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적벽대전에 대한 평가

by 중은우시 2008. 8. 2.

 

위,오,촉 삼국정립의 국면을 만들어낸 적벽대전에 대하여, 사서를 많이 읽었고, 현실문제와 연결시키는데 능했던 모택동은 일찌기 8번에 걸쳐 4가지 측면에서 평가한 바 있다.

 

첫째, 어떤 문제는 아랫사람을 모두 탓해서는 안된다.

 

1959년 7월초, 여산(廬山)에 막 올랐을 때, 모택동은 대약진, 고지표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모택동은 "적벽대전에서 장간이 속은 일"을 들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떤 문제는 모두 아랫 사람을 탓해서는 안된다. 각 부문을 탓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장간(蔣干)처럼 원망만 하게 되는 것이다: 조조의 군영에서는 일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장간은 조조의 수하에 있는 모사이다. 동오의 수군대도독 주유와는 동문수학한 친구이다. 적벽대전이 개시될 때, 장간은 스스로 청하여 동오로 가서 주유를 설득하고자 하고, 그 기회에 동오의 허실을 정탐한다. 주유는 장간이 왜 왔는지 잘 알았다. 그리하여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조조 수하의 수군도독인 채모(蔡瑁), 장윤(張允)의 투항서를 위조하여, 장간이 훔쳐갈 수 있도록 일부러 놔둔다. 장간은 밤에 조조의 군영으로 달려가 조조에게 보고한다. 조조는 서신을 보고 더 이상은 생각하지도 않고 채모, 장윤을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조조의 군영은 수전에 능한 장수를 잃었다. 이것이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당시 장간은 조조를 위하여 심복대환을 제거해주었다고 생각하여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스스로가 잘못했음을 깨달은 조조는 그에게 한바탕 욕을 퍼붓는다. 조조에게 욕을 얻어먹은 장간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개탄하는 것이다: 조조의 군영에서는 일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그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는 일은 멍청했다. 천여년동안 그는 민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장간 본인은 '일을 이루는데는 부족하지만, 일을 망치는데는 남음이 있는' 인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어떤 문제는 모두 아랫사람을 탓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둘째, 적벽의 패배는 누구의 잘못인가?

 

<<삼국지>>의 <<무제기>>에는 조조가 "여러 장수들의 출정을 명하면서, 패전하는 자는 죄를 받을 것이고, 지는 자는 관작을 파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택동은 이 부분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적벽의 패배는 누구의 죄인가?"라는 것이었다. 조조가 다른 사람에게는 엄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했던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모택동은 조조를 높이 평가했다. 그에게는 뛰어난 점이 있다고 여러번 말해왔다. 유계흥은 문헌을 조사해봤는데, 모택동이 조조의 결점을 언급한 것은 단지 두 번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이 하나이고, 다른 한 곳은 바로 1966년 3월, 모택동이 항주에서이다. 그때는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장로를 친 후에, 사천을 쳤어야 한다. 유엽, 사마의는 싸우라고 건의했다. 유엽은 대군사이다. 문제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유비가 사천에 간지 얼마되지 않아 근거가 약하다고 했다. 조조는 가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뒤에 후회했다. 조조에게도 결점이 있었다. 어떤 때는 우유부단했던 것이다..."

 

셋째, 전쟁성패의 요소는 다방면에 걸쳐 있다.

 

<<삼국연의>>에서 적벽대전의 주요 승리요인을 제갈량의 신기묘산이라고 적었다. 오랫동안 민간에서는 적벽대전의 승리는 바로 제갈량의 "차동풍(借東風)"때문이라고 말해왔다.

 

모택동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83만의 인마를 데려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겨우 2,3십만이었다. 그리고 수전을 몰랐다. 그리하여 손권의 수하에게 패했다. 이는 공명의 '차동풍' 때문만이 아니다"

 

모택동은 문제를 전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성패의 요소는 다방면에 걸쳐 있다고 하였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천시, 지리, 인화등 여러 요소가 결합된 결과라고 보았다.

 

넷째, 옛날에 인재를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우리는 왜 대담하게 발탁하지 못하는가.

 

적벽대전은 젊은이들의 천하였다, "적벽대전은 청년들이 노인을 이긴 것이다." 건국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았다. 특히 인재가 많이 모자랐다. 모택동은 1950,60년대에 청년간부의 발탁을 아주 강조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섯번에 걸쳐 강연하면서 적벽대전때의 주유등 청년인재문제를 언급했다.

 

모택동이 한번은 삼국시대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지금 반드시 청년간부를 발탁해야 한다. 적벽대전은 군영회(群英會)였다. 제갈량은 당시 27살, 손권도 27살, 손책은 이때 겨우 17,8세였다. 주유도 20세 가량이었다. 노숙은 40세, 조조는 53세였다. 사실상, 청년들이 노인을 이긴 것이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은 신인들이 구인을 몰아낸다"

 

1953년 6월 30일, 모택동은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제2차대표대회 주석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청년간부를 많이 뽑아서 단중앙강부를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간부를 단중앙위원으로 해야 한다. 삼국시대에,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내려와서 동오를 쳤다. 그때, 주유는 '청년단원'으로 동오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정보(程普)등 노장은 이에 불복했으나, 나중에는 받아들였다. 주유가 맡는게 좋겠다고. 결과적으로 이겼다...청년들을 충분히 믿어야 한다. 그들 대부분은 일을 맡아서 할 만한 능력이 있다...젊은이들이 우리보다 약하지 않다"

 

1957년 4월 상순, 상해에서 개최된 4성1시 시위서기 사상공작좌담회에서 모택동은 청년간부발탁을 얘기하면서 다시 주유를 예로 들었다: "적벽대전때 정보는 40여세, 주유는 20여세였다. 정보는 비록 노장이지만, 주유만큼 능력이 없었다. 대적을 앞에 두고, 누가 총사령관이 될 것인가? 그래도 역시 후기지수인 주유가 대도독으로 총사령관을 맡았다. 옛날에도 파격적으로 인재를 기용했는데, 우리는 왜 대담하게 발탁하지 못하는가?"

 

1958년 5월 8일, 모택동은 중공제8차전당대회 제ㅔ2차회의에서 강연하면서, '미신을 쫓아내자'는 주제로 얘기하였다: 청년이 노인을 타도하고, 학문이 적은 사람이 학문이 많은 사람을 타도하는 것과 같은 예는 아주 많다. 주유, 공명은 모두 젊은이이다. 공명은 28세에 군사가 되었다. 정보는 노장이지만 그는 아니었다. 손권이 조조와 싸울 때 그를 기용하지 않았고, 주유에게 도독을 맡겼다. 정보는 승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유는 이겼다. 주유가 죽을 때 비로소 36살이었다"

 

1965년 1월, 그는 얘기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기에 역시 젊은이가 낫다. 적벽대전이라는 군영회에서 영웅은 대부분 2,3십세의 사람들이다. 제갈량은 당시 27살이고, 손책이 처음에 일을 맡았을 때 스무살이 되지 않았다. 손권은 더욱 어렸다. 손권은 동한 광화5년에 태어났다. 그가 형인 손책으로부터 물려받았을 때 겨우 18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