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수당연의>> 영웅들과 역사원형 (I)

중은우시 2008. 6. 25. 01:00

작자: 미상

 

<<수당연의(隋唐演義)>>는 <<삼국연의>>다음으로 중국에서 유명한 연의소설이다. 여기에서살 살아움직이는 듯이 생생하게 등장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진경(秦瓊), 정교금(程咬金), 이원패(李元覇), 서무공(徐茂公), 나성(羅成)등의 이름은 중국사람이라면 모두 들어봤을 정도이다. 이들 영웅들은 역사상 대부분은 확실히 그런 사람이 있었고, 사적이 연의와 차이가 별로 없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차이가 큰 경우도 있다.

 

1. 진경(秦瓊), 자는 숙보(叔寶)

 

[연의]  수당연의의 주인공, 의협심이 강하고 재물을 아끼지 않는 사나이. 먼저 와강채의 대원수였다가 나중에 이당에 들어간다. 이세민 수하의 첫째, 둘째가는 대장이 된다.

 

[역사원형] 처음에는 수나라 장수 내호아(來護兒), 장수타(張須陀)와 함께 반란군을 진압하여, 용감한 것으로 이름을 날린다. 장수타는 와강채에 의하여 죽고, 진경은 수나라장군 배인기의 수하로 들어간다. 나중에 배인기를 따라 와강채에 투항한다. 와강채의 이밀이 패번하자, 진경은 다시 왕세충의 장수가 된다. 그러나 그는 왕세충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에 투항한다. 이때부터 이세민의 부장이 된다.

 

진경은 이세민을 따라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점차 진왕 이세민이 가장 믿는 장군이 되고, 익국공에 봉해진다(사후에 호국공이 됨). 현무문의 변때 진경은 이건성, 이원길을 죽이는데 가담한다. 다만, 이후에 병으로 고생하는데, 이전에 전투에서 얻은 상처때문이다. 정관12년(638년)에 병사하고 소릉에 배장된다. 화상은 능연각에 걸린다.

 

[평론] 진경은 대장부이다.

 

2. 정교금(程咬金) 자 지절(知節)

 

[연의] 수당연의의 또 다른 주인공, 외호는 "혼세마왕". 사람도 그 이름과 같이 엉터리없는 짓을 수도없이 벌인다. 와강채대마국의 국왕이었다가 이당에 투항하고, 자신의 소총명과 운을 바탕으로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일생동안 운이 좋아서 100여세까지 산다. 고조, 태종, 고종, 무측천, 예종의 여섯 황제를 모시니 수당영웅전의 제일복장이다.

 

[역사원형] 어려서부터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치다. 특히 말위에서 창을 쓰는데 뛰어나다. 나중에 이밀에 투항하고, 이밀의 최정예근위군을 통솔한다. 이밀이 패배하자, 정교금은 왕세충의 부장이 된다. 그러나, 정교금은 왕의 부하로 남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경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도망쳐서 진왕 이세민의 부하가 된다.

 

정교금은 이세민이 송금강, 두건덕, 왕세충등을 칠 때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숙국공(나중에 노국공으로 바뀜)에 봉해진다. 태자일당의 모함을 받아 진왕 이세민에게 먼저 손을 쓰라고 권한다. 현무문의 변이후에 계속 고관을 지낸다. 당고종 현경2년(657년)에 대군을 이끌고 서돌궐 아사나하로를 정벌한다. 그러나 투항한 적군을 도살하여, 인심을 잃어 결국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로 인하여 관직에서 파면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기용된다. 이때 정교금의 나이가 이미 많았으므로, 조정에 사직한다. 인덕2년(665년)에 병사하고 소릉에 배장된다

 

[평론} 오래 산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점이 없다.

 

3. 이원패(李元覇)

 

[연의] 수당의 제일가는 사나이. 손에는 두 개의 대추(大錘)를 들고 천하를 종횡한다. 유금당을 쓰는 오천석, 우문성도를 차례로 죽여서 하늘의 벌을 받아 벼락을 맞아 죽는다.

 

[역사원형] 이름은 이현패(李玄覇). 당고조 이연의 셋째아들. 다만 일찍 죽고, 후손이 없다.죽은 후에 위왕(衛王)에 봉해진다.

 

[평론] 요절한 사람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수당연의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것이다.

 

4. 나예(羅藝)

 

[연의] 원래 북제의 장군. 진경의 고모부이다. 나중에 양림에게 투항하여, '북평왕'에 봉해진다. "나가창(羅家槍)'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나중에 두건덕의 부장인 소정방의 화살에 맞고 죽는다.

 

[역사원형] 나예의 또 다른 이름은 이예(李藝)이다. 장군집안에서 태어났고, 활을 잘 쏘며, 전투에 용감했다. 수나라의 호비랑장이다. 북평을 지켰고, 사방의 적들을 연이어 격파했다. 마침 천하대란이 일어나 나예는 기회를 틈타 의거를 일으키고 북평을 점거하며, 스스로 유주총관을 칭한다. 우문화급, 두건덕, 고개도등이 차례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투항을 권하나, 나예는 아무도 따르지 않고, 이당에 투항한다. 당나라에서 연왕에 봉해지고 이(李)씨성을 하사받는다. 유흑달을 토벌할 때 나예는 적지 않은 공을 세운다.그러나, 그는 공을 믿고 자만하고, 오만하며 무례했다. 그리하여 면직되기도 한다. 나중에 돌궐이 자주 침입하므로 나예는 다시 기용되어 경주를 지킨다. 태종이 즉위한 후 나예는 태자 건성의 일당이어서 박해받을까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켜 유주를 점거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부하장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평론] 나예가 원래 태자 건성의 일당일 줄 누가 생각했으랴?

 

5. 나성(羅成)

 

[연의] 수당의 일곱째 사나이. 나예의 아들. 진경의 사촌동생. 영준하며, 무예가 뛰어나다. 스스로 눈이 높다. 천하제일무장원을 얻었고, 나중에 당나라에 투신하여 당나라군의 제일용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다. 혼자서 팔대반왕을 생포하고, 나중에 태자건성, 제왕원길의 모함을 받고, 소정방의 계교에 걸려 화살을 무더기로 맞고 죽는다.

 

[역사원형] 나예에게 아들은 있으나, 사서에 사적을 남기고 있지 않다.

 

[평론] 또 하나의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6. 시소(柴紹)

 

[연의] 이연의 사위. 연의에서 백면서생의 이미지.

 

[역사원형] 시소의 조부, 부친은 모두 고관이다. 유년기에 튼튼하고 용감하기로 관중에 이름을 떨친다. 이연은 그리하여 딸을 그에게 준다. 이연이 거병하자, 시소는 마군총독이 된다. 임분으로 내려가고, 강군을 평정하며, 수나라장군 송노생, 상현화를 격파하여 전공을 세운다. 당나라군이 장안을 함락시킬때까지 공을 세운다. 이후 시소는 진왕 이세민을 따라 설거,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등의 반왕을 평정한다. 곽국공에 봉해진다. 토곡혼, 당항이 침입해오자, 시소는 군대를 이끌고 대파한다. 정관2년, 양사도를 하주에서 격파한다. 정관12년(638년)에 병사한다.

 

[평론] 당나라군대의 용장이 졸지에 닭잡을 힘조차 없는 서생으로 변모했다. 연의에서의 시소에 대한 예술적가공은 과장이 심했다.

 

7. 위지경덕(尉遲敬德)

 

[연의] 수당연의 후반기의 주인공. 원래 유무주의 부장인데, 나중에 당나라에 항복한다. 이세민수하에서 진경과 나란히 이름을 떨치는 용장이다. 여러차례 진왕을 위난에서 구해주고, 현무문의 변에 공을 세운다. 나중에 설인귀를 구하기 위하여 조문(朝門)에 부딪쳐 죽는다.

 

[역사원형] 원래 유무주의 수하장군. 창을 피하고, 창을 빼앗는데 능숙하다. 유무주가 패망한 후, 당나라에 항복한다. 왕세충을 정벌할 때 참여한다. 일찌기 용장 단웅신에 도전한 바 있다. 나중에 유흑달, 서원랑을 정벌할 때 참가하고, 진왕을 포위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현무문의 변에 위지경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진왕에게 먼저 손을 쓰도록 권하고, 나중에 현무문에서 제왕 원길을 쏘아죽임으로써 큰 공을 세운다. 나중에 이세민은 제왕부를 위지경덕에게 상으로 내린다.

 

당태종 즉위후, 위지경덕은 오국공(나중에 악국공)이 된다. 장손무기, 방현령, 두여회와 함께 조정을 장악한다. 다만 위지경덕은 공로가 높음을 드러내어 자주 여러 신하들을 모욕했다. 나중에 외지로 쫓겨난다.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위지경덕은 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위지경덕은 만년에 미신을 믿어 문을 걸어닫고 나오지 않기를 16년간이나 한다. 고종 현덕3년(658년) 위지경덕은 7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소릉에 배장된다.

 

위지경덕에게는 위지보림이라는 아들이 있다. 이는 연의와 일치한다.

 

[평론] 위지경덕의 도덕수준은 정말 별로였다.

 

8.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

 

[연의] 설가장의 반면인물. 여러차례 설인귀를 모함하고, 결국 악의 보답을 받는다.

 

[역사원형] 이도종은 배분으로 따지면 이연의 숙부이다. 다만 나이는 이세민과 비슷하다. 17세때 전투에 참여하고, 이세민에게 유무주의 군을 대파할 계책을 바친다. 이후 두건덕, 왕세충과의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운다.

 

당고조 무덕5년(622년), 이도종은 영주총관이 되어 양사도의 반군과 돌궐군을 연파한다. 그리하여 땅을 천리나 넓힌다. 태종 정관3년(629년)에 이정과 함께 동돌궐을 격파하고, 힐리가한을 붙잡는다. 이후 이정과 토곡혼을 대패시켜, 큰 공을 세운다. 다만 정관12년(638년)에 이도종은 탐관오리로 파면된다.

 

1년후, 이도종은 다시 조정에 기용되어, 고구려를 치는데 참가한다. 이정과 함께 당나라군대의 선봉이 된다. 많은 전공을 세우고, 태종에게 고구려의 후방을 기습할 계책을 낸다. 아쉽게도 채택은 되지 않는다.

 

정관21년(647년) 이도종은 은퇴를 신청한다. 고종영휘4년, 이도종과 관계가 좋지 않던 장손무기, 저수량은 방유애 반란을 이용하여 이도종을 모함한다. 그리하여 그는 상주로 유배하고 유배길에 죽는다. 나중에 장손무기, 저수량이 쫓겨난 후에 이도종은 명예를 회복한다.

 

이도종은 만년에 학문을 좋아했고, 현사들과 교류했다. 세력으로 남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종실에서는 이효종과 함께 명성이 높았다.

 

[평론] 이도종은 일대의 명장이다. 그런데, 연의에서는 악착같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어, 아쉬운 점이 남는다.

 

9. 서무공(徐茂公)

 

[연의] 와강채의 군사. 제갈량과 같은 반신선급의 인물.

 

[역사원형] 서세적(徐世績), 자는 무공(茂公). 나중에 이씨성을 하사받는다. 고종조때 태종의 이름을 피휘하여 "세적(世績)"을 "적(績)"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후세에는 "이적(李績)"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적은 수나라말기의 난세중에 일찌기 한 지방을 차지하고 있다가 나중에 와강채의 이밀에게 의탁한다. 이밀에게 여양량창을 차지할 계책을 내고, 양창을 털어 곡식을 나눈다. 이리하여 와강채는 10일만에 20만으로 병사가 늘어난다.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하자, 이적은 좀있다 당나라에 투항한다. 서국공(나중에 영국공)의 작위를 받는다. 이밀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피살되자, 이적은 그를 위하여 장사를 지낸다.

 

두건덕이 여양을 공격할 때, 이적은 어쩔 수 없이 투항한 적이 있다. 오래지 않아 되돌아와 진왕의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당나라에서 두건덕, 왕세충과 싸울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나라군대의 지위는 진왕 이세민의 바로 아래였다. 나중에 서원랑의 반란을 진압하고, 서원랑을 붙잡아 참한다.

 

무덕7년(624년) 이적은 이효공과 남방의 반왕 보공탁을 토벌하러 간다. 그이 부장 진정통, 풍혜량을 대파하고, 보공탁을 붙잡아 참한다. 다음 해에 병주에서 돌궐군을 대파한다.

 

당태종이 즉위하자, 이적은 이정과 동돌궐을 기습할 계획을 세운다. 이적은 이정의 후방을 담당하여 힐리가한의 퇴로를 차단한다. 정관15년(641년)에 다시 설연타부를 대파한다. 이적은 병을 않았는데, 당태종은 스스로 수염을 잘라 그의 약방으로 삼게 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이적은 군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운다. 정관20년(646년) 다시 설연타를 격파한다. 태종이 임종시에, 이적이 난을 일으킬까봐 두려워, 고의로 그를 경성에서 내보내 시험한다. 이적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바로 경성을 떠난다. 고종이 즉위한 후 다시 그에게 중임을 맡긴다. 이적은 눈치를 잘 살폈고, 적시에 무측천의 편에 선다. 그리하여 조정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종 건봉원년(666년), 이적은 당나라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한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최후의 일전이다. 결국 당나라군은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고구려를 평정한다. 다음 해에 병사한다. 당고종의 묘에 배향되고, 그의 묘앞에는 음산, 철산을 상징하는 구릉이 있다. 이로써 돌궐과 설연타를 정벌한 공적을 기렸다.

 

이적의 손자인 서경업(이경업)은 무측천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피살되는데 이때 서씨는 이씨사성을 박탈당한다. 이적의 묘도 파헤쳐진다.

 

[평론] 이적은 정치적으로 '지다성(智多星)'이라는 칭호에 부끄럽지 않다.

 

10. 소정방(蘇定方)

 

[연의] 원래 두건덕의 부장인데, 문무를 겸비했다. 나예, 나성부자를 계교로 살해하고, 이로부터 나씨집안과 원한을 맺는다. 나중에 당나라에 투항하고 결국 나씨집안의 후예에게 피살된다.

 

[역사원형] 원래 두건덕, 유흑달의 부장인데, 용감하고 전투를 잘했다. 두건덕 유흑달이 패망하자, 소정방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정관초년, 소정방은 당나라조정에 다시 기용된다. 이정을 따라 동돌궐 힐리가한을 기습한다. 고종 초년, 소정방은 정교금을 따라 서돌궐 아사나하로를 정벌하는데 좋은 계책을 많이 낸다. 다만 정교금이 받아들이지않아, 당나라군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다음 해, 조정은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다시 아사나하로를 정벌한다. 당나군은 서돌궐을 대파하고, 아사나하로를 생포한다. 소정방은 형국공에 봉해진다. 나중에 서역삼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정방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평정한다.

 

당고종 현경5년(660년) 소정방은 69세의 고령에도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 일본군을 연파하고, 백제왕과 태자를 생포한다. 소정방은 세나라(동돌궐, 서돌궐,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군주를 모두 생포했다. 당나라의 상승장군이다. 건봉2년(667년)에 병사하니 나이 76세이다.

 

[평론] 연의에서 왜곡된 위대한 인물이다.

 

11. 고산왕(山王) 양림(楊林)

 

[연의] 수양제의 숙부, 수당의 여덟째 사나이. 수나라병권을 총괄한다. 사람됨은 정직하고 공평무사하다. 비록 진경등 영웅을 높이 평가하지만, 수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여, 천하의 대세를 되돌리고자 한다. 나중에 나성의 회마창에 찔려 죽는다.

 

[역사원형] 이름은 양상(楊爽)인데, 수문제 양견의 이복동생이다. 위왕(衛王)에 봉해진다. 어려서 양견의 처인 독고씨에게 길러지고, 이로 인하여 수문제의 총애를 받는다. 3번이나 수나라군을 이끌고 북벌하며, 돌궐 사발략가한을 대파하여, 새북에 이름을 떨친다. 양상은 용모가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절도가 있어 명성이 아주 좋았다.

 

수문제 개황7년(587년)에 양상이 병이 드니, 수문제가 무당을 보내어 귀신을 쫓아준다. 그러나, 귀신이 물러나지 않았는지 무당이 놀라 죽는다. 그날밤에 양상이 병사하니, 나이 겨우 25세이다.

 

[평론] 양상이 엉터리의사때문에 죽지 않았다면 수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