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채준(蔡駿)
어릴 때, 한동안 중국의 고전연의소설(古典演義小說)에 탐닉한 적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삼국연의, 수호전외에 비룡전전, 오호정서연의, 설악전전등등을 읽었다. 많은 이야기의 줄거리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러나, 이들 소설의 작자는 통상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작가는 "일명(佚名, 작자미상이라는 의미임)"이었다.
당시는 아직 어렸으므로 "일명"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저 어느 작가의 성명이나 필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들의 표지가 모두 "일명 저"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와...이 "일명"선생은 정말 대단하구나. 그렇게 많은 연의소설이 모두 그의 작품이라니, 최소한 수량에 있어서는 중국최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사실상, "일명"선생은 확실히 문단에서 수량이 가장 많은 저자이다. 검색해보라. 작품수량이 가장 많은 사람은 바로 "일명"이다)
사실, 말 그대로 하자면, "일명"은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일명"의 기원을 거슬러올라가자면, 왕왕 수백년전의 문학작품인 경우, 작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거나, 혹은 작자가 원래 스스로 작가임을 나타내지 않으려 한 경우에, 지금까지 전해진다면 작자는 "일명"이라는 두 글자를 적을 수밖에 없다.
중국문학에서 "일명"의 작품은 사실 <<시경>>의 시삼백이 기본적으로는 모두 "일명"의 작품이다. 공자는 그저 편집했을 뿐이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2,3천년전으로 되돌아가지 아니하는 한 "요조숙녀, 군자호구"라는 시를 누가 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산해경>>등 선진의 상고문헌 한육조의 악부, 당나라의 많은 전기, 송원시기의 여러 화본, 명청시대의 각종 작가명을 남기지 않거나 고증할 수 없는 연의소설등 수도없이 많다(그중에 많은 것은 금서이다). 그렇게 많은 "일명"의 작품을 합하면 중국의 문학사에서 절반은 차지할 것이다.
이 "일명"선생은 고대한어에 정통할 뿐아니라, 세계각국의 여러 국적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서방문학도 기본적으로 중국과 마찬가지이다. 희랍, 북구의 신화는 별론으로 하고 유럽중세기의 4대사시(史詩): 니베룽겐의 반지, 롤랑의 노래(La Chanson dc Roland), 시드의 노래(El Cantar de Mio Cid), 이고르원정기(The Song of Igor's Campaign)은 모두 "일명"선생의 작품이다.
그리고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천일야화>>도 이야기하는 것은 가련한 국왕 신부가 아니라, 그녀의 이불속에 숨어있는 "일명"선생인 것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근현대로 가까워 올수록 "일명"선생의 작품이 점차 줄어든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그의 족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옛날 책무더기에서나 예전의 경전에서나 그와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문학의 행인가 불행인가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개한마리 고양이한마리가지 곳곳에 자기의 냄새를 남기려고 하듯이(이것때문에 우리는 개다리모습를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류가 동물로부터 물려받은 본능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자기의 냄새를 남기지 못했거나 혹은 감히 남길 생각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명"선생이 신통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많은 진정으로 위대한 작품은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없다. 평생 묵묵히 살았던 카프카는 임종전에 친구에게 모든 작품을 불사르라고 하였지만, 친구가 다행히 그의 유언을 위배하는 바람에 그의 걸작을 지금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친구가 그의 유언을 이행했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카프카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며, 몇해후 어느 지하실에서 타다남은 유고를 발견했을 때에도 작자의 성명이 적혀 있지 않았을 것이며, 이렇게 해서 카프카도 "일명"선생으로 승격되었을 것이다.
천하에는 무수한 이런 "일명"선생이 있다. 바로 "일명"의 천재적인 지혜로 후세인들에게 많은 위대한 작품을 남겨주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를 선발한다면, 필자는 "일명"선생에게 투표할 예정이다.
2,3십년대에 젊은 작가중에 필명이 "일명"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일명"선생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장래 혹은 과거에 또 다른 "일명"을 필명으로 쓴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는 21세기에도 또 다른 "일명"선생 혹은 여사의 책을 살 지도 모른다.
누가 다음번 "일명"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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