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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태종)

당태종 이세민은 왜 무측천을 좋아하지 않았는가?

by 중은우시 2008. 2. 3.

글: 몽만(蒙曼)

 

무측천은 아주 뛰어난 여영웅이었음에도, 어찌 당태종의 궁중에서의 12년간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쓸쓸하게 시간을 보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무측천이 왜 당태종의 마음을 얻지 못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본다. 먼저 당태종이 어떤 여인을 좋아하였는지를 분석해 보자.

 

당태종은 어떤 여인을 좋아하였는가? 당태종이 평생 사랑했던 여인이 하나 있다. 그녀는 바로 장손황후(長孫皇后)이다. 장손황후는 당태종이 가장 귀중하게 여긴 여인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이치에 밝았으며, 13세때 당시 진왕 이세민에게 시집왔다. 이세민이 황제가 된 이후 자주 그녀와 군국대사를 논의하곤 했다. 그러나, 장손황후는 대부분 피하고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빈계지신, 유가지색, 첩이부인, 기감예문정사(牝鷄之晨, 惟家之索, 妾以婦人, 豈敢預聞政事,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합니다. 첩은 여인네의 몸인데 어찌 정치에 관여하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태종이 어떤 일을 묻더라도, 그녀는 거의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손황후는 그저 시미유염(柴米油鹽, 장작 쌀 기름과 소금 즉 자잘한 집안의 일상일)에만 관심이 있고, 정치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역사에 기록된 몇 가지 예를 들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세민은 소년영웅이었다. 그가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부친인 이연(李淵)과 함께 동으로 서로 정벌하러 다녔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연 집단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수들은 두건덕과 왕세충 등이었다. 이들을 모두 이세민이 굴복시켰다. 공로가 커지니 야심도 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왕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고 황태자가 되고자 하였고, 나아가 황제가 되고자 하였다. 이런 야심으로 이세민은 형인 태자 이건성, 동생 이원길 및 부친인 당고종과 갈등이 생기게 되고 갈등은 점차 첨예해 졌다. 이런 궁중의 위기와 긴장된 국면에서, 장손황후는 어떻게 하였는가? 그녀는 조심스럽고 주의깊게 움직였다. 이연에게는 며느리로서 효성을 다했고, 그의 환심을 샀다. 동시에 이연의 곁에 있는 후궁들과도 관계를 잘 유지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사실 이것은 이연의 신변에 자신의 눈을 심어두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연과 다른 아들들의 일거일동은 모두 이세민에게 보고되었다. 병법에서도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던가? 장손황후는 이세민이 적의 동정을 정확히 살피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둘째, 현무문사건 때에 이세민과 부친, 형제와의 갈등은 이미 공개화 되었다. 서로 직접 병기를 겨누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이세민은 친히 전투에 나섰다. 장손황후는 진왕부의 장병들을 격려했고, 그들이 힘껏 싸우도록 독려했다. 부부쌍방의 노력하에, 현무문사태는 성공을 거두고 이세민은 황제위에 오르고, 장손씨는 황후가 된다.

 

셋째, 이세민이 황제가 된 후에 정치에 힘썼다. 그는 자기가 잘못하는 것이 있을까 우려하여 자주 허심탄회하게 대신들에게 묻곤 했다: "내가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으면, 너희는 반드시 얘기해달라, 직언해달라" 신하중에 위징이 그의 이런 말을 가장 잘 들었다. 위징은 유명한 간신(諫臣)이다. 이세민에게 자기의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그의 직책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해서, 당태종으로 하여금 빠져나갈 구멍을 두지 않기도 했다. 하루는 조정에서 그가 한 얘기때문에 당태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당태종은 후궁으로 돌아온 후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고, 생각하면 할 수록 화가 났다. 자기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혼잣말을 했다: "이 시골 노친네를 죽여버려야지.." 장손황후는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화려하게 정식으로 차려입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당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이런 조복(朝服)은 중대한 행사나 있을 때 입는 옷이었다. 당태종은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물었다: "황후는 왜 이처럼 대례를 행하는 겁니까" 그러자 장손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첩이 듣기로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바른 말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위징이 감히 직언을 하는 것을 보니, 이는 황상께서 아주 영명한 군주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축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태종을 그 말을 듣고 얼굴을 활짝 펴면서 웃었다. 동시에 황후의 뜻도 이해했다. 황후의 이런 행동은 자신에게 황제의 기도를 가지라는 것이었고, 흉금을 바다처럼 넓게가지며, 여러 강물을 다 받아들여야 하지(海納百川), 자잘한 일을 가지고 신하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의미였다.

 

넷째, 장손황후는 아주 현덕(賢德)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너무 신경을 쓰는 일이 많다보니, 몸이 좋지 않았다. 36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병이 위독해지자,  황제와 황자들이 모두 조급해 졌다. 병이 깊으면 아무 의사나 찾는 법이다. 태자 이승건은 감옥에 갇힌 자들을 사면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그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장손황후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 만일 좋은 일을 해서 수명이 연장된다면, 지금까지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해도 더 효과가 없다면, 무슨 복을 더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그녀는 당태종에게 외척을 중용하지 말라고 권했다. "지금 나의 친가 사람들이 모두 관리를 지내고 있는데, 절대로 그들에게 아주 높고 중요한 지위를 맡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녀는 당태종에게 나에게 잘 대해주고, 나의 친가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려면 절대로 그들에게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하지 말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러달라고도 부탁했다. "살아있을 때도 한 여인으로써 천하에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죽어서 어찌 국가의 재물을 내 장례식에 낭비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녀는 검박하면서도 모범적인 황후였다.

 

이런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우리는 장손황후가 절대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정치의 어두운 점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행동을 모두 적당하게 하고,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하려도 애썼다. 그리하여 그녀가 죽었을 때 당태종은 나의 궁내에서 훌륭한 조수 한 명을 잃었구나라고 탄식했다. 이후 당태종은 다시는 황후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탑을 하나 만들어 탑에서 황후가 묻힌 소릉을 바라보곤 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장손황후와 당태종은 어려서 결혼한 사이로 서로간의 애정이 깊었기 때문에, 무측천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고, 이것만으로는 증거가 되기 힘들다고. 당태종이 어떤 여인을 좋아했는지를 장손황후와의 관계만 가지고 보기는 힘들다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한 명의 여인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이 여인은 아마도 무측천과 충분히 비교할만 할 것이다. 그녀는 당태종의 사랑을 깊이 받았던 여인인데, 이름은 서혜(徐惠)이다. 그녀는 문인가정에 태어났는데, 어려서의 별명이 '신동'이었다. 5개월대 말을 하고, 4살 때 <<모시>. <<논어>>를 읽고, 8살때 문장을 쓸 줄 알았고, 무측천이 궁에 들어갈때쯤 서혜도 입궁하여 재인(才人)이 되었다. 이러한 경력을 보면 무측천과 아주 비슷하고, 시작한 것도 비슷하다. 모두 재인이었다. 서재인은 입궁후에 글을 알고 이치에 밝았으며 국가대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당태종이 여러해동안 힘들여 나라를 다스려서, 국운이 날로 흥하는 것을 보자 점차 만족해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런 국운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당태종에게 글을 올려, 교만함을 경계하고 조급함을 경계하며 원래의 뜻을 잃지 말도록 권했다. 갈길은 아직 멀고, 나라를 세우는 것은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고, 처음과 끝이 같아지도록 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녀는 마치 장손황후를 보는 것과 같았다. 당태종은 그녀를 아주 좋아했다. 얼마되지 않아. 서재인은 서첩여로 승진했다 5품에서 3품으로 오른 것이다. 서첩여는 계속 국가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금방 충용으로 승격했다. 충용은 구빈중의 하나로써 2품이었다. 그리하여 서혜는 3품에서 2품으로 올랐다. 정관23년, 당태종이 서거하자, 서충용은 아주 슬퍼하였다. 그녀는 선제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를 지하에까지 따라가겠다고 맹서한 바 있었다. 그녀는 병이 들어도 약을 먹지 않고 금방 당태종을 뒤따라 죽었다. 사후에 그녀는 서현비(徐賢妃)로 추증되었다. 서재인에서 서첩여, 서충용을 거쳐 서현비까지 5품에서 1품까지 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무측천은 어떠했는데, 그녀는 시작때도 무재인이었고, 마지막에도 무재인이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서혜의 성격과 사람됨을 당태종은 무측천보다 훨씬 좋아했다는 것이다.

 

서현비와 장손황후의 두 사람을 보면, 우리는 당태종이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종합해보면 세 가지 측면이다.

 

첫째, 자기 위치를 지키고, 여인의 도리를 준수한다. 자기의 신분을 확실히 알아야하고, 일이 있으면 가장 앞장서서 일을 하더라도, 절대 공을 다투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지 말아야 하고, 영웅의 뒤에서 막후활동을 기꺼이 해내야 한다.

 

둘째, 가슴에 천하를 품고 있어야 하고, 큰 일을 하는데 모략이 있어야 한다.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고 비바람을 어깨에 지고 있다. 먼저 그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방법을 강구해내며,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후궁에서도 안목과 흉금과 정치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 온유하고 후덕해야 한다. 외유내강해야 한다. 일하는데는 반드시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황제의 체면을 살려주어야 한다. 장손황후처럼 우회적으로 뜻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먼저 첫째 사항을 보자. 자기 위치를 지키고 여인의 도리를 준수하는데 있어서 무측천은 불합격이다. 사자총사건(獅子총事件)에서 보듯이 그녀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모두 가만히 있는데 혼자 나서서 "첩이 길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황제나 다른 사람들은 고려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사항을 보자. 가슴에 천하를 품고 있어야 하고 큰일을 하는데 모략이 있어야 한다. 무측천은 이후에 확실히 아주 뛰어난 여자 정치가가 되었지만, 이 때는 아직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일찌기 말을 길들이고자 한 바도 있고, 서법을 열심히 수련한 바도 있다. 그녀는 당태종이 왕희지의 서법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매일 왕희지의 글자를 모방했고, 이것을 돌파구로 삼고자 했다. 나중에 그녀는 서예에서 일가를 이루기는 했지만, 말을 길들이는것이나 서예를 하는 것은 황제에게는 여흥오락이었다. 모두 정사(正事)는 아니었다.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강산이다. 그는 강산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여인을 원한 것이지, 그와 함께 놀아줄 여인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점에서도 무측천은 맥을 잘못 짚었다.

 

셋째 사항을 보자. 온유하고 후덕한 것은 무측천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무측천은 걸핏하면 칼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옛날 식의 엽기적인 그녀인 셈이다.

 

이 세가지 점에 있어서 무측천은 맞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상 그녀는 당태종의 궁중에서 기회를 잡기는 어려웠다.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보통사람이라면, 그저 포기하고 운명에 따를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절대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녀가 당태종에게서 기회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다른 목표에 고정시켰다. 누구인가? 그 는 바로 이치(李治)이다. 당태종의 아홉째 아들로 나중의 당고종이다. 화는 복끝에 나오고, 복은 화에 숨어있다. 화와 복의 사이에는 서로 전환되는 관게에 있다. 무측천의 강인함, 용감함, 드러내기 좋아하는 성격은 당태종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반대로 당태종의 유약한 아들인 젊은 태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것은 무측천에게 기회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천번지복의 대변신을 성공시킨다. 그녀의 운명이 변화함에 따라, 중국의 역사는 다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