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CC
만일 1976년 9월 13일의 각 신문을 찾아본다면, 모택동의 영구를 지킨 사람의 명단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마지막에 쓰여진 낯선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맹금운.
바로 이 보통여자 맹금운이 일대의 개국원수를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모택동의 팔십여년의 비범한 인생중에서 최후의 489일을 함께 보냈고, 모택동의 인생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한 입회인인 것이다.
아주 평범한 한 여자가 아무런 배경도 없이 어떻게 모택동의 말년에 기적처럼 그의 곁으로 갈 수 있었을까? 우연일까? 기회일까? 인연일까?
"영수"를 처음 만나다
맹금운은 후베이(湖北) 아가씨이며, 1948년 출생이다. 모택동이 만든 공화국과 거의 같은 나이이다. 12살때 공정(空政) 문공단(文工團)에 들어간다. 1963년 4월, 맹금운은 아직 15살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날씬한 몸매, 새하얀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특히 두 눈은 물처럼 깨끗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중남해'를 드나드는 임무를 맡게 된다.
당시, 중남해에서는 자주 중앙지도자들을 위하여 무회(舞會)를 개최했다. 거의 매주 한, 두번은 있었다. 군대 문공단은 정치심사가 필요없고, 데려오기 편하며, 아가씨들도 젊고 예쁘기 때문에, 자주 중남해로 가는 임무를 맡았다. 문공단에서 자주 참석하는 배우들이 점차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고 혹은 공연에 바쁘다보니, 상부에서는 어린 배우들에게 견습하도록 시켰다. 맹금운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첫번째로 중남해에 드나드는 임무를 맡았을 때, 맹금운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긴장, 흥분, 호기심, 그리고 겁도 났다. 어느 토요일의 오후 맹금운은 7,8명의 문공단원들과 일찌감치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저녁 6시, 그녀들은 중남해에서 보내온 지프차를 탔다. 가는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각자의 심정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따. 차는 북문을 통하여 중남해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중국인들이 궁금해하면서도 넘을 수 없었던 신비의 붉은 담장의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가씨들은 한 옛건물의 문앞에서 내렸다. 길다란 복도를 따라서 조용히 걸어갔는데, 돌연 커다란 붉은 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3개의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춘우재(春藕齋). 그녀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맹금운은 극도로 긴장해서 눈이 목마른 것처럼 이곳 저곳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가 상상하던 '수정궁'이 이나었다. 더더구나 고궁의 금란전과 같지도 않았다. 이곳은 그저 조용한 대청이고, 빛은 부드럽고 사방에는 쇼파와 의자가 깨끗하게 놓여 있었다. 대청은 원래 전형적인 중국의 고건축물이다. 그러나 내부장식은 현대식이었다. 각종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등장식, 폭포와도 같은 흰색의 커튼, 은은한 빛을 내는 황색바닥...이 모든 것이 신기했고,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친근했고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맹금운은 몰래 주위를 둘러본다. 목마른 어린 양이 이슬을 마시듯이...기다리면서 구경했다. 그녀의 원래 두근거리든 마음은 점차 가라앉았다. 개략 7시가 넘어서, 문공단의 아가씨들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기립했다. 주덕, 유소기등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기적처럼 맹금운의 눈앞에 나타났다. 나이든 배우들은 맹금운처럼 처음 온 아가씨들을 주덕등 지도자들에게 소개했다. 주덕은 아주 친근했다. 맹금운은 전쟁터를 질타하던 이 개국원수와 악수를 하면서도 전혀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다. 무회는 조용히 시작되었따. 맹금운과 같은 어린 무도전문가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조용히 각 지도자들의 독특한 춤동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유소기와 왕광미는 아주 경쾌했고, 숙련되어 보였다. 그러나 주덕은 머리를 들고 가슴을 내밀어 마치 훈련하는 것같았다.
개략 10시경이 되자 무도회장의 사람들이 속속 자리에서 일어났고, 음악은 중단되었다. 모택동이 온 것이다. 맹금운은 멍하게 그 곳에 서 있었고, 주변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고, 스스로도 잊어버렸다. 그녀는 이 사람이 바로 모택동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태양이 떠오른다. 중국에 모택동이 나타났다..."는 바로 그 모택동이라는 말인가? 그가 바로 그 "대구성(大救星)"이라는 말인가? 그는 나와 현재 2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이 모든 것은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확실히 눈앞에서 벌어진 사실이다. 모택동은 아주 편하게 입어서 뚱뚱했지만 중산복이 편안해 보였다. 음악곡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 문공단의 나이든 배우가 모택동의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고 춤을 요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모택동은 바로 알아듣고 몸을 일으켜 그녀와 춤을 추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들을 따라갔다.
"붉은 담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을 발칵 뒤집어버렸다. 중남해의 무회도 철저히 중단된다. 맹금운은 그저 문혁초기에 몇몇 '소장'들과 주석을 찾아가서 다른 일파가 '홍기를 들고 홍기를 배반한다'고 고발하면서 한번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공군내에 아주 술수가 뛰어난 인물이 있어서, 자신이 나중에 반혁명으로 몰리게 될 줄은.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그녀는 체포되어 5년간 노동개조를 당한다. 1973년에야 맹금운이 돌연 석방된다. 그리고 무한군대의원에 배치된다. 무용수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원이 된 것이다.
무한으로 돌아온 맹금운은 이미 25살의 노처녀가 되었다. 인물이 뛰어났던 맹금운을 따르는 남자들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한다. 그러나, 맹금운은 일하고 생활하면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신이 문화대혁명때 체포된 사실을 얘기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그녀는 왜 돌연 출옥할 수 있었을까? 왜 다른 동료들보다 대우가 낮을까? 여러가지 현상들은 맹금운의 인사자료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맹금운은 동분서주하면서 자신의 청백함을 되찾으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북경에서 이전의 '전우'인 소려(小麗)를 만난다. 원래 소려는 모택동을 만났을 때 맹금운의 처지를 얘기한 바 있고, 모택동이 '최고지시'를 내려 공정(공군정치부)에 그녀를 풀어주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소려는 모택동의 '손님'이 되어 있었고, 자주 중남해로 가서 주석을 만났다. 소려가 이끌어주는 바람에, 맹금운은 다시 한번 이전보다 더욱 신비해진 붉은 담장을 넘을 수 있게 된다.
"저는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1975년 5월 공군복장을 입은 모택동의 '손님' 소려는 육군복장을 입은 간호사 맹금운을 데리고 봉건시대에 '자금성벽'이라고 불렀던 곳을 들어간다. 당시에는 사회주의의 신비의 '담장'이었다. 맹금운은 다시 긴장하고 격동했다. 어쨌든 7,8년이 지난 것이다. 그리고 그 7,8년간에 천지개벽할 변화가 생겼다. 소려는 아주 담담했다. 그녀는 자주 오갔기 때문이다. 중국백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떻게 문공단의 어린 아가씨가 마음대로 수억인민들이 무한히 숭배하는 지도자의 거처를 드나들 수 있겠는가? 당시에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남해의 북면 경비는 쪽지를 장옥봉(張玉鳳)에게 보냈다. 그녀는 당시에 모택동을 만나려는 사람들의 소식을 모택동에게 전하거나 전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장옥봉이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는가? 당시에 기세등등하던 강청 즉 모택동의 정식부인도, 이 장옥봉에게 잘보여야 비로소 모택동을 만나볼 수 있었다. 현재 우리는 알고 있다. 장옥봉은 당시에 모택동의 "기요비서(機要秘書)"였다는 것을. 일국원수의 "기요비서"로서 그녀가 받은 교육과 전문훈련의 배경은 바로 주석전용열차의 승무원이라는 것이다!
장옥봉은 모택동에게 누가 찾아왔다고 말하고, 모택동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다. 맹금운은 겁먹은 얼굴로 여자친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들어가서 철문을 하나 지났다. 맹금운은 마침내 모택동의 곁에 온 것이다. 모택동의 기억력은 대단했다. 8년이 지났고,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겼었는가? 그리고 이미 팔십여세이다. 그런데도 그의 머리 속에는 맹금운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금운은 흥분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주석, 저는 후베이에서 온 맹금운입니다." "기억한다. 네가 바로 나와 고향이 반쯤은 같지 않느냐?" "주석 저는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녀 자신조차 믿기 힘들었다 이 말이 입밖으로 나올 줄은. 모택동은 맹금운의 손을 잡아끌며, 가볍게 어루만져주었다. 그는 다시 손으로 맹금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모택동은 이때 백내장을 앓고 있어서, 그저 한쪽 눈만 시력이 약하게 남아 있었따. "네가 오랫동안 나를 찾아오지 않더니, 나를 보자마자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는구나. 그게 방법이 없더냐." "제가 어찌 찾아오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저 올 수 없었습니다." 맹금운은 자신이 체포되고, 노동개조를 받은 경력을 하나하나 얘기했다. 모택동은 진지하게 들으면서, 맹금운의 손을 붙잡고 어루만졌다. 점점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 말할 것 없다. 네가 왔으니, 뭐든지 하기 좋게 되었다. 네가 여기에 남아서 일을 해라." 맹금운은 모택동의 돌연한 말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주석의 거처에 남아서 일한다니 그게 가능한가? 자기가 그래도 되는 것인가? "저는 억울함을 풀려고 왔습니다. 제 인사자료에 분명히 불리한 내용이 있는 것같습니다." 맹금운은 얼른 화제를 원래 찾아온 목적으로 돌렸다. "네가 내 곁에서 일하면 그게 바로 억울함을 푼 것이 아니냐. 너는 나의 딸이고, 친구이다." 일은 이렇게 이상하게 풀려갔다. 맹금운은 중남해로 들어왔고, 모택동의 생명에서 마지막 길을 지킨 간호사가 되었다. 이것ㅇ느 1975년 9월 24일의 일이다.
몇 달이 흘렀다. 맹금운은 여전히 마음 속으로 자신이 명예회복되었는지를 안심하지 못했다. 모주석은 이미 나이가 많고, 맹금운은 자신의 후일이 더욱 걱정되었다. 하루는 모택동에게 자신의 우려를 말했다: "주석, 내 생각으로 내 문제는 그래도 서면으로 해결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석의 말씀만으로는 누가 증명해주겠습니까." "아직도 마음 속에 걱정하고 있는거냐. 말은 맞다. 말만이라면 증거가 되지 않겠지. 그러나, 나의 인사기록에도 여러가지 불명예가 씌워진 적이 있다. 아무도 나를 위해서 억울함을 풀어준 적이 없다. 그 불명예는 날개는 없지만 날아가 버렸다." "당신은 주석이 아닙니까. 나는 뭡니까?.." "그건 쉽다. 왕동흥을 찾아가면 된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맹금운은 서면으로 된 명예회복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한 보통 노인
모택동의 최후를 지킨 간호사 맹금운의 기억 속에, 1954년부터 모택동이 1976년에 사망할 때까지, 모택동의 위생의사를 22년간이나 지내고, 다른 사람들이 "여우얼굴"이라고 부르던 이지수(李志綏) 의사가 서방에서 발표한 회고록에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한 가지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그것은 바로 장옥봉이 모택동을 "개(狗)!"라고 욕한 것이다.
맹금운의 기억에 따르면, 그날 그녀는 잠을 잔 후에 장옥봉의 뒤를 이어 근무했다. 막 주석의 침실입구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꺼져!" 맹금운은 주석이 크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목소리는 높고도 가늘었다. 분명 있는 힘을 다하여 내지른 것이었다. "꺼지라면 꺼진다. 나를 못가게 막는 놈이 있으면 개새끼다." 맹금운은 장옥봉의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아주 흥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나를 개라고 욕하다니, 너..." 주석은 화가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맹금운은 여기까지 듣고는 들어가야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녀는 긴장했고, 호기심도 있었다(맞다. 일반 사람이으로서 당연히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
이지수의 회고에 따르면, 1975년 6월 10일, 이지수와 천진의학원 원장인 주헌이, 북경의원 내과주임 도환락이 모택동의 병세를 진찰했다. 그들이 들어가자, 모택동은 뭐라고 한참을 중얼거렸다(당시 모택동이 하는 말은 이미 불명확했다). 장옥봉은 번역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화가나서,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굴렀다. 장옥봉은 그제서야 진상을 설명했다. 원래 6월 8일, 장옥봉이 외출을 나갔다. 모택동이 문건을 읽으려는데, 한참을 기다려서 비로소 장옥봉이 돌아왔다. 모택동은 화가나서 쪽지를 썼다: "장옥봉. 꺼져라!" 장옥봉도 모택동에게 욕으로 화답했다: "내가 꺼지지 않으면 네가 개다" 모택동이 말했다: "내 성격도 못됐지만, 장옥봉은 더 못됐다. 그녀가 나를 욕했다." 주헌이와 도환락은 모두 처음 온 것이어서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장옥봉이 곁에서 말했다. "그런 말을 의사들에게 하다니, 뭐하는 거냐."
맹금운은 장옥봉과 달랐다. 그녀가 보기에, 모택동도 사람이다. 화를 잘 내는 노인이다. 그도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싸우고 화를 낸다.
맹금운이 기억하기로 1975년 여름, 그녀가 모택동의 곁으로 온지 4개월후, 그녀에게 아주 친절하던 모택동이 갑자기 차갑게 태도가 바뀌었다. 맹금운은 여러번 그와 얘기하고자 했지만, 모택동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흔들어 나가라고 손짓했을 뿐이다. 귀찮아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주석이 과거에는 저러지 않았는데. 이야기도 잘해주고,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맹금운이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옥봉에게 물어보았더니, 모택동이 장옥봉에게 말해주었따. 모택동의 방안은 아주 조용한데, 맹금운이 방에 들어올 때 전혀 소리가 나지않고, 그녀가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나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아마도 팔십이세 노인의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장옥봉은 맹금운에게 다음부터 방에 들어갈 때는 먼저 약간 소리를 내라고 했다. 헛기침을 한다든지,...그래야 모택동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모택동의 마지막 순간
중국고대에 "하늘에 별이 하나 있으면, 지상에 등이 하나 있다(天上一顆星, 地上一盞燈)"라는 말이 있고, "유성이 떨어지면, 등이 꺼지고 사람이 죽는다(流星隕落, 燈滅人亡)"라는 말도 있다. 중국의 윤달에는 "윤칠월은 괜찮아도 윤팔월은 안된다. 윤팔원은 칼로 죽인다"는 말이 있다. 첫번째는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두번째도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역사의 수치를 통계내보면, 아마도 놀랍게도 윤8월에 '천재지변이나 재앙'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 "오호란화(五胡亂華)"까지는 얘기할 것도 없고, 가까지 가장 놀라운 때는 1976년(윤팔월이 있는 해)이다. 3월 8일에는 동북 길림에 세계역사상 드물게 보는 운석우가 내렸고, 그중 3개는 100킬로그램을 넘었다. 가장 큰 것은 1770킬로그램에 이르렀다. 이는 미국이 보관하고 있는 세계최대의 운석중량 1078킬로그램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해에, 주은래, 주덕과 모택동이 연이어 세상을 뜬다. 역시 같은 해, 7월 28일에는 당산대지진이 일어나서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중국의 역법은 월력이다. 지구와 달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계산한 것이다. 그들간의 상호위치는 직접 조수간만을 통제하고 기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지각의 구조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중국의 일부 주장은 경험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다. 과거에 우리가 말한 역사상 오랑캐들이 중원을 침입한 것이나 세계역사상 낙후민족이 문명대국을 침입한 것이나, 역사상 일부 민족대이동은 모두 기후의 극렬한 변화와 관련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자연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 길을 찾아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역법은 아마도 이러한 변화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노인, 병자들은 당연히 이런 변화에 민감하다. 이것은 추리라고 할 수도 있고, 추측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맹금운이 회고에 따르면, 그날 그녀가 모택동에게 운석우에 관한 소식을 읽어주었다. 모택동은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다 듣고 난 후에, 그는 맹금운에게 잠시 가만있으라고 하더니, 그를 부축해서 창가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는 석양에 지는 하늘 끝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넋이 나간 듯이 보였다. "주석, 하늘에서 왜 그렇게 많은 돌맹이를 떨어뜨렸을까요? 이상하지만, 사람은 다치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상 여러번 나타난 일이다. 역사기록에 분명히 기록된 것만도 적지 않다. 야사에는 더욱 많다." 주석은 이어서 더 말했다. "중국에 '천인감응'이라고 부르는 일파가 있다. 길할 때는 길조가 있고, 흉할 때는 흉조가 있다. 천지가 요동을 치면 하늘에서 돌맹이가 떨어진다. 그것은 곧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다. 삼국연의의 제갈량, 조운이 죽을 때도, 모두 돌맹이가 날아와서 깃대를 부러뜨렸다. 대인물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죽을 때도 끽 소리를 내고 죽는 것이다." 맹금운이 말했다. "그것은 모조리 미신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겁니다. 그걸 정말 믿습니까?" 모택동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고대인들이 왜 그런 걸 날조해야 했을까?" 이게 대답인가? 질문인가?...
주은래가 죽었을 때, 모택동의 반응에 대하여, 맹금운에 따르면, 그날 맹금운이 당번이었다. 총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주석에게 전했다. 그녀는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모택동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에 모주석이 다시 잠을 잤고, 정신이 비교적 맑았다. 맹금운은 그제서야 모택동에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모택동에게 신문을 읽어줄 때, 그녀는 돌연 큰 소리로 주은래총리가 서거한 소식을 읽었다. 모택동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뺨, 입가, 목까지 흘러내렸따. 주은래의 추도회전에, 산소주머니, 휠체어까지 모두 준비를 해놓았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병이 다시 발작하여, 앉을 수도 없게 되어, 그에게 참가할 것인지 여부조차 물을 수가 없었다.
맹금운의 회고에 의하면, 모주석은 먹는데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면 먹었지, 의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모택동은 스스로 말했다. 그는 먹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신체가 어느 정도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택동은 그 자신도 왜 그런지 모르겠따고 했다. 여기에는 분명히 현재 잘 알지 못하는 매커니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의학, 과학이 아직 잘 모르는 것도 많다. 그렇지 않다면 왜 연구를 계속하겠는가? 그는 의사의 말은 기껏해야 절반 정도만 믿었다. 이지수도 유사한 내용을 말한 바 있다. 당연히 서술하는 입장이야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지수도 인정한다. 마지막에도 모택동의 두뇌반응은 아주 민첩했다는 것이다. 미중문제에 대하여도 그랬고, 나중에 화국봉을 임명할 때도 모택동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응급조치를 받을 때 결정한 것이다.
맹금운에 따르면, 모택동이 마지막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정치국의 구성원들이 침대곁을 둘러쌌다. 섭겸영이 다가왔을 때, 모택동의 입술이 잠깐 움직였다. 맹금운은 오랫동안 모택동을 모셨기 때문에 모택동이 뭔가를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섭검영에게 말했다. 섭검영이 다가가서 모택동의 손을 잡았다. 모택동이 입을 열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9월 8일 저녁 7시 10분, 모택동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맹금운에게 말했다: "견디기 힘들다. 의사를 불러와라." 그리고는 혼절했다. 이것이 마지막 말이다. 그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1976년 9월 9일 0시 10분, 모택동의 심전도는 평평한 직선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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