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학/문학일반

광동문학은 '안락사' 하였는가?

중은우시 2008. 6. 7. 20:05

글: 종강(鍾剛)

 

2008년 5월 18일,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남도주간(南都週刊)이 주최하고, 방원지산(方圓地産)가 협찬한 "광동문학의 현재와 미�"라는 주제의 살롱이 방원.운산시의(方圓.雲山詩意 )클럽하우스에서 거행되었다. 광동문학계의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여러 대표적인 인물이 살롱에서 광동문학의 현상을 분석했다. 소설가 곽소동(郭小東)에 따르면, 광동문학은 '이사방생(已死方生, 이미 죽었고 막 살아나는)' 처지에 처해 있다고 하였다. 비평가인 하룡(何龍)도 현재는 광동문학이 가장 저조한 시기라고 지적했다. 광동문학은 자신감을 잃고 방향성을 잃었다. 그리하여 광동문학은 곤난에 처한 것이다. 살롱에서, 참석자들은 광동문학의 현상, 빛과 그늘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는 분석을 통해서 광동문학이 곤경에서 출로를 찾을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전통의미의 광동문학은 이미 죽었다"

 

살롱은 5월 18일 오후에 거행되었고, 살롱에 참가한 사람은 화남사범대학 중문과 교수이자 비평가인 진검휘(陳劍暉), 광동기술사범학원 문학원 교수인 소설가 곽소동, <<화성(花城)>>잡지 집행주편이자 작가인 전영(田英), <<양성만보(羊城晩報)>>의 문예부주임, 비평가인 하룡, 중산대학 중문과 교수겸 비평가인 사유순(謝有順), <<시가와 사람>>잡지의 주편이자 시인인 황예해(黃禮孩)등 6명이었다. 살롱은 사유순 교수가 주재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참석자들은 문천대지진의 피해자에게 애도를 표시했다. 사유순은 "묵념은 죽은 자에 대한 침통한 애도이며, 산 자에 대한 영혼훈련이다. 아주 문학적이며, 문학이 가장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왕왕 애상(哀傷)의 정을 가지는 때이다. 대지진과 같은 깊은 상처의 기억은 문학종사자의 이후 창작에 영향을 줄 것으로 믿는다."

 

살롱이 시작되자, 황예해가 먼저 발언했다. 그는 2000년이후는 광동의 시가(詩歌) 전성기였고, 시가활동이 밀집되었으며, 시가의 민간출판은 전국적인 영향력을 지녔다. 그러나, "광동시가는 문본의 선봉성이 결핍되었고, 시가관념에서 아무런 돌파를 하지 못했다. 외지 시가들과 비교하면, 광동시가단체는 느슨하고, 핵심적인 역량이나 대표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곽소동은 광동문학을 전체적으로 관찰한 후 그는 "광동문학은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 있다. 전통의미의 광동문학은 오늘날 이미 죽고 없다. 이미 안식을 누린다." 곽소동은 이렇게 해석했다. 그가 말한 '죽어버렸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학전통의 계승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하룡은 뒤이어 이런 사망을 '안락사'라고 개괄했다) "그 50년대에 출생하고 문혁을 거치고 지식청텬을 거친 작가들은 그들의 충분한 생활경력을 근거로 창작해낸 문학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전정한 문확과는 거리가 말다. 30년동안, 이들 작가들은 본질적으로 아무런 발전적인 진보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역사상 해야하고 시대가 부여한 사명을 완성했다"

 

곽소동은 자신이 광동문학에 신심을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광동은 근 30년동안 대량의 외성이민을 맞이했고, 이민군중들이 진정으로 광동의 이야기를 쓰는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한 작가가 일생의 창작을 어쨌든 그이 고향과 어린시절에 뿌리를 밖고 있어,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들이 광동문학에 새로운 힘과 자원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50세, 60세가 되거나 혹은 그들의 다음 세대에는 그들의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곽소동은 광동의 많은 문화자원은 현대작가에게 중요시되지 않는다. 양계초를 대표로 한 근대사상의 선구자들이 있는데, 광동에는 이들 중요한 사상자원과 문학자원의 계보를 얘기할 수 있는 작가가 몇 몇 되지 않는다. 곽소동은 "광동문학의 희망은 양계초의 문화와 사상자원을 새로 인식하는데서 시작하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광동문학의 투입과 산출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광동은 실제로 많은 문학의 최고기록을 지니고 있다. 지도자들이 문학을 가장 중시하고, 투입도 가장 많고, 심천과 동관은 문학에 대한 투입이 심지어 내지의 한 성보다 많다. 광동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도 가장 많다" 전영의 말이다. 이런 적지 않은 문학의 최고기록의 배경하에서 광동문학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을 수 있을 것같지만, 실제는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광동문학에 거대한 투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러나, 투입과 산출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전영에 따르면, 국내의 권위있는 몇 개의 문학상중에서, 특히 소설항목에서 광동의 작가는 한번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여러 해동안, 광동문학에는 전국적으로 영양을 미친 작품이 없다. 거대한 투입과 비교하면 이것은 아주 비정상적이다.

 

비평가인 하룡은 더 나아가 이렇게 지적한다: "광동문학은 지금이 가장 저조한 시기이다" 광동은 문학활동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광동인들이 자리를 깔면, 외지인들이 노래하고 춤춘다. 하룡은 특히, 광동의 많은 작가들은 모두 북경에 가서 세미나를 하는데 급급하고, 북경비평가의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방, 비관방의 활동은 매우 많다. "단 이런 북경비평가의 시야에 들어가는 작품은 내가 보기에 왕왕 중하류수준이다" 진검휘 교수도 이렇게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광동문학의 가련하고 불쌍한 부분이다. 그는 상해의 작가들이 광동의 작가들처럼 행동하는 것은 본 적이 없고, 이처럼 간절하게 북경 비평가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진검휘 교수도 말한다. "광동문학계는 관념이 보수적이고, 사상이 수구적이며, 이미 변화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에 이르렀다"

 

"광동작가는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

 

살롱의 주재자인 사유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광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소부적이면서 심지어 낙후한 문학현상과 많은 신선한 사물이다. 예를 들어, <<화성>>잡지, 민간출판, 노동문학, 임현치(林賢治), 애효명(艾曉明)과 같은 사람의 사상은 모두 한 시대의 기풍을 이끌었다. "광동문학은 실제로 다양한 측면이 있고, 이중성이 있으며, 심지어 다중성이 있다. 이는 사실 포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학경험과 문학역량에 좋은 생장토양을 제공해준다"

 

사유순에 따르면, 광동문학의 장점은 첫째, 작가의 심리상태가 비교적 평화적이고 북방작가처럼 문학에 대하여 실제에 맞지 않은 환각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광동작가가 직면하는 생활경험이 선명하고, 복잡하며 독특하다. 다른 지방과 비교할 수가 없다. 특히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광동으로 남하하여, 이곳에서 일하고 생활하고 뿌리내리고 있다. 이는 중국역사상 나타난 적이 없는 성대한 장면이다. 이곳에서 가장 전통적인 것과 가장 현대적인 것,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더러운 것, 가장 선진적인 것과 가장 낙후된 것, 가장 첨단적인 것과 가장 보수적인 것이 함께 섞여 있다. 이는 바로 광동작가에게 풍부한 창작자원을 제공해준다. 이치대로라면 이는 대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순에 따르면, 광동문학에는 문제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작가가 없다. "가장 큰 문제는 광동작가가 말하는 방식이 너무나 진부하여, 탐색이나 모험을 하는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무엇을 쓸 것인가'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지, '어떻게 쓸 것인가'에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얘기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예술변혁의 풍향계는 되지를 못하고 있다. 자기의 언어품격을 가진 작가가 거의 없다. 이외에 사유순에 의하면, 광동작가들은 그다지 부지런하지 않고, 조금만 돈을 벌면 안주하며, 작은 범위내에서 누가 낫고 못한지를 타둘 뿐, 더욱 큰 문학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광동문학의 희망은 당연히 젊은 작가에게 기대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재주가 있고, 문학관념, 예술경험이 서앙하는 과정에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끈기있게 각고의 노력을 하여, 호연지기를 기른다면, 새로운 기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정신의 사업이다. 좋은 작가는 당연히 재능과 지혜, 용기와 근면이 완벽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광동작가들은 더욱 노력해야 한다.

 

참석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한 것은 광동문학의 기본국면에서, 문학비평은 비교적 강하다는 것이다. 시가는 가장 활력과 희망이 있는 분야이다. 산문잡문계에도 이미 소민(筱敏), 임현치, 언열산(烈山)등의 대가가 있다. 그리고 새롭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어 관심을 가질만하다. 소설은 글쓰는 사람이 아주 많다. 다만 파괴력이 있는 작품이 필요하다. 어느 청중이 회의후에 보고문학은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어떤 전문가가 이렇게 반문했다: "보고문학? 그건 이 매체시대엔 이미 죽은 문체이다. 일찌감치 문학의 시야에서 퇴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