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과 금병매

by 중은우시 2008. 6. 2.

글: 유계흥(劉繼興)

 

명나라 융경 내지 만력년간에 만들어진 <<금병매(金甁梅)>>는 중국 최초의 장편 사회세정소설(社會世情小說)이다. 금병매는 수호전(水滸傳)에 묘사된 서문경(西門慶)과 반금련(潘金蓮)의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시정평민생활을 그리고, 관료, 악당, 부상이 삼위일체인 봉건세력을 대표하는 서문경의 발전과 멸망에 이르는 죄악의 생활역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명나라때, 송나라를 시대배경으로 하였지만, 실제 내용은 명나라때의 역사이고, 명나라후기의 어둡고 부패한 정치사회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다.

 

모택동은 독서와 평론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일찌기 금병매에 대하여 다섯번에 걸쳐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첫번째는 1956년이다. 그해 2월 20일 모택동은 중공업부문의 업무보고를 받을 때, 만리(萬里)등과 얘기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호전은 당시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금병매는 당시 경제상황을 반영한 것이며, 홍루몽의 조상이어서, 보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는 1957년이다. 모택동은 <<금병매>>의 문학가치와 사회학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친히 <<금병매>>를 금서에서 해제해주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금병매는 참고할만하다. 단지 책에서 여성을 더럽히는 장면은 좋지 않다. 각 성위원회 서기들은 볼 만하다"

 

그리하여, 문화부, 중앙선전부는 출판부서와 협의한 후, "문학고전간행사"의 명의로 1933년 10월 "북경고일소설간행회"가 돈을 내어 영인본으로 만든 <<신각금병매사화>>를 다시 2000부 영인본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받은 것은 각 성의 성위원회서기, 부서기 및 동급의 각부 장차관이었다. 영인본 <<신각금병매사화>>는 21책으로 정문 20책, 200폭의 삽화를 별도로 1책으로 하였다. 모든 구매자들은 등기해야 했고, 일련번호를 매겼다.

 

세번째는 이년후인 1959년 12월과 1960년 2월이다. 모택동은 소련의 <<정치경제학교과서>>를 읽고 담화하는 중에, <<금병매>>와 <<동주열국지>>를 비교했다. 그는 후자는 그저 "당시 상부구조측면의 복잡하고 첨예한 투쟁을 썼는데, 결점은 당시의 경제기초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금병매는 "봉건사회경제생활의 모순을 드러내고, 통치자와 피압박자의 모순측면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금병매는 아주 자세하게 썼다"고 하였다.

 

네번째는 1961년이다. 모택동은 1961년 12월 20일 중공중앙 정치국상임위원회와 각 대구제1서기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소설중 사회역사를 쓴 것은 단지 3부이다: 홍루몽, 요재지이, 금병매. 너희는 금병매를 읽었느냐? 내가 추천할테니 한번 읽어봐라. 이 책은 명나라때의 진정한 역사를 쓴 책이다. 봉건통치를 폭로하고, 통치와 피압박의 모순을 폭로하고, 일부분은 아주 자세하다. 금병매는 홍루몽의 조상이다. 금병매가 없었다면 홍루몽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홍루몽은 아주 자세하고 정교한 역사이다. 다만, 금병매의 작가는 여성을 존중하지 않았다"

 

모택동 자신은 금병매를 "명나라의 진정한 역사"로 생각하고 읽었다. 그의 이 평가는 아주 깊이있는 것이다. 경제기초와 상부구조의 모순은 사회발전의 기본모순이다. 경제기초라는 기본측면을 장악하는 것은 상부고조영역의 투쟁과 변경의 원인을 드러내고, 사회발전의 전체적인 추세를 파악할 수 있다.

 

다섯째는 1962년이다. 모택동은 1962년 8월 중앙공작회의 핵심소조에서의 담화중에 다시 금병매와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를 비교했다. 그는 "어떤 소설, 예를 들면 관장현형기는 그저 어두운 측면만 썼다. 노신은 이를 견책소설이라고 했다. 그저 암흑만을 폭로하니,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다. 금병매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음탕한 면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어두운 면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비록 잘 썼지만 사람들이 즐겨보지 않는다. 홍루몽은 다르다. 어느 정도 희망을 썼다"

 

금병매를 '견책소설(譴責小說)'로 정의하였던 사람은 모택동 한 사람이다. 견책소설의 가장 큰 특색은 폭로이다. 그리고 금병매는 바로 폭로문학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작자는 한 시대의 모든 추악함을 모조리 환한 태양아래에 드러냈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 시대의 나쁜 점을 모두 드러냈다. 그리고 남녀간의 일들까지 철두철미하게 폭로했고, 통쾌하게 16세기중국의 '청명상하도'를 묘사했다.

 

금병매의 세계속에서, 도덕적인 인격의 추구는 없다. 정치이상에 대한 영웅적인 헌신도 없다. 그저 재산과 향락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자아가치실현의 히스테리간의 분투이다. 금병매는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았고, 광명과 희망을 쓰지 않았다. 이는 작자에게 미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속해 있던 그 시대가 너무나 암울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금병매를 중시하고 여러번 언급한 것은 모두 금병매의 사실성에 있다. 금병매는 중국 사회현실주의소설의 개산지조이다. 금병매이전의 중국장편소설은 혹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뛰어난 업적을 그리고, 혹은 초망영웅(草莽英雄)의 충의를 장려하거나, 선불신마(仙佛神魔)의 기이한 행적을 묘사하였다. 이들의 비통상적인 내용은 보통대중의 현실생활과는 많이 떨어져 있다. 금병매가 쓴 것은 완전히 시정평민의 진실한 일상생활이었다. 청나라때 장죽파(張竹坡)는 <<제일기서금병매독법비평>>에서, "마치 한 사람이 친히 붓을 들어, 청하현앞에 서문씨집안이 있어, 크고 작고, 앞과 뒤의, 이런 저런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마치 진짜로 그러한 일이 있던 것같다. 감히 종이에 글로 써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중국소설사에서 선례가 없는 것이다. 세밀한 것만으로도 당시의 사회생활을 그대로 반영한다. 필자의 고증에 의하면, 명나라역사전문가인 오함(吳함)이 일찌기 1930년대에 금병매는 정치, 경제, 문화, 습속등등을 반영하는 명나라말기의 사회사라고 갈파한 바 있다.

 

현재, 금병매의 가치는 널리 인정된다. 미국대백과사전이든, 소련백과사전이든, 프랑스대백과전서이든, 모두 금병매는 중국의 첫번째 현실주의소설이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들은 금병매는 세계문학보고의 보배라고 말한다. 역사학자들은 그러나 금병매는 명나라사회를 연구하는 하나의 백과전서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