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으로 꼽아보면,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모택동이 다섯번째로 선택한 후계자이다.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가 모택동이 선택한 첫번재 후계자이고.
1945년 중공칠대(中共七大, 중국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의 후계자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그때 유소기를 위해서 여론을 조성할 필요도 없었고, 전국인민으로 하여금 유소기를 점진적으로 알게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유소기는 일찌감치 저명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중공칠대후 얼마되지 않아 1945년 8월, 모택동은 중경으로 가서 장개석과 담판을 하게 되는데, 유소기로 하여금 중공중앙주석의 임무를 대리하게 한다. 1945년부터 '문화대혁명'이 발발할 때까지, 근 20년간 유소기는 모택동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나중에 모택동은 유소기를 '자본주의도로의 당권파'로 인식하면서 '문혁'을 일으켜 그를 타도하게 된다.
모택동의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林彪, 린바오)이다. 1969년의 중공구대(中共九大)에서,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로 나타난다. 이때도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고, 전국인민으로 하여금 임표를 점진적으로 알게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임표는 일찌감치 유명한 장군이고, 십대원수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1971년에 발발한 "임표반국사건"은 모택동을 실망시켰고, 부득이 다른 후계자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모택동은 일찌기 왕홍문(王洪文, 왕홍원)을 후계자로 생각한다. 왕홍문의 경력을 유소기나 임표에 비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문화대혁명의 "조반사령(造反司令)"이었고, 문혁때 전국에 이름을 떨쳤으니, 여론을 조성하거나 전국인민이 점진적으로 그를 알도록 할 필요가 없었다. 왕홍문이 중공중앙부조석을 맡은 후, 모택동은 금방 발견한다. 왕홍문이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사인방'을 결성하였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택동은 다시 등소평(鄧小平, 등샤오핑)을 기용하여, 등소평을 후계자로 삼는다. 등소평은 일찌기 중국공산당의 유명한 지도자이고, 여론을 조성하거나 전국인민이 점진적으로 알게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등소평이 다시 등장한 후, 정리정돈을 시작하고, 문혁을 부정한다. 이는 모택동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등소평비판, 우경풍조반격'을 시작한다. 다시 등소평은 타도되고, 모택동의 네번째 후계자선정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모택동은 다섯째 후계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이때의 모택동은 이미 풍촉잔년(風燭殘年)의 황혼기였다. 그의 다섯번째 후계자를 지정하는데 부여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모택동은 1976년 4월 7일 화국봉을 중공중앙제일부주석으로 제안하여, 화국봉의 후계자지위를 명확히 했다. 그리고 5개월후에 그는 서거한다.
모택동의 다섯번에 걸친 후계자지명을 살펴보면, 처음 두 번은 심사숙고하고 관찰을 거쳐, 자연스럽게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71년의 '임표사건'이후 1976년 모택동의 사망때까지 5년간에 모택동은 세번 후계자를 바꾸게 되는데, 갈수록 더욱 황급하게 결정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는데, 3월 6일, 마린코프가 스탈린의 생전조치에 따라 후계자의 지위에 올라 소련공산당중앙제1서기가 된다. 그러나 반개월만인 3월 20일, 마린코프는 소련공산당중앙제1서기의 직위를 사직한다. 후르시쵸프가 소련공산당중앙서기처의 실제지도자가 된 것이다.
모택동은 마린코프는 경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스탈린이 죽은 후에 후르시쵸프에게 대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고, 그가 '문혁'을 발동한 이유도 후르시쵸프와 같은 인물이 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정했던 후계자인 유소기를 '중국의 후르시쵸프'로 보고 타도했다. 그러나, 임표의 반란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임표이후에 모택동은 빈번하게 후계자를 바꾸는데, 실제로는 스탈린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모택동은 1976년 4월 7일, 화국봉을 후계자로 지정하면서, 화국봉에게 중공중앙제일부주석을 맡게 한다. 모택동이 1956년 중공팔대때, 유소기에게는 그저 중공중앙부주석을 맡게 하였지, '제일'은 없었다. 중공구대에 임표는 유일한 부주석이었으므로, '제일'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모택동이 화국봉을 중공중앙부주석으로 올릴때는 이미 중공중앙부주석인 사람이 왕홍문과 섭검영 두 명이나 있었다. 왕홍문은 화국봉보다 먼저 부주석이 되었고, 섭검영의 경력은 화국봉이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반드시 화국봉에게 '제일'이라는 칭호를 붙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 화국봉이 후계자라는 것은 명확히 할 수 있었다.
1976년 화국봉이 모택동으로부터 후계자로 정해질 때 나이가 55세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설 때의 모택동의 나이가 56세이다. 모택동은 화국봉에 대하여 확실히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할 수 있다"는 심정이었던 것같다. 모택동은 1976년의 화국봉이 1949년의 그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이 마치지 못한 길을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택동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세계에서 제일 큰 당이고,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중국공산당의 영수는 반드시 명망이 높아야 했다. 화국봉은 사람됨이 충후하지만, 영수로서의 경력은 모자랐고, 명망도 모자랐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모택동은 병이 중한 와중에도, 화국봉을 후계자로 확정한 후, 스스로 남은 날이 오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1976년 4월 이런 내용의 '최고지시'를 한 바 있다. "여론을 조성하여, 화국봉동지를 선전하라. 전국인민이 점진적으로 화국봉동지를 알도록 하라"
모택동이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가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을 때, 너무 황급했고, 전국인민들이 점진적으로 이 후계자를 인식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은 화국봉선전을 통하여 화국봉의 명망을 끌어올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1976년 6월 15일, 병이 위중한 모택동은 화국봉, 왕홍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과 왕해용을 부른다. 그리고 '임종당부'에 유사한 말을 하게 된다:
"인생칠십고래희인데, 나는 팔십이다. 사람이 늙으면 항상 후사를 생각하게 된다. 중국에는 옛말에 관두껑을 닫고 평가를 내린다는 말이 있다. 나는 비록 아직 관뚜껑을 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았다. 그러니, 평가를 내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일생동안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장개석과 그렇게 수십년을 싸웠고, 그를 몇 섬으로 쫓아보냈다. 항전 8년동안 일본인들을 자기 집으로 되돌려보냈다. 이 일에 대하여 이의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몇몇 뿐이다. 내 귓가에 대고 떠드는 사람들은 나보가 하루빨리 그 섬을 회수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일 뿐이다. 또 다른 일은 너희가 모두 알고 있지만, 바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일이다. 이 일은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두가지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유산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평화적으로 물려주는 것이 안되면 동탕(動蕩)중에 넘겨주어야 한다. 잘못하면 혈우성풍(血雨腥風, 피바람)이 일 것이다. 너희는 어떡해야 하는가?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모택동의 최후 몇 마디는 아주 처량하다. 무슨 '동탕'이니, '혈우성풍'이니, '하늘만이 알고 있다'느니...모택동은 자기의 사후에 화국봉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일찌기 그가 죽은 후에 강청이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도 잘 알았다. 화국봉이 강청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화국봉과 사인방의 네 사람을 함께 불러서 이 말을 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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