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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은 생일에 어떤 요리를 먹었는가?

by 중은우시 2008. 6. 29.

글: 누행건(樓行健)

 

생일은 인생의 중대한 날이다.

 

모택동도 그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매년 자기의 생일을 잊지 않았다. 국가지도자로서, 모택동은 원래 매년 요란하고 풍성하게 생일을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연안(延安) 빼부터 당내에 "불축수, 불송예(不祝壽, 不送禮, 생일축하행사를 하지 않고, 선물도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다. 해방후에도 그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엄격하게 당내의 생일축하, 선물보내는 기풍을 금지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조용하게 생일을 보낼지언정, 절대 '생일축하,선물보내기'의 기풍은 열지 않았다.

 

연안시절, 모택동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매번 생일때마다 그는 그저 집안에서 몇가지 요리를 더해서 식구들이 모여앉아 즐겁게 생일상을 먹었다. 1943년 12월 26일은 모택동의 50세 생일이었다. 중국에서 50세생일은 대수(大壽)라고 부른다. 연안시내에서 어떤 사람이 모택동의 생일축하행사를 준비했다, 모택동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하여, 모택동의 50세 생일은 전쟁의 포연속에서 조용히 지나갔다. 1953년 12월 26일, 모택동의 60회생일이었다. 이는 환갑(중국에서는 花甲이라 함)이다. 중국인은 자고이래로 환갑을 아주 중시했다. 모택동도 이 날은 중시했다. 왜냐하면 환갑때로부터 노인가(老人家, 어르신)로 호칭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모택동은 그저 집안에 생일상을 준비해서 집안내에서 축하하고 지나갔다.

 

모택동도 생일을 요란하게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중국인이다. 당연히 생일을 중시한다. 다만 그는 자신이 국가지도자라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생일을 가지고 행사를 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나라가 빈곤하고 백성은 가난한데 국가지도자가 떠들썩하게 먹고마시는 행사를 벌이는 것은 천리를 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생일에 선물을 보내는 것을 중시하는데, 만일 당내에 이런 기풍을 성행시키면, 당풍, 정풍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연안때부터 모택동은 공개적으로 생일축하활동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가 자주 얘기한 말이 있다: "생일을 축하행사를 한다고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축하행사를 해줄 필요가 없다" 당내에 그는 여러번 당원, 간부들에게 경고했다: 생일연회를 열지 말고, 선물을 받지 말고, 요란하게 먹고마시면서 낭비하지 말라고.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도 말고, 더더욱 자신에게 요구하지 말라" 그리하여, 그는 일관되게 사람들이 그에게 생일축하행사를 해주는 것을 반대했다.

 

1959년 12월 26일은 모택동의 66세 생일이었다. 이해에 국내경제형세가 아주 긴장되었다. 각지에서 흉년이라는 보고와 사망자에 대한 소식이 전해왔다. 모택동은 새벽부터 찡그린 눈썹을 펴지 못했고,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날은 경비병 봉요송(封耀松)이 당직이었다. 그는 모택동이 옷을 입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우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석, 맥편죽(麥片粥)을 끓여들일까요? 모택동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후에 쇼파에서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돌연, 모택동은 봉요송에게 말했다: "너는 가서 은교(銀橋), 고지(高智), 경광(敬光), 임극(林克)과 동흥(東興)을 불러와라. 오늘 여기서 밥을 먹자" 봉요송은 듣자마자 바로 뛰어가서 사람들을 부르고, 주방에 얘기해서 음식을 준비시켰다.

 

손님들이 다 도착했다. 주방에서도 요리를 내왔다. 이늘의 주식은 홍두미반(紅豆米飯이었고, 모두 6가지 요리가 나왔다. 즉, 내탕어두(?湯魚頭), 배양육(?羊肉), 간편두각(乾?豆角), 초표아채(炒瓢兒菜), 소건어(小乾魚), 초엄개채(炒?芥菜)였다. 요리는 풍성하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아주 괜찮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모택동은 규정을 하나 정한 것이 있는데, 그해부터 전국인민이 함께 일정양을 정해서 식사를 하자고 제창하면서, '삼불주의(三不主義)'를 실행한다고 선언했다. 고기를 먹지 않고, 달걀을 먹지 않으며, 식사는 정량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날의 생일요리는 요리사들이 규정을 어길 수가 없어서, 그저 요리를 만들 때 일부러 기름을 좀 더 많이 뿌렸을 뿐이다.

 

식사를 시작할 때, 모두 이전처럼 웃고 떠들면서 모택동의 생일을 축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전체 식사분위기가 침울하였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계속 전국형세를 얘기하고, 모두 시골로 내려가서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저녁에, 모택동은 식사를 한 후에 임극, 고지등에게 서신을 하나 썼다. 그들에게 하남 신양으로 가서 조사하라고 하였다. 서신의 끝에는 모택동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12월 26일, 나의 생일이었다. 명년에 나는 67세이다. 늙었다. 너희는 할 일이 많다"

 

3년곤란시기에, 모택동은 세번의 생일을 지냈다. 현재 남아있는 식사단을 보면, 이 세 번의 생일은 모두 간단하게 보냈다. 평소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세번의 생일연에서, 술도 없었고, 생일케이크도 없었다. 그리고 무슨 축하하는 분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삼년곤란시기가 끝난 후, 국민경제가 점차 호전되었다. 모택동의 기분도 좋아졌다.  1965년 12월 26일, 모택동의 72세 생일이었다. 많은 근무인원을 초청해서 함께 식사했다. 특히 주의를 끄는 점은 이 번 생일에, 모택동은 레드와인 몇 병을 올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앞장서서 한 잔을 마셨다. 이날의 요리를 보면, 이전보다 많이 풍성했다. 양이나 질에 있어서, 모두 과거와 달랐다.

 

1975년 12월 26일, 모택동의 82세 생일이었고, 그의 마지막 생일이었다. 모택동은 80세가 넘은 후에 명확히 자신이 늙었음을 느꼈다. 세상에 남아있을 시간이 길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몇년의 생일전후에, 모택동은 계속 생사문제를 꺼냈다. 그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바로, "칠십삼, 팔십사. 염라대왕이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간다" 즉, 80세를 전후하여 사람들은 모택동의 생일을 더욱 중시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그의 생일을 축하하지는 않았지만, 몰래 집에서 축하했다. 지방에서도 모택동에게 선물을 올리지는 감히 못했지만, 우회적으로 방식을 바꾸어 모택동에게 축하를 전했다. 모택동이 서거하기 전의 몇년동안, 그의 고향인 호남은 매년 12월 26일이 되며, 모두 장수면과 같은 것을 북경으로 보냈다. 이에 대하여, 모택동은 예전과는 달리 흔쾌히 받아들였다. 국외에서 조선등 사회주의국가는 매년 12월 26일이 되면 공예품, 식품과도 같은 예물을 보내왔다. 모택동은 속속 보내오는 생일축하전보, 축하서신, 선물에 마음 속으로 기분이 좋지 않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75년 12월 26일, 왕년의 떠들석한 분위기가 다시 나타났다. 모택동은 더 이상 보내온 선물, 축하전보를 보지 않았다. 그저 목록만 훑어봤을 뿐이다. 그는 더 이상 이런 떠들썩한 것이 필요하지 않았고, 조용한 것이 필요했다.

 

이날, 모택동은 특별히 이전에 자신의 곁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불렀다. 아침 일찍, 모택동의 딸 이민(李敏), 이눌(李訥)과 오욱군(吳旭君), 유아국(兪雅菊)등이 모두 중남해의 수영장에 모였다. 갑자기 모택동의 침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모택동과 오랫동안 별거하고 있던 강청도 왔다. 이 몇해동안 강청은 모택동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특히 반년전에 모택동은 특별히 분부한 바 있다: "나의 동의없이 철문(鐵門)을 열어주지 말라" 모택동이 말한 철문은 그의 주택 가장 바깥에 있는 대문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명령은 강청을 겨냥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날을 모택동의 생일이었지만, 강청은 그래도 철문을 들어오지 못했다. 강청은 올 때 특별히 두 가지 요리를 가지고 왔다: 반두어탕(?頭魚湯), 육사초랄초(肉絲炒辣椒). 이것은 모택동이 아주 잘먹는 두가지 요리였다. 강청은 조어대에 있는 그녀의 거소에서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다.

 

생일식사때, 요리는 이전보다 풍성했다. 모택동은 반두어탕을 마시고는 기뻐서 말했다: '반두어탕이 아주 맛있다" 그리고 수저로 탕을 떠먹었다. 이번 식사때 모택동은 평소보다 즐겁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