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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모택동)

모택동의 중공최고지도자 지위확립과정

by 중은우시 2008. 5. 15.

글: 유계흥(劉繼興)

 

모두 아는 바와 같이, 1935년 1월에 소집개최된 준의(遵義)회의에서 실질적으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지위를 확립했다. 깊이있게 분석해보면, 이 '확립'은 단지 '실질적'인 것이고, 또한 막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1938년초까지,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지도자의 지위는 나중에서처럼 공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타격을 입었다. 하나는 장정 도중에 장국도(張國燾)가 중공중앙과 홍군의 지휘권을 탈취하고자 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1937년말부터 1938년초까지 왕명(王明)이 모택동을 대체하고자 기도한 사건이었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코민테른(공산국제), 소련공산당은 장개석의 국민당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과 홍군에게 장개석의 통일적인 지휘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원칙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코민테른은 왕명을 귀국하게 하여 중공중앙의 정책을 변경하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코민테른의 이해와 지지를 획득하고, 왕명의 통일전선정책에서의 우경적인 과오를 시정하기 위하여, 중공중앙은 1938년 3월 임필시(任弼時)를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업무보고를 하도록 했다. 코민테른의 지도자들은 임필시의 보고를 받고서, 중국항일전쟁과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에 대한 실질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6월 11일 회의를 개최하여, <<중공중앙대표보고에 관한 결의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서의 정치노선이 정확하다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7월, 코민테른 국제집행위원회 총서기 Georgi Dimitrov는 곧 귀국할 중국 주코민테른대표단의 단장인 왕가상과 후임자인 임필시를 접견할 때, 코민테른을 대표하여 중요한 지시를 내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인 모택동동지는 검증을 거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이다. 당신들은 중국공산당의 전체 당원에게 말해주라. 반드시 모택동 동지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로 지지하라고. 그는 실제투쟁에서 단련된 지도자이다." Dimitrov의 이 말의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또한 왕명 동지에게도 말해달라. 다시는 싸우지 말라고"

 

1938년 8월, 중공 주코민테른대표인 왕가상은 코민테른의 새로운 지시를 받아 연안으로 돌아간다.

 

9월 14일부터 27일까지, 중공중앙은 정치국회의를 개최한다. 회의 첫날, 먼저 왕가상이 코민테른의 지시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총서기 Dimitrov의 의견을 전한다. 이 의견은 아주 중요했다. 첫째는 "중공중앙의 정치노선이 정확하다"고 인정한 것이고, 둘째는 중공중앙의 지도자로 "모택동"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왕명의 코민테른 '흠차대신'의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중공중앙의 정치노선에 대하여 계속 다른 의견을 내놓을 기반을 상실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제6기 6중전회를 개최하여 모든 장애를 제거한다. 이유한(李維漢)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Dimitrov의 말은 회의때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우리 당은 한 단계 더 모택동의 지도자지위를 명확히 했고, 당의 지휘통일문제를 해결했다"

 

1938년 9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중국공산당은 역사상 중대한 의미가 있는 제6기 6중전회를 연안 교아구 천주교 교당에서 개최한다. 이는 1926년이래 회의참가자수가 가장 많은 중앙전체회의였다. 왕가상은 회의에서 코민테른의 관련문건과 Dimitrov의 구두지시를 전달한다. 회의에 출석한 왕명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모택동의 지도자 지위를 인정한다고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회의는 모택동의 중국공산당 지도자지위를 한단계 더 확립했다.

 

회의는 <<중공의 확대한 6중전회정치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여기서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중국정치국의 정치노선을 비준하고, 왕명의 우경적 과오로 인한 당의 업무 방해를 극복ㅎㄴ다.

 

준의회의후, 중공중앙은 장문천(張聞天)을 박고(博古)를 대체하여 총책임을 지도록 한다. 6기 6중전회전의 정치국회의에서, 이미 코민테른의 의견이 전달되었다: "영도기관중에서 모택동을 지도자로 한 영도하에서 해결한다" 진운등은 모택동에게 총서기를 맡기자고 제안한다. 나중에 모택동 본인의 의견에 따라, 이 문제를 6중전회에 올려 토론하지는 않는다. 당시 중공중앙의 총책임자인 장문천은 코민테른의 지시정신에 따라, 6중전회에서 먼저 모택동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당시 모택동은 이렇게 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장문천은 모택동의 의견을 존중하여,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장문천은 회의후에 적극적으로 업무를 모택동에게 이전한다. 그는 비록 회의를 계속 주재하기는 했으나, 모든 중대한 문제는 실제로 모택동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한다. 그러나, 모택동은 큰 줄기를 잡고, 구체적인 일은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일상업무는 여전히 장문천이 처리했다. 중앙비서국도 장문천을 따랐다. 다만, 중앙이 서명발송하는 문건과 전보등에서 언급할 때의 순서는 모택동이 제일 앞을 차지했다. 이때 당중앙의 영도업무는 실질적으로 모택동에게 완전히 이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직절차상, 장문천, 모택동이 당내 최고직위 이관을 정식으로 완성한 것, 즉 모택동이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에 정식으로 오른 것은 바로 1943년 3월이다.

 

장문천은 모택동을 존중했고, 큰 일은 모두 모택동과 협의했고, 모택동의 의견을 들었다. 그 후에 회의를 열어 토론했다. 모택동의 주장, 방침, 책략은 장문천을 통해서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집행되었다. 그 후에 문건으로 쓰여지고, 전보로 발송되었다. 이런 문서의 글은 장문천이 쓴 것이 많다. 전해지는 바로는 중앙자료관에서 현재 보존하고 있는 전보중에서 1935년 10월 섬북에 도착한 때로부터 1938년 10월 중공 6기 6중전회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장문천 개인의 서명 혹은 다른 사람과 연명으로 된 전보가 모두 451통이고, 그 중 "모락(毛洛)" 혹은 "낙모(洛毛)"가 연명된 것은 286건정도로 거의 2/3를 차지했다. 모택동은 사람들 앞에서 장문천을 "명군(明君)"으로 부르고, 장문천의 처인 유영을 "낭낭(娘娘)"으로 불렀다.

 

1943년 3월 20일, 중공중앙은 회의를 소집개최하여, <<중공중앙의 중앙기구조정 및 정간(精簡)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킨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치국은 모택동을 주석으로 선출한다. 모든 중대한 사상, 정치, 군사, 정책과 조직문제는 반드시 정치국회의에서 토론하여 통과시킨다. 서기처는 정치국의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조직적으로 정치국에 복종한다. 서기처는 모택동, 유소기, 임필시로 구성하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한다. 서기처회의에서 토론된 문제는 주석이 최종결정권을 가진다. 정치국 및 서기처의 아래에 선전위원회와 조직위원회를 둔다. 이 두 개의 위원회는 정치국과 서기처의 협조기관이다. 모택동은 선전위원회서기를 맡고, 유소기는 조직위원회서기를 맡는다. 장문천은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조직위원회위원이 된다.

 

장문천이 정식으로 서기처를 떠난다. 이번 직무변동에 대하여 그는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6중전회이전에 선전업무와 간부교육업무는 주로 장문천이 처리했다. 당연히 6중전회이후 선전과 간부교육은 장문천의 주요업무가 된다. 1939년 2월부터, 그는 간부교육부 부장(1940년초 선전부와 간부교육부는 합병하여 선전교육부가 된다. 부장은 여전히 장문천이다)이 된다; 1941년 3월 중앙은 간행물, <<해방>> <<공산당인>> 양대간행물의 확대편집위원회를 모두 장문천이 책임지도록 한다. 6중전회는 나중에 1939년초에 성립된 중앙서북공작위원회(섬감녕변구이외의 서북섬, 감, 녕, 청, 신, 몽 각성의 지하당업무를 맡았고, 특히 소수민족업무를 했다), 비록 장문천이 서기를 겸임했지만, 일상업무는 모두 나매(羅邁)와 가탁부(賈拓夫)가 책임졌다. 그리하여, 6중전회이후 연안정풍이전까지의 3년간, 장문천의 주요한 업무는 당의 이론건설, 간부교육, 선전문화업무등의 방면이었고, 실적이 탁월했고, 업적이 많았다.

 

장문천, 모택동간의 최고직무교체의 전과정을 보면, 아주 순조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택동 자신의 탁월한 지도재능과 당의 신뢰라는 근본적인 원인외에, 장문천의 고상한 품격도 관련된다. 장문천은 중앙에서 업무를 주재할 때, 모택동을 존중하고, 모택동을 보화고, 모택동등과 같은 배를 타고, 준의회의후 극단적으로 곤란한 시기를 같이 넘겼다. 그리하여, 최고직무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장문천은 시종 모택동을 지지했고, 점차 모택동의 전당 전군에서의 최고지도자지위를 확립하도록 하는데, 부인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모택동은 왕진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낙보(洛甫) 이 동지는 권력을 다투지 않았다." 장문천은 "이것은 나에 대한 가장 좋은 평가이다"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