테른의 추인을 받는데 이는 모택동의 신축성있는 투쟁전략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교묘하게 왕명이 추진하는 정치노선의 비판을 피해서, 결의에서 제6기 4중전회의 '정치노선은 정확하다'고 하고, 중공의 최고지도자는 '28개반 볼세비키'의 하나인 낙보(洛甫, 장문천)이 맡고, 박고(博古)가 여전히 정치국 상임위원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이는 코민테른이 준의회의를 추인하는데 대한 저항을 완화시켰다. 1935년 1월의 준의회의는 모택동의 당과 홍군에 대한 지도자 지위를 확립한다. 이해 8월, 진운과 반한년은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에 준의회의의 상황을 보고하고, 코민테른은 준의회의의 정신을 인정한다. 같은 달에 끝난 코민테른 제7차 대표대회에서 모택동은 처음으로 그리고 궐석인 상태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코민테른, 소련은 장개석의 국민당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홍군에 장개석의 지휘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시종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원칙을 견지했다. 이로 인하여 코민테른은 왕명을 귀국시켜 중공중앙이 정책을 변경하도록 설득하게 한다. 코민테른의 이해와 지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그리고 왕명의 통일전선정책상의 우경착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중공중앙은 1938년 3월 임필시를 모스크바로 보내어 보고하게 한다. 코민테른 지도자는 임필시의 보고를 듣고는,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제공산당과의 실제상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6월 1일에 회의를 소집개최하여, <<중공대표보고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한다. 여기에서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서의 정치노선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7월, 지미트로프는 귀국할 예정인 중국공산당의 주코민테른대표 왕가상과 후임자 임필시를 접견한다. 그 자리에서 코민테른의 중요한 지시를 전달한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모택동 동지는 오랜 시험을 거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이다. 너희는 중국공산당의 모든 당원에게 얘기하라. 모택동 동지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로 지지하라. 그는 실제의 투쟁에서 단련된 지도자이다. 다른 사람 예를 들어, 왕명은 더 이상 지도자가 아니다." 1938년 9월 29일, 중공중앙은 제6기 6중전회를 연안에서 개최한다. 왕가상은 코민테른와 지미트로프의 구두지시를 전달한다. 회의에 출석한 왕명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모택동의 지도자 지위를 인정한다. 이번 회의에서는 다시 한번 모택동의 당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정한다. 코민테른이 거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택동은 나중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6중전회의 결정은 중국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이었다. 6중전회의 이전에 비록 일부 저작 예를 들어 <<지구전을 논한다>>는 것등이 있었지만, 코민테른의 지시가 없었다면, 6중전회에서 해결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코민테른 7차대회이후, 모스크바의 모택동에 대한 평가는 더욱 높아진다. 코민테른의 기관지 및 소련공산당의 프라우다등에서 모두 이 중국인민의 전설적인 지도자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프라우다는 장문의 글을 통하여 모택동을 칭송한다. 거기에서 모택동은 가장 먼저 진독수의 투항주의정책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잘못된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사람중 하나이며, 연전연승으로 위명을 떨치는 중국홍군을 창건했고, 강서성의 첫번째 소비에트지구를 창건했으며, 홍군의 최고당대표로 홍군의 여러 전투에 참가했고, 각급 지휘관을 길러냈으며, 풍부한 군사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소비에트국가의 수뇌이며 인민으로부터 와서, 인민의 심리를 잘 알고, 소비에트공화국헌법과 법률 및 신국가의 많은 법령을 제정했고, 그의 정치활동가로서의 비범한 재능을 드러냈고, 당과 코민테른의 각종 결의를 아주 훌륭하게 관철했다고 하였다. 이 글의 결론에서는 모스크바가 모택동을 얼마나 중시하고 기대하는지 보여준다. "강철같은 의지와 볼세비키의 완강함, 놀랄 정도의 두려움이 없는 정신, 뛰어난 혁명원수이며 국무활동가인 천재 - 이것은 바로 중국인민의 지도자 모택동 동지가 가진 고귀한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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