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모택동의 일생을 살펴보면, 4개의 숫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네 개의 숫자는 각각 28, 99, 8341, 300이다.
모택동과 28
1. 1893년 12월 26일, 모택동이 태어난다. 28년후인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탄생한다. 중공 제1차대회에 참석한 대표의 평균연령은 28세이다(이달 31세, 이한준 31세, 장국도 24세, 유인정 19세, 모택동 28세, 하숙형 45세, 동필무 36세, 진담추 25세, 왕진미 23세, 등은명 20세, 진공박 29세, 주불해 24세, 포혜승 27세), 모택동의 나이는 딱 28세였다.
2. "이십팔획생(二十八劃生)"은 모택동이 1915년에서 1918년까지 여러번 사용했던 필명이다. 번체자 모택동(毛澤東)의 획수가 28이므로 이렇게 이름했다. 호남제1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 모택동은 "이십팔획생"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를 공개모집하기도 했다.
3. 1917년, 모택동은 양개혜와 결혼하는데, 양개혜는 중국에서 말하는 '이팔(二八)' 즉 16살이었다. 1921년,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모택동은 28살이었다. 1929년, 양개혜가 희생될 때 그녀의 나이가 마침 28살이었다. 그들의 결혼부터 1949년 건국까지 걸린 기간이 딱 28년이었다.
4. 추수의거가 개시된 28일후, 즉 1927년 10월 7일, 모택동의 의거부대를 이끌고 영강현의 모평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정강산혁명근거지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공산당이 이끄는 첫번째 농촌혁명근거지를 창립한다. 중국혁명의 중심사업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전략적인 방향전환을 이루게 된다.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결국은 도시를 탈취하는 새로운 길을 연다.
5. 1928년 4월 28일, 모택동이 이끄는 추수기의부대는 주덕, 진의가 이끄는 일부 남창기의부대와 정강산에서 성공적으로 회합한다. 이는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사상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6. 1929년 12월 28일, 모택동은 복건 상항 고전촌에서 중공홍4군 제9차대표대회를 소집주재한다. <<당내의 잘못된 사상을 시정하는데 관하여>>라는 보고서(즉, 고전회의결의)를 작성하고, 전위서기에 다시 당선된다. 고전회의결의는 중공과 홍군건설의 강령적인 문건이고, 인민군 건군사의 중요한 이정표이다.
7. 모택동은 1932년 12월 홍1군방면의 군총정위직무를 박탈당한지 28개월후인 1935년 3월, 준의회의에서 정치국상무위원으로 당선된 모택동이 "전적사령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모택동, 주은래, 왕가상으로 구성된 3인군사영도소조를 구성한다. 홍1군은 다시 주모홍군이 되었다.
8. 28세된 하자진은 1937년 10월 연안을 떠나 서안으로 간 후 난주, 신강을 거쳐 소련으로 간다. 이후 다시는 남편 모택동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9. 1945년 8월 28일,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으로 중공대표단을 이끌고 중경으로 가서 국민당과 담판을 벌인다. 1개월여동안 계속하고, "쌍십협정"을 체결한다. 이는 모택동의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고, 공산당의 평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하여 후방의 민심을 얻었다.
10. 중국은 자고이래로 28성숙(星宿)이라는 말이 있다. 한무제가 천하를 평정할 때, 이름을 날린 공신이 모두 28명이었다. 모택동이 개국영수가 되는데도 28명의 개국공신이 있다. 그들은 1949년 9월 21일 소집개최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에서 선임된 인민정부 부주석이다: 주덕, 유소기, 송경령, 이제심, 장란, 고강. 같은 해 10월 1일 오후에 개최된 중앙인민정부위원 제1차회의에서 선임된: 비서장 임백거, 국무원총리 주은래, 최고인민법원장 심균유, 최고인민검찰원장 나영환등 10명이다. 그리고 모택동이 1955년에 임명한 10대원수와 10대대장이 있다. 주덕과 나영환이 중복되므로 이를 제외하면 딱 28명이다.
11. 중공건국전 28년간의 분투토력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택동은 1949년 10월 1일 개국대전에서 54발의 예포를 28번 쏘게 했다.
12. 28세된 모안영은 1950년 11월 25일 한국전쟁에서 희생된다.
13. 1954년 9월 28일, 제1기전인대 제1차대회가 폐막된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주석에 당선된다.
14. 1956년 8월 28일, 중공제8기 1중전회에서 모택동은 다시 중공중앙주석에 당선된다.
15. 여선 호령 28호방은 하자진이 1959년 마지막으로 모택동을 만날 때 거주했던 곳이다.
16. 28일동안의 "칠천인대회"가 1961년 1월 11일에 개최된다(2월 7일에 끝남). 회의기간동안 모택동은 자아비판을 한다. 이 회의는 대약진과 반우경의 잘못을 시정하고, 국민경제의 곤란한 국면의 방향을 튼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92년, 30년후에 등소평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의 역사상 7천인대회와 같이 당의 주요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자아비판을 하고 스스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광범위하게 민주를 드높이고 당내비판을 전개한 것으로 사상유례없는 일이었다. 그 의미와 역할은 우리와 같이 친히 겪은 사람들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영향이 깊고 오래갈 것이라고 믿는다."
17. 1969년 4월 28일, 중공제9기 1중전회에서 모택동은 다시 중공중앙주석에 당선된다. 임표는 유일한 부주석이 된다.
18. 1972년 모택동은 미국대통령 닉슨을 접견한다. 이번 접견은 그가 1944년 미국군대 및 정부대표인, 미군연안옵서버를 만난 날로부터 28년이 되는 해이다.
19. 1973년 8월 28일, 중공10차대회가 폐막된다. 그후 10기 1중전회에서 80세가 된 모택동은 여전히 중공중앙주석에 당선된다.
20. 1976년 1월 28일, 모택동은 그보다 28세가 어린 화국봉을 국무원대리총리에 앉혀서 중앙의 일상업무를 주재하게 한다. 이것은 정치국에서 통과되었고, 나중에 사인방을 분쇄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21.1976년 7월 28일, 당산대지진이 발생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모택동은 눈물을 흘린다. <<중공중앙의 당산, 풍남 지진구재에 관한 통보>>는 그가 마지막으로 내보낸 문건이다.
22. 모택동이 서거한 28일째 되는 날 즉, 1976년 10월 6일, 화국봉, 섭검영등은 중앙정치국을 대표하여 민심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한다. 즉, 일거에 '사인방'을 분쇄한 것이다.
모택동과 99
1. 1927년 9월 9일, 모택동은 추수기의를 발동한다. 바로 이날 모택동은 그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체포를 당하게 된다. 나중에 요행히 도망칠 수 있었다.
2. 1929년 음력 9월 9일, 홍군이 상항을 점령한다. 그리고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한다. 전통명절인 이날, 모택동은 호기에 넘쳐서 이렇게 쓴다: "세세중양, 금우중양, 전지황화분외향(歲歲重陽, 今又重陽, 戰地黃花分外香, 매년 중양절이 있지만, 올해의 중양절에 전쟁터의 국화는 특히 향기가 좋다)"
3. 1949년 9월 9일, 모택동은 북경 중남해에 들어간다. 바로 이날 모택동은 바쁜 와중에 <<중화인민공화국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을 심의결정한다. 이 강령은 실질적으로 당시의 "임시헌법"이다.
4. 1956년 9월 9일, 모택동은 이날 정력을 집중하여 중국공산당 제8차대표대회의 <<정치보고>>를 심의결정한다. 이 보고서에서는 "국내의 주요한모순은 이미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이 아니라, 인민인민의 경제문화가 인민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과의 모순이다. 당과 인민의 주요한 임무는 역량을 집중하여 사회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국가공업화를 실현하며, 점진적으로 인민의 날로 증가하는 물질과 문화의 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5. 1971년 9월 9일, 모택동은 타고있던 전용열차를 과감하게 항주를 떠나서 소흥부근으로 가도록 명령한다. 이렇게 하여 무의식중에 임입과가 만든 "571공정"(무장기의와 발음이 같음), 즉, 공중포격을 통하여 모택동을 해치려는 계획을 무산시켰다.
6. 1976년 9월 9일 0:10. 모택동이 서거한다.
모택동과 8341
1. 추수기의때, 모택동은 한양(漢陽)에서 만든 소총을 들고 있었는데, 총번호가 8341이었다. 모택동이 연안에 도착한 후, 자주 이 소총을 꺼내서 닦곤 했으며, 아주 아꼈다.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이론은 바로 이 총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결국은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았다.
2. 모택동을 보위하는 중앙경위단의 번호는 여러번 바뀌었다. 처음으로 정식번호를 사용한 때는 1953년이었다. 총참모부에서 통일된 일련번호를 붙였는데, "총자(總字)001"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1950년대말까지 사용된다. 그 후에는 3747부대로 변경된다. 이것은 1964년전후까지 사용된다. 1964년을 전후하여 중앙경위단은 처음으로 8341이라는 부대번호를 사용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번호는 일찌기 총참모부대의 한 군용창고번호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창고가 철거되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이 부대번호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총참모부는 8341을 중앙경위단에 부여했다. 8341은 모택동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대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장사덕은 8341부대의 최초 전사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남을 구했다. 중앙경위단은 좋은 관을 써서 그를 안장했다. 모택동은 추도회를 개최해라. 내가 직접 추도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리하여 <<인민을 위하여 봉사하자>>라는 글도 나오게 된 것이다.
3. 교묘한 점이라면, 8341이라는 네 숫자는 모주석이 83세까지 살았고(1893-1976), 지도자로 41년간(1935년 준의회의 - 1976 사망) 있었다는 것과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모택동과 300
금전적인 면에서 모택동은 마치 "300"이라는 숫자를 특히 좋아한 것같다. 자신의 친구이든 스승이든 잘 알지 못하는 노인이든 50년대이든, 60년대이든, 70년대이든 모택동이 일단 돈을 내놓았다 하면, 누구에게 주든지 모두 300위안이었다.
1. 1953년, 모택동은 당제 모택영(毛澤榮, 아명은 勝五)가 북경으로 와서 모택동을 찾아왔다. 헤어질 때, 모택동은 생활비로 구화폐300만위안(현재 화폐로 하면 300위안)을 주었다.
2. 1954년, 하남에 오여춘(伍如春)이라는 노선생이 모택동에게 편지를 썼다. 이 오여춘 선생은 호남장사제1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 모택동의 동창이다. 그들은 아주 사이가 좋았다. 모택동은 그를 혁명에 동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오여춘은 집안에 처자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가서 교사가 되었다. 오여춘의 편지에서 집안의 생활이 곤란하다고 하면서 시를 하나 썼다: "운아조아지배수, 배수언능구차신(雲兒助我只杯水, 杯水焉能救車薪)" 모택동은 그 편지를 본 다음 바로 편지로 답장을 보냈다: "인민폐 300만위안을 보낸다. 한잔 물로 생각하라" 이 300만위안은 인민폐 구화폐이므로 실은 300위안이다. 편지에서 언급한 "운아"는 오여춘의 아들인 오운보(伍雲甫)이다. 그는 장정에 참가한 노홍군이다. 해방후에는 위생부 부부장등의 직위에 있었따. 오여춘의 편지때문에 모택동은 1955년 춘절에 오운보를 만났을 때, 왜 고향에 돈을 부치지 않느냐고 나무랐다. 오운보의 아들이 일찌기 국가체육위원회 주임을 지낸 바 있는 오소조(伍紹祖)이다.
3. 1956년 8월 11일, 모택동은 나철 열사(호남 주주 사람. 1920년대에 모택동을 따라 농민운동을 했음)의 처인 조운방에게 회신을 보낸다. 회신에서 "나철은 당을 위하여 힘들게 일했다. 내가 증인이다. 당시에 다른 문건은 없다. 구휼금을 누가 받을 것인가의 문제는 현지정부가 결정하면 된다. 만일 아들에게 주고, 딸에게 주지 않기로 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이것을 가지고 다투지 말라. 분묘는 가족들이 관리해라. 이제 300위안을 보내니,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나중에 무슨 곤란한 사정이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면 방법을 강구해보겠다."
4. 1957년 5월, 모택동과 양개혜는 옛날의 보모인 진옥영의 딸 손연(학명 손패군)이 편지를 써서 모택동에게 초중을 졸업한 후 상급학교진학문제를 도와달라고 한다. 그해 6월 8일, 모택동이 답신을 보낸다: "패군동지: 5월 6일의 편지는 받았다. 이미 초중을 졸업했다니, 아주 다행스럽다. 상급학교진학문제는 내가 학교에 서신을 보내기는 부적절하다. 합격하고말고는 학교에서 결정하여야 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면, 집에서 공부하면 된다. 300위안을 너의 모친에게 보낸다. 이후에도 조금 더 보낼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모택동."
5. 1962년 2월, 모택동의 전며느리(모안영의 청) 유사제가 공군비행사 양무지와 결혼한다. 혼례를 거행할 때, 모택동은 친필로 <<삼타백골정>>등을 써서 보내고, 300위안을 부친다. "나는 길거리에 나가지 않다보니, 어떤 것을 사면 좋을지 모르겠다. 너희가 필요한 것을 사서 선물로 삼아라."
6. 1962년 7월, 장사시 세무국간부인 장인개와 호북재정전과학교 교수인 장인척이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에게 부친 장유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적었다. 모택동은 호남성립제일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 장유진이 이 학교에서 수학교수로 있었다. 7월 19일 모택동이 답신을 보낸다: 유진 선사께서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애도의 뜻을 표한다. 모택동" "별도로 부의금을 보내니 장례비용으로 써라." 이번에 모택동이 선사의 죽음앞에 보낸 부의금도 300위안이었다.
7. 1972년 12월, 복건성 보전현 성교공사 소학교의 교사인 이경림이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의 아이중 농촌의 인민공사에 가서 일하는 아들이 생활이 곤란한데도 부친으로서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서신을 보고, 중남해에 틀어박혀 밖으로 잘 나가지 않던 모택동의 마음이 움직였고,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렸다. 모택동이 나중에 스스로 한 말에 따르면, 이 서신은 아주 잘 썼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곳에 여러 달을 두고 자주 보았다. 세번 반이나 보고나서야 비로소 답신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73년 4월 25일에 모택동은 이경림에게 회신을 보낸다: "이경림 동지, 300위안을 보내니, 무미지취(無米之炊)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 전국에 이런 일이 아주 많다. 당연히 통합하여 해결해야 할 것이다. 모택동" 이경림의 집안에서는 지금도 엎드려 모주석에게 서신을 쓰던 대나무탁자를 보존하고 있다. 모택동이 그에게 부쳐준 300위안은 현지의 예금소에 예금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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