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금융

HSBC의 매판(買辦)들

중은우시 2008. 9. 25. 14:25

글: 하품(何品)

 

근대중국에 설립된 외자은행에는 이런 중국인들이 있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사정에 밝으며, 인맥관계가 좋고, 투자에 뛰어나며, 인적관계망, 재력 및 신용을 바탕으로 상류사회에 끼어들어가, 외국상인, 본토금융업, 정치계와 어울리면서, 그 사이에 거액의 수입을 얻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로 매판(買辦)이다. 매판의 업무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매판의 주요 업무는: 현금금은의 감정, 출납과 보관; 외환거래매매의 중개; 어음정산; 시장현황 및 신용조사등. 조직기구로 보자면, 매판은 외자은행의 출납부서에 해당한다; 부담하는 책임을 보면, 담보인과 비슷하다; 업무경영으로 보자면 그들은 외자은행에서 활동하는 중개인이나 대리인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니, 이 일의 리스크와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구중국의 매판계층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나왔다. 그중에는 관직이 2품에 이르렀던 석정보(席正甫), 명문가출신인 하세광(何世光, 마카오 카지노왕 何鴻粲의 부친), 그리고 나중에 유명한 양무관리이자 실업가인 당정추(唐廷樞)가 있다.

 

상해 HSBC(匯豊)의 매판

 

상해회풍은행의 주요업무는 역대이래로 영국인과 다른 백인들이 담당했다. 초기에 회풍에서 일한 중국인들은 그저 잡일만 처리했었다. 나중에 중국인들이 직원으로 승격되기는 했지만, 그저 기장, 문서이기같은 간단한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서양직원들과는 급여수준도 달랐다. 이러한 서양인을 우대하고, 중국인을 무시하는 전통하에서 중국인이 매판을 맡는 것은 실로 인연이 잘 닿아야 하는 일이었다.

 

상해회풍의 제1기 매판은 왕괴산(王槐山, 1865-1874)이다. 원래 상해 삼여전장에서 일을 했는데, 업무관계로 영국상회의 덕풍양행의 사장인 David McLean을 알았다. 1864년초, McLean은 회풍은행 상해분행을 개설하기 위하여, 영국에 돌아가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돈이 부족하여 왕괴산에게 2000냥을 빌려 귀국비용으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귀국하면 최소 6개월, 최대 9개월간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돌아오면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고 약속했다. 의리와 우정을 중시한 왕괴산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자기는 돈이 없으므로, 임의로 전장 고객의 예금에서 일부분 돈을 빼내어 McLean에게 건네준다. McLean은 한번 돌아가자 소식이 없고, 연말에 전장이 정산을 했다. 왕괴산의 횡령은 들통이 난다. 삼여전장의 주인이 그의 외삼촌이었지만, 업계관례에 따라 왕괴산은 제명당하고,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 길을 찾게 된다.

 

1865년, McLean은 상해로 돌아와서 회풍은행 분행의 경리(행장)를 맡는다. 왕괴산의 처지를 전해듣고는 미안하게 생각하여, 황급히 그를 상해로 불러 회풍의 매판을 맡긴다. 채용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아무런 담보금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괴산은 상해탄의 전장업계 고수들인 유효한, 진광연등을 그의 조수로 삼아 매판직을 맡는다.

 

McLean은 왕괴산을 아주 신임했다. 심지어 은행금고의 열쇠까지도 그에게 맡겼다. 전장출신인 왕괴산은 매판을 맡은 후에, 중국과 외국의 은행, 전장계의 사정을 잘 알았으므로, 회풍내에서 은냥과 은원을 매매하여, 돈을 많이 번다. 그의 활동을 통하여, 1869년부터 상해회풍은 중국전장에 돈을 빌려준다. 다른 외자은행도 여기에서 이익이 남는다는 것을 알고는 속속 전장과 관계를 맺었다. 내부자금조달업무가 이때부터 성행하게 된다. 나중에 왕괴산이 성공적으로 청나라정부를 위하여 회풍에 대출금을 신청하게 되고, 청나라정부의 재정상의 곤란을 해결해주게 되자, 그와 그를 대리하여 업무을 추진했던 석정보는 4품의 관직을 받게 된다. 이리하여 일약 '매판대인'이 되어버린다.

 

왕괴산은 근 10년간 회풍의 매판을 지낸다. 120냥의 월급여를 받아갔을 뿐아니라, 스스로 근 백만냥의 재산을 모으게 된다. 상해에 투자하여 전장을 개설하고, 전당포를 열었다. 그리고 고향인 여요에 수천무의 전답을 구매했고, 외자기업의 주식도 샀다. 그리하여 그는 회풍의 중국계대주주가 된다. 1874년, 욍괴산은 매판의 직무를 사임한다.

 

왕괴산이 사임한 후, 원래 그를 대리하여 일하던, 석정보가 후임자로 앉아 제2대 매판(1874-1904)이 된다. 석정보는 강소성 소주 동정동산(洞庭東山) 사람이다. 19세에 상해로 와서, 외삼촌이 개설한 전장에서 몇년간 일했고, 몇마디 절름발이영어를 배웠다. 나중에 스스로 전장을 하나 개설하였다. 1866년에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회풍으로 와서 일을 했다. 석정보는 일을 노련하고 원활하게 처리했다. 매판이 된 후 회풍의 고급관리직과 청나라정부사이의 차관에 관한 업무를 처리했고, 다시 상해도대(上海道臺)인 원수훈과 결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그리하여, 회풍과 청나라관리의 양측에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서양인의 앞에서 그는 관청과 의사소통하는 대변인이고, 관청에서는 그가 다시 대사를 도모할 수 있는 양무인재였다.

 

청일전쟁후, 청나라정부는 일본에 대한 거액의 배상금을 해결하기 위하여 외자은행에서 돈을 빌린다. 이때가 석정보의 전성기이다. 회풍과 덕화는 공동으로 청나라정부와 1896년 "영독차관"과 1898년 "영독후속차관"에 합의한다. 이로 인하여 그는 2품관직을 받고, 황마괘를 하사받아 "홍정매판"이 된다. 석정보는 상해에서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전장을 열고, 중국계 금융분야의 사람들과 '동산동정방'을 결성한다. 석정보는 회풍에서 매판을 30년이나 하였다. 그는 방대한 '매판세가'를 형성하였을 뿐아니라, 상해 내지 전중국의 재정금융계에서 혁혁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동시에, 석정보는 상해금융계의 관계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아주 실력있는 석씨집단이 이루어진다: 셋째동생 석진화는 유리은행의 매판이고; 조카인 석석번은 매커리은행의 매판인데, 나중에 화아도생은행의 매판이 된다; 매커리은행의 매판인 왕헌신은 그의 조카사위이다; 씨티은행의 매판인 왕준신도 왕헌신의 친동생이다; 일본 요코하마정금은행의 매판인 섭명재는 석진화의 사위이다. 이외에, 벨기에화비은행과 일본미쓰비시은행의 매판인 호기해, 호균뢰, 호균추부자도 모두 석씨집안의 친척이다.

 

부친이 죽으면 아들 혹은 친척이 승계하는 것도 매판업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1904년 석정보가 죽은 후, 장남인 석립공(席立功)이 상해회풍은행의 제3대 매판(1904-1922)이 된다. 석립공은 은행매판을 지낸 외에 6개전장에 투자하고, 은루와 금호 및 비단가게등을 경영하였다. 석립공은 유리은행에서 일하던 공자어(子漁)를 불러와서 조수를 삼았다.

 

석립공이 회풍의 매판을 맡은 후, 그의 보증품은 형제들의 공유여서, 수익문제로 자주 분쟁이 발생했다. 먼저 석립공은 매월 4형제에게 500냥의 은자를 주었는데, 나중에 동생들이 불만이었고, 재산분할을 요구했다. 1913년, 영국영사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회풍은행에 보증물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법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판결이 났지만, 가산은 그래도 나누게 된다. 당시 고역공관(회풍은행의 법률고문)의 매판인 광동사람 담해추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풍전장의 경리인 진일도와 함께, 석립공의 이름하에 보증품 15만냥은자를 넣고 동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석립공은 여전히 보증금의 액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기간동안 상해포동의 땅값이 뛰어오른다. 석립공은 이 기회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포동의 땅을 하나 팔아버린다. 그리고 68만냥의 은자를 얻어, 마침내 1918년 9월 담해추와 합의하여 동업계약을 그해 말로 종료시킨다.

 

1922년 석립공이 서거하자, 그의 아들인 석록생(席鹿笙)이 부친을 이어, 제4대매판(1922-1929)이 된다. 그런데, 상해탄에서는 석록생의 플레이보이라는 명성이 매판이라는 명성보다 높았다. 그가 매판을 맡은 후에 외국인을 만나면 자리를 피하고, 매일 매판사무실에서 앉아있을 뿐이었다. 실제업무는 부매판인 공자어가 다 처리했다. 공자어는 그가 석씨집안의 회풍에서의 자리를 빼앗아간다는 평을 받기 싫어하여, 회풍의 행장에게 요청하여, 두 사람이 공동으로 매판을 하고, 각각 절반씩의 보증금을 내는 것으로 하며, 이익도 절반씩 나눠가는 것으로 한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여러명이 동업을 하더라도 한 사람이 얼굴을 내미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1929년 12월 6일, 석록생이 향서채관에서 강도에 항거하다가 총을 받고 죽어버린다. 그의 아들은 어렸으므로, 석씨집안은 이미 3대나 내려온 회풍은행의 매판직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매판인 공자어가 매판으로 승진한다. 회풍은행의 당시 행장에게 매판이 피살되었다고 말하자, 행장은 공자어를 가리키며, "매판은 여기서 일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써 보더라도, 당시 석록생은 이미 외국인행장의 눈에 무시해도 좋을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제5대매판인 공자어(1930-1937)는 강소 오현 사람이다. 원래 영국상인 유리은행(有利銀行, Mercantile Bank of India)의 매판실에서 일했다. 유리은행이 1894년에 업무정지당하자, 호적란의 소개로 회풍에 와서 석립공의 조수를 맡는다. 그는 유리은행에서 넘어왔기 때문에, 회풍의 영국인들은 유리은행의 첫머리단어를 사용하여 그를 Mercantile이라고 불렀다. 그가 매판을 할 때, 나이가 이미 칠순이 넘었다. 몇년을 더 하지 못ㅎ고 병사했다. 그의 아들 공성오(星五)가 제6대 매판(1937-1941, 1945-1949)이 된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일본군이 상해공공조계를 점령하고, 상해회풍은 일본 요코하마정금은행에 승계되어 관리받는다. 영국,미국계직원은 대부분 붙잡혀가고, 중국계직원은 정금은행에 채용된다. 그리하여 공성오는 정금은행의 매판이 된다. 그는 일본의 세력을 빌어, 황금거래를 하여, 황금시장의 시세를 조종한다(공씨집안은 원래 영풍여금호를 개설하고 있었는데, 공자어의 동생인 공자범이 주재했다). 이리하여 큰 돈을 번다. 전쟁이 끝난 후, 요코하마정금은행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중국정부에 수용된다. 공성오는 비록 일본은행에서 일했지만, 영국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회풍은행이 상해에서 재개한 후에도 여전히 회풍은행의 매판을 맡는다.

 

1949년 상해해방전날, 공성오는 사직하고 남미로 떠난다. 매판의 직은 그의 조카인 공진방(振方)이 대리한다. 그는 나중에 제7대 매판(1949-1950)이 된다. 신중국이 건국된 후, 회풍의 업무의 중심은 중국대륙에서 국외로 옮겨진다. 중국내 업무는 대폭 축소되어, 공진방은 상해회풍의 마지막 매판이 된다.

 

홍콩 HSBC의 매판

 

홍콩회풍의 제1대 매판은 나백상(羅伯常, 임기: 1865-1877)이다. 오랫동안 장사의 전통이 있는 광주 황포에서 왔다. 나백상의 경제력은 풍부했고, 많은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다. 홍콩의 많은 외국보험회사와 중국전장, 은루, 상호, 조선업계의 사장이었다. 회풍은행이 설립될 때 돈을 투자하여 주주가 된다.

 

나백상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나학붕(羅學朋, 일설에는 羅學平)이 제2대 매판(임기: 1877-1892)이 된다. 부친의 명성에 의지하여, 나학붕은 회풍에서 더욱 큰 신임을 받는다. 그는 자주 보증인의 지위로, 전장을 회풍에 소개하여 차입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가 소개한 전장중에는 그가 사장으로 있는 곳도 있어서, 빌린 돈으로 투기활동을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나학붕과 청나라정부의 관계도 괜찮았다. 그는 나수숭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내어 후보도대(後補道臺)의 관직을 얻는다. 그리고 양광총독의 아문을 드나든다. 적지 않은 광주의 관리는 자기의 재산을 그에게 맡겨서 투기활동을 했다. 1882년, 그는 회풍의 총경리 잭슨(Sir Thomas Jackson)를 위하여 돈을 바치고 3품의 안찰사 관직을 얻는다. 다른 한편, 1883년과 1884년 양광총독 장수성은 두번이나 회풍에서 광동해방차관을 빌린다. 이것도 나학붕이 중간에서 중개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1892년 3월, 나학붕은 투기의 실패로, 회풍에 근 130만홍콩달러의 빚을 지고 황급히 도망친다. 동시에 회풍주주와 매판의 신분을 모두 잃게 된다. 그의 파산은 홍콩, 광주, 상해등 여러 전장과 상호를 연루시켰을 뿐아니라, 회풍도 할 수없이 300만홍콩달러의 준비금을 보충하여 그 해의 영업손실을 메꾸었다.

 

홍콩회풍의 제3대매판은 유위천(劉渭川, 임기 1892-1906)이고 제4대 매판은 유반초(劉伴樵, 1906-1912)이다. 모두 '매판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광동현 향산현(지금의 중산시) 사람이다. 향산은 지리위치가 마카오에 가까워 일찌기 몇세기전에 이미 포르투갈인들과 접촉이 있었다. 적지 않은 향산 사람들은 홍콩의 유명한 외상기업에서 매판을 하고 있었다. 이화양행의 매판인 당정추, 보순양행의 매판인 서윤, 태고양행의 매판인 정관응등이 그들이다. 서로간에 친척관계에 있는 유씨의 두 매판은 홍콩에서 방대한 가족관계를 가지고, 회풍의 매판사무실에도 상당한 친척친구가 있었다. 유위천은 카나다 밴쿠버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다. 회풍에 들어오기 이전에 신사손양행(E. D. Sassoon & Co.)에서 매판을 지냈다. 신해혁명후, 손중산이 고향 향산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유반초은 돈을 내어 중산기념정을 짓기도 하였다.

 

제5대 매판은 하세영(何世榮, 임기 1912-1945)이다. 그는 홍콩의 가장 혁혁한 하동(何東)의 가족이다. 하동은 이화양행의 매판사무실에서 조리로 들어갔는데, 이 때 나이가 18세였다. 몇년후에는 이화양행의 수석매판이 된다. 이어, 동생 하복(何福), 하감당(何甘棠)이 이화의 매판을 이어갔다. 하세용은 하복의 친아들이다. 나중에 자식이 없는 하동의 양자로 간다. 하세영은 원래 신사손양행에서 매판을 맡다가, 양부 하동이 제공한 30만홍콩달러를 담보로 회풍의 매판이 된다.

 

유럽과 아시아의 혼혈인 하동의 가족은 홍콩에 방대한 매판네트워크를 갖추었다. 하세영의 형제 여러명은 서로 다른 양행 또는 은행에서 매판을 맡았다. 장남 하세영은 회풍의 매판이고, 삼남 하세요는 유리은행의 매판이며, 사남 하세광(마카오 카지노왕 하홍찬의 부친)는 하세영의 뒤를 이어 신사손양행의 매판을 맡았고, 오남 하세량은 이화양행의 매판이었다. 하복의 또 다른 아들인 하세기는 이안향행(Arhnold & Co.)의 매판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이 홍콩을 점령한다. 홍콩회풍은행은 영업을 중단당하고 청산하게 된다. 하세영은 일본점령시기에 곤란을 겼고, 한때는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결국 1945년 홍콩해방후 병으로 죽게 된다. 하세영이 죽은 후, 원레 제2매판이었던 당종보(唐宗保)가 제6대 매판으로 승격한다(임기: 1945-1953). 1953년 당종보가 죽은 후, 제4대 매판 유반초의 외조카인 이순화(李純華)가 뒤를 이어 제7대 매판이 된다(임기: 1953-1965).

 

중국금융근대화가 심화되면서, 중국의 외자기업의 매판제도는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금융업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전쟁전의 은행분류장의 장부는 붓으로 썼으나, 전후에는 볼펜이나 만년필로 쓰고, 전쟁전에는 계산시에 주산을 썼는데, 전후에는 계산기로 바뀌었다. 매판제도가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언어장애였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계 직원이 날로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매판이 대중국무역에서의 필요성을 점차 상실한다. 지위도 점차 낮아진다.

 

1949년이후, 회풍은행은 중국대륙의 거의 모든 업무를 중단한다. 상해분행외에는 다른 대륙의 지점사무소를 모두 폐쇄한다. 그리고 홍콩과 해외에서 중국계와 서방인들이 사업하는 방식이 점차 슷해 졌다. 매판이 역할을 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1960년, 홍콩회풍은행의 "매판"은 "화인경리(華人經理)"로 명칭을 바꾼다. 중국인업무와 다른 국가 혹은 지역의 업무와 이미 구별이 거의 없어졌으므로, 5년후에 회풍의 첫번째 "화인경리"이자 회풍의 마지막 "매판"인 이순화가 은퇴한다. 이로써 매판제도는 회풍에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