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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태종)

당태종의 아들들

by 중은우시 2007. 6. 22.

당태종은 아주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자식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에게는 14명의 아들이 있다. 관례에 따르면, 장남은 태자로 삼고, 나머지 아들들은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세민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고, 이로 인하여 아들들은 모두 황제의 지위를 탐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아주 비참했다: 3명은 피살되고, 3명은 자살하였으며, 3명은 요절하고, 1명은 유폐되었고, 2명은 "서인"으로 폐해졌다. 서인으로 폐해졌다는 것은 이씨왕실의 족보에서 파냈다는 말이다. 그 후에 유배갔다.

 

당태종의 14아들들 중에서, 황후인 장손씨의 자손은 항산왕 이승건, 복왕 이태, 당고종 이치가 있고, 양비가 낳은 자손은 오왕 이각, 촉왕 이음이 있으며, 음비가 낳은 자손은 서인 이우가 있고, 연비가 낳은 자손은 월왕 이정, 강왕 이효가 있다. 위비가 낳은 것은 기왕 이신이 있고, 양비는 조왕 이복을 낳았고, 양씨는 조왕 이명을, 왕씨는 장왕 이운을, 후궁궁녀소생으로는 초왕 이관과 대왕 이간이 있다.

 

장남 이승건(李承乾)은 승건전(承乾殿)에서 태어나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황제의 지위를 계승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승건은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무덕3년, 항산왕에 봉해진다. 태종이 즉위하자, 황태자가 된다. 그때 나이 8살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른이 되면서 호색했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당태종을 무서워해서, 이중적인 생활을 했다. 태종의 앞에서는 충효를 언급하나 퇴청하여 태자궁으로 돌아오면 소인배들과 어울렸다. 그는 발에 병이 있어서 절었다. 그리하여 폐위될 것을 두려워했고, 당태종이 위왕 이태를 총애하는 것을 질투했다. 나중에 이승건은 심지어 모반까지 계획하여, 결국 하옥되고 서인으로 내려앉으며 검주에 귀양간다. 그리고 2년후 그 곳에서 죽는다.

 

이남은 초왕(楚王) 이관(李寬)이다. 그는 숙부인 초애왕 이지운에게 양자로 보내지나, 일찌감치 죽고,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삼남은 오왕(吳王) 이각(李恪)이다. 그는 바로 수양제의 딸인 양비 소생이다. 무덕3년에 촉왕에 봉해지고, 무덕10년에 오왕으로 바꾸어 봉해진다. 이각은 문무에 모두 뛰어났고, 당태종이 그를 매우 아껴서 태자로 삼으려고 까지 한다. 그러나, 대신인 장손무기(장손황후의 오빠)의 반대에 부딛친다. 장손무기는 나중에 장손황후가 낳은 이승건과 이태가 모두 끝장나자, 구남인 이치를 생각한다. 나중에 장손무기는 이치가 황태자가 된 후에 "모반사건"을 핑계삼아 오왕 이각을 죽여버린다. 이로써 후환을 없앤다. 이세민의 아들들 중에서 오왕 이각은 비교적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호평을 받던 사람이었는데, 아쉽게도 옥중에서 억울하게 죽어간다.

 

사남 이태(李泰). 그는 무덕3년에 의도왕(宜都王)에 봉해지고, 4년에 위왕(衛王)에 봉해지며, 정관2년에 월왕(越王)이 되며, 양주대도독의 작위를 받는다. 정관10년에 다시 위왕(魏王)으로 봉해진다. 그는 태자자리를 빼앗으려고 생각하여, 위왕당이 태자당과 대치하는 형국이 된다. 서로간에 상대방을 모함한다. 태자 이승건이 쫓겨난 후, 위왕도 유폐된다. 나중에 순양왕(順陽王)으로 바뀌어졌다가, 균주의 운향현으로 옮겨진다. 정관21년에 복왕으로 봉해진다. 35세에 죽었다.

 

오남 이우(李祐). 무덕8년에 의양왕(宜陽王)에 봉해지고, 그해에 초왕(楚王)으로 바뀌어진다. 정관2년에 연왕(燕王)으로 봉해지고, 10년에 다시 제왕(齊王)이 되고 제주도독이 된다. 그는 하루종일 건달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특히 사냥을 좋아했다. 장사(長史)가 권해도 듣지 않았다. 태조는 장사가 제대로 이우를 보좌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난 권만기(權萬紀)를 장사로 바꿔보낸다. 정관17년, 이우는 자객을 보내어 권만기를 죽여버리고, 반란을 획책한다. 결국 이우는 실패하고 내성에서 사사당한다.

 

육남 이음(李). 정관5년 양왕(梁王)에 봉해지고, 10년에 촉왕(蜀王), 익주도독으로 바뀌어진다. 그는 사냥을 하면서 전답을 망치는 경우가 많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방탕한 공자였다. 그리하여 태종이 노해서, "금수도 잘 돌보면 사람의 말을 듣게 되고, 철석(鐵石)도 제련하고 갈면 쓸 수 있는 도구가 되는데, 이음과 같은 자는 금수나 철석만도 못하구나"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고종 영휘4년에 이음은 서인으로 폐해지며, 유배지인 파주에서 죽는다.

 

칠남 이운(李). 정관5년 담왕(王)에 봉해지고, 10년에 장왕(蔣王), 안주도독으로 고쳐진다. 그는 향락을 즐기고 마음대로 하여, 주현의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당고종때 어떤 사람이 이운이 반란했다고 무고하자, 이운은 황급히 자살해버리고 만다.

 

팔남 이정(李貞). 정관5년 한왕(漢王)이 되고, 10년 월왕(越王), 양주도독이 된다. 문사에 능통하였고, 사람이 재주는 있었으나, 행동은 비열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왕 이원가, 노왕 이영기, 곽왕 이원궤와 무천천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음독자살한다.

 

구남 이치(李治). 정관5년에 진왕(晋王)이 되고, 나중에 당고종에 오른다. 비록 천자에 올랐으나 대권을 무측천에게 그대로 건네주고, 나중에 이씨종실이 무씨들에게 참살당하도록 만든다. 이는 모두 당고종이 못난 때문일 것이다.

 

십남 이신(李愼). 정관5년 신왕(申王)이 되고, 10년에 기왕(紀王)이 된다. 비록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유약하고 무능한 겁쟁이였다. 월왕 이정은 함께 무측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는 요청을 받고도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도 죽여버린다.

 

십일남 이효(李). 정관5년에 강왕(江王)이 되고, 정관6년에 요절함.

 

십이남 이간(李簡). 정관5년에 대왕(代王)이 되고, 그 해에 요절함. 후손이 없음.

 

십삼남 이복(李福). 정관13년에 조왕(趙王)이 되고, 18년에 진주도독이 됨. 평범하고 무능했으나, 무난히 일생을 마침

 

십사남 이명(李明). 정관21년 조왕(曹王)이 되고, 태종만년에 서인과 통모하여 모반을 꾀하다가 검주에 유배당함. 나중에 도독에 의하여 핍박받아 자살함. 이것은 아마도 태종이 암시하거나 지시한 것일 것임.

 

이 14명의 아들중 이치와 이복의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비명에 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