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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과 수장(收藏)에 얽힌 이야기

by 중은우시 2007. 9. 3.

모택동은 일생동안 문방사보, 고서적, 서화, 인장등의 감상과 수장을 좋아했다. 그는 저명한 수장가 및 서화가들과 교분이 있었고,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벼루와 묵합

 

모택동은 당대의 위대한 시인이다. 일생동안 붓을 즐겨 썼으므로, 벼루(硯)도 평생 곁에 두었다. 그러나, 그가 수장한 것은 단연(端硯), 흡연(硯)과 같은 명연(名硯)들이 아니었다. 그가 쓴 첫번째 벼루는 네모난 벼루로서 길이 19센티미터, 너비 12.5센티미터이다. 이는 당시 사숙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누구나 서법을 연구할 때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이것은 소산(韶山, 모택동의 고향)의 청석(靑石)으로 만든 것이었으므로, 고향의 제품이었다. 벼루는 비록 작았으나 그가 고전문학에 대한 기초를 닦는데 역할을 했다. 이 벼루는 현재 소산의 모택동기념관에서 수장하고 있다.

 

신중국이 들어선 후, 모택동의 청석조화연(靑石雕花硯)은 대화가인 제백석(齊白石)이 준 것이었다. 벼루의 길이는 26센티미터, 큰쪽은 너비가 15센티미터, 작은쪽은 너비가 12센티미터이며, 두께는 2센티미터이다. 남목(楠木)으로 만든 연합(硯盒)에 들어있다. 이 벼루는 원래 제백석이 아끼던 물건이었다. 제백석은 원래 이 벼루를 집안대대로 물려주려고 생각했었으나, 모택동에 대한 존경심으로 서화와 함께 모택동에게 준 것이었다. 모택동은 예물을 받은 후 한참을 감상한 후, 나머지는 모두 국가박불관에 보내어 수장하게 하고, 오로지 이 벼루만을 아껴서 남겨 자신의 책상위에 두고 썼다.

 

모택동은 여러 개의 묵합(墨盒, 먹을 두는 합)을 수장한 바 있다. 두껑에 "북제안지추가훈합(北齊顔之推家訓盒)'이라고 쓴 것도 있고, '북경만수산풍경합(北京萬壽山風景盒)'이라고 적힌 것도 있고, '북경전문(北京前門)'이라고 새겨진 묵합도 있었다. 모택동이 수장한 벼루와 몇 개의 묵합은 혀재 소산모택동기념관에서 진열하고 있다.

 

장서

 

관련자료에 따르면, 모택동이 수장한 책자는 모두 9만책이라고 한다.

 

모택동의 장서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초사집주(楚辭集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72년 9월 27일, 모택동이 일본내각의 총리대신 타나카 카쿠에이를 접견할 때, 그에게 <<초사집주>>를 1부 선물한 바 있다. 이로 인하여 이 책은 이름을 널리 얻게 된다.

 

1961년 6월 16일, 모택동은 특별히 지명하여 인민문학출판사로 하여금 <<초사집주>>를 영인하게 하였었다. 타나카 카쿠에이는 이 선물을 받고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그를 따라 중국방문을 했던 사람들이 모두 모택동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귀국후 바로 <<초사집주>>를 요미우리신문사에 보내어 복사본을 만들게 하였다. 재미있는 일은, 1년후 중국외교부는 요미우리신문사의 사장으로부터 모택동의 <<초사집주>> 복사본을 다시 선물받게 된 것이다. 모택동의 장서중에는 중국판 <<초사집주>>뿐아니라 일본복사본 <<초사집주>>도 있게 된 것이다. 일본 복사본의 제6책에는 모택동이 친히 쓴 글까지 남아 있다.

 

모택동의 장서에는 대부분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는데, 이런 장서인에도 여러 종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장방형의 양각의 "모씨장서(毛氏藏書)"인데, 이것은 북경의 전각가인 유박금(劉博琴)이 새긴 것이다. 일찌기 1937년에 유박금은 모택동을 위하여 "윤지(潤之, 모택동의 자)"라는 인장을 새겨준 바 있었다. 1949년, 모택동은 다시 그에게 편지를 써서 요청하여 명나라 고인(古印)을 본 뜬 "모씨장서"인을 만들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장서인은 상해의 전각가 오박당(吳朴堂)이 새긴 것이다. 1963년, 금석가인 오박당은 칼을 들어 "장(藏)"자를 간체화한 "모씨장서"라는 도장을 새겼는데, 모택동이 아주 좋아했고, 많은 장서에 이 도장을 찍었다.

 

제백석의 서화

 

1950년 봄, 제백석은 1941년에 그린 작품 <<창응도(蒼鷹圖)>>와 "해위용세계, 운시학가향(海爲龍世界, 雲是鶴家鄕, 바다는 용이 뛰어노는 세계이고, 구름은 학의 고향이다)"라는 글과 "모택동주석, 경인십월제황"과 "구십옹제백석장"이라는 두 개의 도장을 짝고, 위에서 언급한 청석조화연등과 함께 모택동에게 보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유명한 수장가인 장백구(張伯駒)와 왕월(王)이 왔다. 제백석은 아주 기쁘게 모택동에게 두 폭의 작품을 보낸 것을 자랑하였다. 그런데, "해위용세계, 운시학가향"라는 전서체의 대련을 보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장백구는 부지불식간에 "아.."라고 비명을 질렀다. 원래 이 대련에는 글자 한자를 잘 못 적었던 것이다. 이 글은 원래 청나라때 안휘 완백산인 등석여(鄧石如)가 쓴 글인데 "천시학가향(天是鶴家鄕, 하늘은 학의 고향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제백석은 여기의 "하늘"을 "구름"으로 잘못 적은 것이었다. 제백석은 장백구의 말을 듣고 긴장했다. 모주석은 학식이 뛰어나서 글자 한 자를 잘못 쓴 것은 불경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백구는 노인을 위로하면서 말했다: "제선생님, 당신이 쓴 '구름'이라는 글자는 등석여의 '하늘'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윗글에 '땅'이 나왔다면 '하늘'을 딴 것으로 바꿀 수 없겠지만, 윗글에 '바다'가 나왔으므로 '구름'이 오히려 다 맞는 것같습니다. 옛사람의 글을 반드시 그대로 적어야 할 필요는 없고, 옛사람의 글을 고쳐서 쓰는 것도 적지 않으므로 모주석도 잘 고쳤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인장

 

자고이래로 수장가들은 모두 인장을 좋아했다. 모택동도 인장을 아주 좋아했다. 1946년 1월 28일 모택동은 유아자(柳亞子)에게 서신을 써서, 인장 2개를 보내준 것에 고마워하는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유아자가 어떻게 모택동에게 인장을 선물하게 되었는가? 1945년 8월 모택동은 중경으로 장개석과 담판하러 갔고, 거기서 20년된 옛친구 유아자를 다시 만났다. 유아자는 <<증모윤지노우>>라는 칠율시를 적어 모택동에게 주었다. 모택동은 중경을 떠나기 전인 10월 7일, <<심원춘. 설>>의 초록을 유아자에게 보낸다. 유아자는 이 사를 읽고는 아주 뛰어나다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당시 모택동은 인장을 가져오지 않아서, 사에 인장을 찍지 못했다. 유아자는 그 자리에서 모택동에게 도장 2개를 만들어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나중에 유아자는 특별히 전각가 십만인루(十萬印樓)의 주인인 조입암(曹立庵)에게 요청하여 "모택동인"이라는 음각도장과, "윤지"라는 양각도장을 만든다. 이 도장을 먼저 모택동이 준 <<심원춘.설>>에 찍은 후, 다시 두 도장을 모택동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이 도장을 받은 것을 고마워하는 말을 서신에 남겼던 것이다. 지금 이 도장은 혁명문물로 취급되어 중국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외에 저명한 서예가인 등산목(鄧散木)도 수산석(壽山石)에 모택동을 위하여 도장 하나를 새겨 준 적이 있다. 이 도장은 아주 독특하여 두 가지 특색이 있다. 하나는 "모택동"이라는 세 글자를 가로로 팠는데, 그는 택(澤)의 삼점수(三點水)를 왼쪽이 아니라 아랫쪽에 배치했다. 원래 "모(毛)"자의 필획이 적어 "택동"은 필획이 많아 균형이 맞지 않았는데, 등산목은 과감하게 글자수가 많은 택자를 나누어버린 것이다. 두번째는 이 도장은 용머리가 달린 큰 도장인데, 머리부분에 쌍용을 새겼고, 옆에는 각자를 새겼다. 이 진귀한 문물도 현재 소산모택동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전군도(錢君)는 유명한 전각가이다. 1954년 전군도는 북경의 중국음악출판사에서 부총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남해의 부름을 받았다. 모택동은 그와 웃으면서 악수를 하곤, "당신이 판 도장이 아주 좋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원래 전군도는 일찌기 모택동을 위하여 "모택동인"이라는 음각도장을 파 준 적이 있었다. 이후 모택동은 다시 상해박물관을 통하여 전군도에게 "모씨장서" 양각도장을 파도록 부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