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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색계(色戒)>>와 장애령의 고충

by 중은우시 2007. 11. 23.

글: 유앙(劉仰)

 

2차대전에 중국이 승리한 이후, 장애령은 호란성(胡蘭成)의 문제 및 자신과 호란성의 관계에 대하여 정식으로 설명하거나 입장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점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은 장애령이 계속하여 매국노인 호란성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일부 사람들의 장애령에 대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일 좀 더 객관적으로 이 문제를 본다면, 장애령의 고충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령이 호란성과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녀의 나이 23세때였다. 이는 그녀에게 있어서 첫사랑이었다. 애정결핍가정에서 자랐던 그녀가 처음으로 이성의 사랑을 느낀 것이다. 이것이 그녀에게 준 영향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첫사랑을 아끼는 것은 이해가 된다. 비록 그녀에게는 정치적인 머리가 없고, 옳고 그른 것에 관한 큰 판단을 하지 못한 점은 있으나, 당시의 장애령은 아직 나이가 어렸다. 정진책, 부뢰같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적해주었지만, 그녀는 아마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항전승리후, 호란성문제에 대하여, 사회는 장애령에게 비교적 관대했다. 재능있는 작가에게 이 문제를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어쨌든 그녀가 나이어렸다는 점이 용서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호란성이 일찍 죽었더라면, 장애령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마도 일찌기 명확한 태도를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살고 있던 매국노 호란성은 굳이 장수를 했다. 그리고, 호란성은 항상 그와 장애령간의 관계를 떠벌이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호란성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항전승리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애령이라는 주제를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호란성은 그저 장애령과의 옛날 '스캔들'을 떠벌임으로써만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호란성의 이처럼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마도 장애령의 오랫동안의 고뇌였을 것이다. 작가의 각도에서 보면, 그녀와 호란성의 관계는 아주 좋은 창작소재이다. 장애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용하지 않았을까? 장애령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디다. 그녀가 이 주제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더라도, 호란성이 떠벌이고다닐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일 뿐이고, 어쨌든 호란성에게 이용당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장애령이 호란성의 요란한 주장에 대응을 하게 되면, 분명히 많은 매체들은 벌떼처럼 호란성을 찾아갈 것이고, 그에게 맞는지 물어볼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장애령의 명성은 호란성이 어떻게 흔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 두 손바닥이 부딛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다. 호란성의 추악한 행동에 대하여, 장애령이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대응이었다.

 

장애령이 더 이상 사랑에 목을 맨 어린 여자가 아니게 되었을 때, 그녀의 이성은 그녀로 하여금 침묵을 선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첫번째 중요한 이유는 바로 아직 살아있던 호란성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자주 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난다. 1970년대, 몇몇 역사적인 이유로 호란성은 대만으로 되돌아오고,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작품도 발표하게 된다. 호란성과 장애령의 관계는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론의 압력하에서, 호란성이 결국은 관련기관에서 해직되고, 책도 금서로 되었고, 사람도 몰래 일본으로 되돌아갔지만, 오랫동안 아물었던 상처는 다시 터져버린 것이다.

 

장애령이 1980년대에 발표한 소설 <<색계>>는 바로 호란성이 잠시 대만에 돌아왔던 거동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의사표시를 해야만했다. 그녀가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으면 호란성에 대한 여론의 비판은 아마도 그녀에게까지 번져올지도 몰랐다. 그려나 그녀는 여전히 직접적으로 의사표시를 하고자 하지는 않았고, 아주 우회적이고 은밀한 방법을 채택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보는 <<색계>>이다. 여러번 수정되고, 새로 썼던 단편소설이다.

 

<<색계>>라는 소설은 변호하는 요소와 작용이 있다. 그러나, 장애령은 이 소설에서 주로 자기를 위하여 변호하였다. 자기를 변호하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매국노의 이미지를 약간은 완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장애령은 소설에서, 동시에 자신의 반성도 나타냈다. 필자는 이안이 장애령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한 이유는 바로 이안은 영화에서 역선생의 잔폭하고 냉혹한 면을 추가하였는데, 이것은 원문에 없는 것들이다. 소설과 비교하자면 이안은 여주인공과 매국노의 거리를 약간 더 벌려놓았던 것이다.

 

<<색계>>가 발표된 이후, 호란성도 죽었다. 만일 호란성이 몇년 더 일찍 죽었더라면, <<색계>>는 아마도 우리가 오늘날 보는 형태가 아닐 수도 있다. 이후 나이때문에, 장애령은 더이상 정력적으로 창작활동을 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호란성과의 관게에 대하여는 <<색계>>라는 단편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말은 다 해버렸던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바꿔서 말할 것이냐 아니냐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장애령의 대답에 대하여 아마도 만족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최후의 대답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