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서>>를 보면 이세민(李世民)과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연(李淵)이 둘째아들이 막 태어나려고 할 때, 길을 가다가 한 서생이 관상을 봐주게 되었다. 그 서생은 깜짝 놀라면서 "당신은 귀인이고, 아들도 귀하겠습니다.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줌)의 큰 임무를 맡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연은 놀라서 그 자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미 서생은 사라져버린 뒤었다. 집에 돌아오니, 둘째 아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이름은 "세민"이라고 지었다. 그 의미는 "제세안민"이라는 것이다.
이세민의 일가는 조적(祖籍, 조상의 원적)이 하북성 조현(趙縣)이다. 이연은 관농(섬서/감숙성)에서 태어났으며 스스로 조상때부터 관농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량왕(西凉王) 이호(李皓)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자신의 출신을 포장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산동 태행산지구에는 오대 명문집안이 있었는데, 왕(王), 노(盧), 최(崔), 이(李), 정(鄭)이 그들이다. 그중 이씨성은 선비족의 대성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씨일문도 몰락한 귀족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씨가 선비족의 대야부(大野部)의 성씨라고도 한다.
이것은 지금도 의문이다. 이연의 일가가 이전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고증해볼 수가 없기도 하고, 이연이 스스로 서량왕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집안을 그저 성씨가 같은 옛날 높은 사람과 연결시킨 것인지도 명확치 않다.
당나라때 소수민족과 한족의 구분은 아주 모호했다. 당나라때에는 북방민족간에 융합이 많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수양제때 돌궐인들은 강제로 한복을 입게 되었고, 북위 효문제는 민족간의 교류정책을 시행하여 같은 등급이면 통혼할 수 있게 하였다.
이뿐 아니라, 대신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소수민족 출신이었다. 하나는 문화적인 면이 민족간의 유대를 연결시켰다. 문화발전에 도움이 되면 소수민족이든 한족이든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경제적인 면인데, 당나라때는 경제적인 번영을 중시하여 각민족들에 대하여 관용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고증가능한 역사자료에 의하면, 당태종 이세민의 조모, 즉 이연의 모친은 독고씨이다. 바로 수양제의 황후와 자매간이며, 한족이 아니다. 그래서 이세민과 수양제간에는 이종사촌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모친인 두씨도 선비족이다. 이연의 부계혈통에 대하여는 역사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학계에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선비족 대야부라는 설, 하남의 몰락한 이씨라는 설, 노자의 후손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북방소수민족의 풍습중에는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서모를 취하는 습속이 있다. 또한 한 집안의 남자가 처 1명을 공유하는 습속도 있다. 왕소군의 이야기에서 왕소군이 죽은 후에 자기 친생이 아닌 두 아들에게 시집간 사례도 전해진다. 당나라의 제왕역사중에도 이와 유사한 난감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태종 이세민, 무측천 및 당고종 이치의 관계는 난륜이라고 할 수 있다. 당태종 이세민은 무측천이 14세때 입궁시켜 재녀로 삼았다. 당태종이 죽은 후, 무측천은 감업사의 여승이 되었는데, 당고종이 즉위한 후 무씨를 불러 후궁으로 삼고 소의에 봉했다. 몇년 후에는 당고종 이치가 황후로 삼았다. 그 동안 당나라초기의 원로중신인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배염, 정무정등의 사람들이 무측천이 선황을 모신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고 간했으나 당고종 이치는 듣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양귀비도 마찬가지 사례이다. 양귀비는 원래 당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처였다. 그러나 현종이 데려와서 귀비로 삼았다. 이처럼 이씨황실에서 일어난 한족들 입장에서의 난륜관계는 혹시 이들의 혈통이 한족이 아니라 북방소수민족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당나라는 북방소수민족의 풍습을 많이 따랐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오랫동안 북방민족과 혼거하여, 한족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북방오랑캐의 습속을 본받았던 것이다. 당나라의 여성들은 축국, 기마, 수렵등의 생활을 자유롭게 즐겼으니, 역대 어느 왕조보다 개방적이었던 사회였다.
정관연간에 당태종은 동돌궐을 진압하고, 힐리칸을 포로로 잡아서, 북방의 위협을 제거한다. 5년후, 토곡혼을 평정하고, 그왕인 모용복윤을 포로로 잡는다. 정관14년에는 고창국을 평정하고 이곳에 서주를 둔다 그리고 교하성(지금의 신강 투루판의 서쪽)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한다. 만년에 당태종은 친히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당태종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일생을 전쟁과 함께 보낸다.
이세민의 신세내력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고학자들은 당태종 이세민의 황릉인 소릉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증거들이 나왔다. 역사서에는 소릉에 대하여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소릉은 당태종 이세민의 묘로서 내외의 두개 성이 있다. 외성유적지는 이미 고찰하기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외성문안에 헌전(獻殿)을 두고 당태종 이세민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물을 놓아두었다. 북문은 현무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마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원래 14개의 번추(蕃酋, 오랑캐우두머리)의 석조상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릉육준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은 14개의 번추상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그 번추의 석조상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릉육준'은 아직도 서안 비림박물관의 석각예술전시실에 보존되고 있다.
"소릉육준'은 확실히 이세민이 남긴 또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전문가들이 돌궐어를 사용하여 말들의 이름에서 산지, 내력, 종류, 의미, 배장습속을 풀어냈고, 천년간 묻혀 있던 소릉육준의 비밀을 풀었다. <<돌궐문제연구논문집>>에 의하면 말은 돌궐인들이 항상 함께하는 반려이고, 평상시 유목생활을 하고, 전쟁시에는 함께 전쟁터를 누빈다. 돌궐의 장례습속에는 말의 공로를 추도하는 독특한 습속이 있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죽은 후 수하가 말을 타고 죽은 자의 묘를 둥글게 돈다. 그 후에 말을 죽이거나 산채로 묻는다. 돌궐귀족이든 일반 유목민이건 죽은 후에는 모두 말과 함께 묻힌다. 다만 수량이 다를 뿐이다.
중국의 황릉중에서 왜 유독 이세민의 소릉에만 전마의 석각이 있는 것일까? 당태종의 독특한 묘장형식은 돌궐의 습속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가. 소릉이 향후 개방된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소릉의 안에서 확실한 답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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