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성명(徐星明)
수말당초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자치통감>. <<구당서>> <<신당서>>등 사서이든, <<수당연의>> <<와강연의>> <<설당>>등의 연의소설이건, 아니면 현대의 일부 역사연구문헌에서 근년에 출판된 <<정관장가>> <<정관지가>>등등의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형형색색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이세민(李世民)을 거의 십전십미의 완벽한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중국의 역대황제를 살펴보면, 이세민은 영명신무(英明神武), 인재를 발탁하는 것,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 전쟁치국에 있어서 그리고 당나라의 통일천하에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공로를 세운 것이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찬양받는 정관지치를 열었다는 점, 그리고 이후 대당성세의 견실한 기초를 닦았다는 점등 역사에 대한 공헌에 대하여는 전혀 의문이 ?고, 일대영주(一代英主)라고 할만하다. 역사상 그와 고하를 비길만한 제왕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사학가나 소설가, 드라마극작가, 감독이 한목소리로 그의 공덕과 재능을 극력 찬송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는 어쨌든 승리자의 역사이다. 중국의 모든 소위 정사(正史)는 당시 통치자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간여를 받으므로 한계가 없을 수 없다. 즉, 통치자의 장점과 정치적 업적을 과장되게 찬양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은 가리거나 간략히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실패자에 대하여는 사실의 진상과 관계없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그들의 단점과 문제점은 크게 드러내고 과장한다.
정권을 잡은 자의 통치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들의 정치적업적과 장점은 더욱 많아진다. 소설, 드라마에 있어서는 대체로 역사서적을 근거로 하여, 전형적인 인물형상을 만들고, 사건을 묘사하는데, 뛰어난 사람은 더욱 뛰어나게, 나쁜 사람은 더욱 나쁘게 그리게 되어 역사의 진실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세민을 묘사한 여러 학술연구와 문학작품중에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비록 <<자치통감>>등의 사서에서 작가는 역사가가 원래 지녀야할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행간에 숨겨서 아주 간략한 솜씨로 그의 다른 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아주 불충분하다. 역사의 진상을 보다 깊이 검토하기 위하여, 우리는 역사서중에서 아주 고귀한 행간의 의미를 진지하게 분석해보고, 감별해서, 이세민의 다른 일면을 '폭로'함으로써 역사인물에 대한 비교적 공정한 평가를 해봐도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떤 위인이라도 그의 작아지는 일면이 존재한다.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다. 모택동과 같은 위인도 그의 부족함이 있고, 심지어 아주 잘못한 면도 있는 것이다. 이세민은 봉건제왕으로서 그의 성격, 그의 일생경력은 보통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장점을 가진 외에, 그의 야심에 넘치고, 인정과 의리가 없이, 이기적이고 흉악하며, 심지어 극단적으로 우매한 일면도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이세민은 부친 이연으로 하여금 병주(태원)에서 의거를 일으키게 한 때로부터 장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이후 홀로서 한 국면을 감당하여, 설인과, 이궤, 송금강,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 등등을 평정한 때까지, 대당왕조의 건립과 공고에 기여한 공훈은 탁월하다.
만일 봉건왕조의 '입적이장(立嫡以長, 후계자는 적자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세운다는 것)'의 구습을 생각지 않는다면, 그를 대당황조의 합법적인 후계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사실상, 이연은 처음부터 이 아들을 아주 깊이 사랑하고 아꼈다. 무덕원년(618년) 6월, 이연이 막 장안에서 황제에 올랐을 때, 바로 이세민을 태자로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런 뜻을 면전에서 밝힌 바도 있다. 만일 이세민이 당시에 시원스럽게 이 상을 받아들였다면, 그의 뛰어난 능력과 일처리의 심모원려한 처리방식으로 봐서는 그는 분명히 수중에 장악한 기득권을 꽉 휘어잡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노릴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나라조정의 황실에 나중의 경천동지할 현무문의 변과 같은 피바람나는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연의 당시 이러한 호의는 이세민에 의하여 완곡하게 사절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석해봐야 한다. 이세민이 눈앞에 노이고 그가 꿈에도 그리고, 반드시 얻으려고 한 태자의 지위를 싫다고 한 것은 그가 너무 어리고, 생각이 비교적 단순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시의 사상경지가 비교적 높아서 '입적이장'의 옛법도를 어기고 싶지 않아서, 자원해서 그의 형인 이건성에게 양보한 것인가? 대답은 역시 부정적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세민은 그의 부하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때 방현령이 극력 저지했다: "오늘날 천하가 어지러운데, 축록중원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는 공을 세우고 덕을 쌓을 시기입니다. 공이 만일 이 시기에 서열을 어기고 태자위를 차지한다면, 명목은 후계자이지만, 군을 이끌고 출정할 기회는 없어지며, 호랑이 입에 들어간 꼴이 되며, 병권은 전부 내놓아야 합니다. 천하가 안정되었을 때, 공에게 공도 없고 덕도 없다면, 세력이 약하고 힘은 없을 텐데 어떻게 자리를 보전하겠습니까?"
바로 이 짧은 몇 마디 말에, 이세민의 당시 심리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원래, 이세민은 당시 태자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백이숙제와 같은 겸양의 품성을 지녀서도 아니고, 군을 이끌고 출정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나중에 후계자가 되어 황위를 계승할 수 있는 경력을 쌓을 기회를 놓칠까봐 걱정한 것이다. 즉 그의 형과 황위를 다툴 근거와 자격이 없어질까봐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꾹 참고 나서지 않으며 잠시 '2선으로 물러나' 있기를 스스로 원한 것이다.
사실상, 이건성은 태자가 된 후에 매번 병사를 이끌고 출정하고 싶었으나 여러 신하들이 '태자는 국가의 후계자인데, 가볍게 출정해서는 안된다"는 간언때문에 저지되었고, 그의 군사적인 재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우고 인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세력을 확충할 기회를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이세민보다 훨씬 못하게 되었다. 이를 보면 이세민과 방현령의 장기적 안목과 뛰어난 심기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세민이 황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은 최소한 이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때부터 이미 일관된 장기적이고 완벽한 후계자지위를 차지할 기본방침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은인자중하는 심모원려는 일반인이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세민의 황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에 대하여 우리는 사서에도 여러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방현령이 이세민에게 의탁할 때, 이연은 아직 황제를 칭하지도 않았다. 방현령이 오자 가장 중시한 것은 인재모집이었다. 그리하여 이세민의 존중을 받는다. 이세민은 득의하여 자주 좌우에 말했다: "본왕의 신변에 있는 (방)현령은 광무제 전전의 등우(鄧禹)와 같다" 즉, 이세민은 그 때부터 스스로를 황제에 비유한 것이다.
무덕4년 상반기에 이세민은 군을 이끌고 두건덕과 왕세충을 섬멸했다. 동도(東都, 낙양)에 들어간 후, 전성의 명승지를 둘러본 후, 이 새 도성은 특히 현인궁 황궁어원이 아주 웅장했고, 취원서원의 경치가 좋았다. 내심으로 떠나기 싫어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장안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나중에 봉덕이등이 극력 권하자 어쩔 수 없이 회군을 명했다. 이세민이 왜 동도를 떠나기 싫어했던가? 사서에는 명확히 적혀 있지 않다. 심지어 이 일을 직접적으로 적지도 않았다. 그저 나중에 이건성의 심복이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조심하라고 권하는 과정에서 그의 입을 빌어 이세민이 이렇게 머물렀는데, 그 목적은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 속으로 중원에 새 왕조를 세우고 싶어하는 것일 거라고 말한다.
이세민의 이 측면의 거동은 <<자치통감>>에도 명확히 드러난다. 무덕9년 정월, "진왕 세민은 태자 건성, 제왕 원길과 사이가 벌어진다. 낙양은 명승지이다. 조정에 변고가 생기면 나가서 그곳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행태공부상서 온대아가 낙양을 지키게 했는데, 진부 차기장군 장량 장좌우 왕보등 천여명이 몰래 산동호걸과 결탁하여 변고에 대비했다. 금과 비단을 많이 내주어서 그들이 쓰게 했다" 여기에서 볼 때 우리는 이세민이 일찌감치 낙양이라는 땅을 마음에 두고 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전후시간, 처지가 다르고, 계산이 달랐을 뿐이다.
그가 이전에 낙양에 오래 머무른 것은 낙양에서 할거하고 지방왕이 되어 자신이 향후 천하를 노리는 근거지로 삼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온대아로 하여금 낙양을 지키게 한 것은 그리고 장량을 시켜 대랑의 금은을 낙양으로 보내게 한 것은 중원각지의 지방수비장수들에게 상을 내리고 인심을 널리 얻기 위한 것이다.이로써 하남, 산동을 공고히 하여 근거지로 삼기 위한 것이며, 나중에 만일 경사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중원의 대후방을 퇴로로 삼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는 불패의 패를 하나 가지게 되는 거시다.
뒤의 이 조치에 대하여, 이연도 이세민의 속셈을 한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이세민의 태자위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죽여버리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장량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형부에서 심문을 한다. 그러나 장량이 죽어라 자백하지 않아서 아무런 성과가 없이 끝난다.
마음 속에 태자위를 빼앗겠다는 장기적인 계획이 있으므로, 이세민은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을 때는 당분간 낙양에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없었다. 다만, 낙양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후,먼저 고려한 것은 역시 일관적인 태자탈취방침이라는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이연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지는 것을 틈타, 나라를 위하여 널리 인재를 모은다는 기치를 내걸고 상소를 올려 '문학관'을 건립하겠다고 요구한다. 그
리고 천하의 엘리트를 모두 자기의 문하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금방 예기한 목적을 이룬다. 원래 인재가 넘쳤던 천책부는 더욱 금상첨화가 되고, 이름을 더 날린다. 그중에는 대행태사운낭중 두여회, 기실고공랑중 방현령, 우지녕, 군자제주 소세장, 천책부기실 설수, 문학학사 저량, 요사렴, 태학박사 육덕명, 공영달, 주부 이원도, 천책창조 이수태, 기실참군 우세남, 참군사 채윤공, 안상시, 저작좌랑 섭천책부기실 허경종, 설원경, 태학조교 개문달, 군자전장 소훈등 18학사는 세상에 이름을 날린다.
이세민은 이들 인재를 끌어모으는데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문학관이 효율적으로 운용되도록, 그는 18학사를 매일 3팀으로 나누어 당직을 시키고, 대우를 아주 잘 해주었다. 그 본인도 자주 문학관에 친히 나타나서, 각 학사들과 문장전적을 논의했다. 광범위하게 문학관의 명망을 퍼트리기 위하여, 그리고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오게 하기 위하여, 이세민은 당년 연소왕이 황금대를 지어 현인들을 모았던 방법을 본떠, 고직 영입본으로 하여금 18학사의 화상을 그려 걸어놓게 하고, "18학사관"이라고 하였다. 이 조치가 나오자, 조야는 들썩인다. 각지의 현인능사가 언젠가 천책부 문학관 학사가 되려는 생각을 갖고, 그것을 영예로 생각하여 서로 찾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이세민의 집은 장안성의 소조정이 된다.
이세민이 이처럼 마음대로 야망이 드러내게 행동하고, 음으로 양으로 여러가지 조치를 취할 때, 태자위탈취를 위한 준비계획은 그렇게 장기적이고 그렇게 충분했으니, 자연히 다른 사람들도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주요한 적수인 그의 형인 태자 이건성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자기의 친동생인 이세민의 행위에 대하여 그는 그때 어떻게 대처했는가?
최후의 패배자로서 사서와 각종 문학작품에서 이건성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나쁘다. 예를 들면, (1) 이원길과 함께 후궁과 음란한 일을 하고, 독주로 이세민을 죽이려 한다든지, 이세민을 이기기 위한 목적에서 부에 2800명의 '장림군(長林軍)'을 두었다; (2) 이연이 이세민과 이원길을 데리고 인지궁에서 피서하는 기회에 난장 이주환, 교위 교공산을 보내어 경주자사 양문간으로 하여금 거병하게 밀약하고 이원길이 안에서 호응하여 이세민을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3) 사냥때, 고의로 나쁜 말을 이세민에게 주어, 그의 생명을 노리고자 하였다; (4) 이세민의 수하용장 위지공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마차가득 금은과 후한 예물을 집으로 보냈다.....어쨌든, 이건성은 나쁜 사람이다. 이세민이 결국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서 형과 동생을 죽이는데 이것은 완전히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부득이하게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할까? 여기에는 사관들이 정권을 잡은 사람의 권세에 눌려, 사실을 고치거나 과대한 협의가 없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서에서도 황제의 외삼촌 즉 이씨형제의 친외삼촌인 두궤의 입을 통하여 약간이나마 정보를 제공해준다. 즉, "태자는 성격이 인후(仁厚)하고, 진왕(이세민)은 심계가 뛰어나다" 충분하다. 이말 한마디이면 충분히 문제가 설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서에는 또 이세민이 등극한 후, 한담한다는 명목으로 말을 돌려서 사관인 주자사가 있는 곳에서 당금왕조의 역사기록을 살펴본다. 살펴본 후, 주자사가 현무문의 변에 대하여 묘사한 것이 '너무 간략하다'고 불만을 진다. 그는 특히 이전에 발생한 일부 사실에 대하여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주자사에게 현무문의 변에 관하여 다시 고쳐 쓰고, 일부 반드시 써야할 것을 제대로 쓸 것을 건의한다. 주자사는 고집이 센 사람이어서 명을 따르지 않는다. 이세민은 할 수 없이, 승진을 명목으로 그의 권한을 뺏고 더 높은 자리로 보내버린다. 그리고는 다른 심복 저수량, 허경종으로 하여금 주재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뜻에 따라 다시 역사서를 기록했다(이 두사람은 이전까지는 이름이 없었으나, 저수량은 나중에 일약 이세민의 임종을 지키는 중신이 되고, 허경종도 계속 승진하여 고종때에는 중서령의 고위직에 오른다. 나아가 고종과 무측천의 제일총신이 되는데, 대체로 그들이 이세민의 뜻에 따라 사서를 고쳐쓴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저수량 허경종이 새로 '창작'해낸 역사가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 역사를 재검토할 충분한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먼저 이건성, 이원길 형제가 후궁에 음란한 짓을 했다는 "이비사건(二妃事件)"을 보자. 이 사건의 진실이 어떤지를 우리는 더 이상 조사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이건성 형제와 장, 윤 이비가 이런 남부끄러운 짓을 했다면 일단 누설되면 그것은 일반적인 죄행이 아니라, 이건성의 태자지위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 윤 이비의 입장에서도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인지 상상하만해도 무섭다. 아마도 목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각자의 친정사람들까지 연루시키게 된다. 이런 생사에 관련된 것을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리스크가 이렇게 큰 줄을 알면서도 그들이 간크게 일을 저지른 것이라면, 어쨌던 감출 수 있는 한 감추고 몰래 했어야 한다. 왜 하필이면 누각에서 고래고래 소리친단 말인가? 우연히 누각아래를 지나가던 이세민이 다 들을 정도로.
만일 그들이 동일한 시간에 함께 정신이상이 되지 않은 한, 이런 미친 짓은 정말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후손으로서 우리는 선조의 주장을 존중하기로 하고, 이 일은 진짜라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즉, 이세민이 이 사건을 처리하는 진실한 마음상태이다. 이세민은 당시 문밖을 지나가다가 이 일을 발견한다. 그는 왜 자기의 허리띠를 문에 걸어놓았는가? 그때, 쌍방의 후계자다툼은 이미 공개화되지 않았던가? 이후 현무문의 변때 이세민은 그렇게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고, 정을 단호히 끊었는데, 그가 당시에 더욱 직접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현장에서 적발하고 현장범으로 체포하였다면 일거에 이건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가 정말 대국을 고려하여 그런 하책을 썼던 것인데, 나중에 오히려 자기가 거꾸로 뒤집어써서 변명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비교적 믿을만한 추측으로는 이세민이 현장에서 이건성형제의 대역무도한 스캔들을 발견했는데, 첫번째 반응은 기뻐한 것이 아니라, 바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현장에서 두 형제의 불효한 행위를 질책하고, 이들이 저지른 엉터리없는 난륜의 대죄를 질책하고 바로 이연에게 보고하여 두 사람을 모두 깊은 구덩이로 몰아넣고 영원히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세민은 당시에 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유일한 가능성은 그가 다시 생각해보니, 혼자서 뛰어들었다가는 오히려 거꾸로 당할 수 있으며, 입이 백개라도 변명하기 어렵고, 오히려 주도권을 잃게 될 것이기때문일까? 바로 궁중시위를 모아허 현장에서 간통범을 잡을 수는 없었을까?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면 사정이 너무 민감하여 일단 퍼지게 되면 황실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천고의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일까. 이세민은 이연이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 그가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건성, 이원길 두 사람이 질책을 많이 받겠지만, 화가 이세민에게도 미쳐서 그가 일처리를 잘못했다고 하여, 전 황실의 체면을 더욱 고려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그를 멀리하고 싫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연의 아들은 모두 20여명에 달하고, 만일 세번째 적자에 극도로 실망한다면, 아마도 서자들 중에서 괜찮은 아들을 태자로 세울지도 모른다. 방휼지쟁에 어부지리를 안길 수도 있다. 정말 그런 결과가 된다면 이는 총명한 자가 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옥대를 걸어놓아 경고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그 뜻은 그 두형제에게 너희가 한 추악한 일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이후에 조심하고 내 앞에서 잘난척 하지 말라. 나를 건드리면 그것을 까발리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일까?
다시 독주에 관한 것을 보자. 만일 진지하게 분석해 본다면, 진실성이 매우 의심된다. 이건성이 만일 그렇게 마음이 독랄했다면, 이세민을 죽이고자 하였다면, 제대로 하지 못해서 술 안에 독약을 충분히 넣지 않은 것일까? 다시 만보를 양보하여, 독약이 부족하지 않았더라도 이세민은 당시 홀로 이건성의 세력범위내에 들어갔고, 이미 독주를 마시고 피를 몇승이나 토했는데, 이건성은 왜 아예 시작한 김에 그 자리에서 칼로 내리치지 않고, 눈을 멀겋게 뜨고 이신통이 그를 부축해서 진왕부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까? 그리고 그에게 다시 반격할 기회를 주었을까?
그러므로, 필자는 이 사건도 허구라고 본다. 이세민이 등극후에 저수량등에게 지시해서 창작해낸 것이다. 아니면 이세민이 그 자리에서 일부러 이런 사기극을 벌여서,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린 후, 당형인 이신통으로 하여금 현장증인이 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이건성이 어떻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세민을 해치려고 하는지를 이연에게 보고하여 이연의 진노를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상, 이건성의 마음이 악독하여 그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러한 기회는 아주 많았다.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무서운 것은 노리는 사람이다. 동궁의 주요한 괄료는 태자세마 위징, 태자중윤 왕규, 사인 사사모, 태자외삼촌 두궤, 동궁서자 배구, 정선과, 솔경령 구양순, 전선감 임찬, 직전서방 당림, 농서공부제주 위정, 기실참군사 유포, 좌영대도독부장사 당헌 내지 이원길 등의 사람이 있었다. 이세민의 야심이 너무나 명백하였고, 기세등등하게 핍박하였으므로 모두 진언한 바 있다. 이건성에게 먼저 손을 써서 이세민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고.
그러나, 이건성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성의 성격이 고집이 세서, 다른 사람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때문인가? 아니다. 역사상 진실한 이건성은 비록 적지 않은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도 싸움을 잘하고 부하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등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예를 들면, 무덕5년, 유흑달의 일군이 평정되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기세가 날로 강해져서 중원의 큰 지역을 장악했다. 이연은 이세민의 야심이 노골화되자,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건성은 동궁부에서 여러 관리들과 논의함녀서, 적극적으로 자신이 나서겠다고 한다. 그리고 금방 이연의 동의를 받는다. 유흑달과 서로 대치할 때, 위징이 '견벽청야한 후 그와 대치하여 양식이 떨어지면 치자'고 한다. 그리고 추가로 분석하여, '이전에 흑달을 격하파여 그의 장수들이 모두 죽었고, 처자가 포로가 되었는데, 제왕이래로 조서로 그의 일당의 죄를 사면하였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지금 포로를 풀어주고 위로하여 보낸다면 앉아서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건성은 그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인다. 소탕과 초무(招撫)를 겸비하는 수법으로 항복한 장병을 죽이지 못하게 엄금하고, 원래 포로로 되었던 유흑달의 부하를 모두 풀어주니, 확실히 백성을 생각하고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계책이었다.
나중에 유흑달이 패배하여 도망치게 된다. 이건성은 원래 끝까지 추격하고자 하나, 다시 위징이 그를 말렸다. 그에게 각지의 관리들로 하여금 붙잡으라고 명령을 내리면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결국 위징의 사전생각대로 유흑달 형제는 무덕6년 정월 요주로 도망갔을 때, 그의 부장, 요주자사 제갈덕위에 의하여 생포된 후 당나라군영으로 보내어진다.
그리하여, 이건성이 이세민을 대하는 문제에서 여러 사람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손을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히 그의 사람됨이 후덕하고 골육에 대한 정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원래 이세민에게 먼저 손을 쓰거나 그를 사지에 몰아넣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건성의 후덕함을 말하자면, 우리는 두가지 전형적인 사례를 들어 입증할 수 있다.
첫째 사건은 이건성이 유흑달을 정벌하 ㄹ때 이연이 이 전쟁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위지공, 진숙보, 정지절등 이세민의 수하 심복장군들을 그에게 보내어 지휘하게 한다. 이건성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좋은 기회에 그들을 하나하나 전장터에서 적군의 손에 죽게 할 수 있었다. 혹은 죄명을 날조하여 그들을 군법에 따라 처결할 수도 있었다. 이세민이 억울하더라도 어디에 호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원길이 이번에 총사령관을 맡았다면,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완벽귀조(完壁歸趙)하여 진왕부로 돌려보낸다.
두번째 사건은 무덕7년 6월, 이세민이 이원길의 집에 몰래 병사를 기르고 있으며, 몰래 병기와 갑옷을 감추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암중으로 사람을 시켜 조정에 고발한다. 이연은 이를 듣고, 바로 '순시'를 한다고 하며 이건성, 이세민을 이끌고 제왕부에 진상을 조사하러 간다. 이원길이 소식을 들은 후, 수하 모사 영구사 등의 건의를 받아, 집에 무사를 매복시켜, 그 자리에서 이세민을 죽여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부친을 핍박하여 선위(禪位, 황제위를 물려주는 것)하게 하여 이건성을 황제로 앉히려 한다.
다만, 이원길이 손을 쓰기 전에 암중에 기회를 노리며 이건성에게 말하는데, 그의 동의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건성의 성격이 아주 인후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단연코 거절하여, 이번 쿠데타계획은 무산된다. 생각해보라. 무덕7년 6월, 이건성과 이세민의 갈등은 이미 깊었고 공개화되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성격이 인후하여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이건성을 '인후'한 사람이라고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이어서 발생한 몇 가지 사건은 더욱 음미할 만하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이건성이 "장림군"을 조직하고 이주환, 교공산을 파견하여 암중에 양문간과 이세민을 모살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인데, 모두 이건성이 이세민을 죽이지 못하도록 말린 무덕7년 6월에 발생한다. 작자는 심지어 중간에 전혀 간격도 두지 않고 한꺼번에 연속으로 이 몇가지 사건을 기록한다. 사서를 여기까지 읽다보면, 의심이 너무나 많이 든다. 송나라의 사마광 노친네가 너무나 유머스럽고 우스개를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금방 이건성의 성격이 인후하다고 해놓고는 곧이어 연속으로 그의 두가지 성격이 인후하지 않은 커다란 대죄를 열거하고 있다. 동궁에 자기의 개인부대를 조직하고, 이는 국가에서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후계자로서 미래의 황제로서 조정은 태자의 안위를 잘 보호해주고 있고 필요한 시위도 잘 보내주고 있는데, 다시 사사로이 군대를 조직할 것은 무엇인가? 이건 반란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이어서 이주환, 교공산을 보내어 양문간으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켜 인지궁으로 가서 이연과 함께 피서온 이세민을 죽이도록 하는데, 이는 모반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명확하게 스스로 모순되는 역사기록은 사마광의 착오에 의하여 잘못 적은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필자의 생각으로 그럴 리는 없다고 본다. 자치통감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바로 사마광이 역사를 쓰는 태도가 아주 엄격했고, 널리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이한 기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필자는 근원을 추적해보면, 사정은 아마도 이세민이 사관을 바꾼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사관에게 이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완벽하게 그리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당시의 저수량은 이세민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하여, 분명히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담하게 허구를 조작하고, 실제 있었던 어떤 일을 거두절미하고 장관이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세민의 요구에 기본적으로 맞추었을 것이다.
그 후에 이를 채워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저수량은 사관이 가져야할 직업적 도덕심에서,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할 수 없이 붓끝에 명확한 흠결을 남겨 두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눈치빠른 사람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나중의 사마광은 아마 여러번 생각해본 다음에 선배사관의 고충을 이해했을 것이고, 고치기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원본을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아마도 누군가 질문을 할 지도 모른다. 너의 추측에는 헛점이 없는가? 당나라의 저수량에게 부득이한 고충이 있다고 치더라도, 송나라의 사마광이 왜 그것을 고려해준단 말인가? 그가 왜 이전사람이 한 일을 덮어주어야 하는가?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마광이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역대통치자들이 사서의 기록을 중시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후세의 통치자들에게 선인의 경험과 득실을 따져서 의사결정의 근거로 삼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실수를 덜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먼저 정책결정권이 있는 사람이 읽어서 참고가 되어야 한다. 송나라는 당나라이후이다. 그러나그의 정권은 직접 당나라에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다. 이당황조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 송나라는 황권개념을 제창하기 이하여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와 관련없은 전대의 황제를 칭송하는 것이었다. 이세민과 같이 당나라의 창업주는 크게 찬양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큰 배경하에서, 사마광은 가볍게 금기를 범하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사건만 얘기해보자. 그 책에서 기록하고 있는 순서에 따라 진실성이 얼마나 될 것인지를 따져보기로 하자.
먼저, '장림군'의 일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우리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이건성은 왜 장림군을 만들었을까? 설마 그는 막 이원길의 흉살계획을 저지했는데, 다시 이 군대를 조직하여 이세민을 대적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이건성의 대뇌신경은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부황의 책망을 들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바퀴를 힘들게 돌아서, 불법군대를 조직하는 강경책을 써서 승리의 확신이 없는 전투를 준비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이 일이 만일 사실이라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즉, 이건성은 이세민을 가볍게 처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니 다른 모사들이 잘못했다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여러 사람들이 말이 많으니 귀찮아서 이세민이 가진 실력을 다시 평가해본다. 이렇게 해보니, 문제가 있었다. 동궁이 가장 걱정한 것은 이세민은 오랫동안 전투에 참가하여, 1200명의 현의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각각 진숙보, 위지공, 적장손, 정지절의 네명의 용장이 거느리고 있었다. 전투력이 아주 뛰어났다. 결렬한 전투에서마다 이들이 앞장서서 싸워이김으로써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세민이 왕세충, 두건덕둥 강적과 결전을 벌이기 전이면 매번 친히 적군의 진영의 허실을 탐색했는데, 모두 이 군대의 일부 경위임무를 담당하는 자들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큰 싸움이 끝나고 나면, 사서에서 이 군대를 다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이 부대의 장수는 진왕부에서 이세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연이 성지를 내려 다른 직위를 내려도 이들은 진왕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사서에서는 확실히 이세민이 이 시기에 암중에 사람을 보내어 태원에서 800장사를 모아서 집으로 데려왔다고 적고 있다. 이세민이 이때 암중으로 모은 것은 그가 이후 태자다툼에서 확실히 이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계속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그에게 왜 장수만 남고 병력은 남지 않게 되었을까? 이 점은 당시의 사관들이 당태종의 뜻을 받들어 일부러 빠트린 것일까? 사관들은 나중에 빠트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동궁에서는 이를 놓칠 리가 없다.이세민이 그런 직할부대를 가지고 있는데도 부족하여 몰래 병사를 모으다니, 목적이 무엇이냐. 설마 바보라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나중에 현무문의 변때 이세민은 충분한 병력을 현무문에 매복시키고 적시에 일부 부대를 빼내서 동궁과 제왕부를 장악한다. 이들이 그 두 역량이 아니었을까) 속담에,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지만, 다른 사람이 해치는 것을 막으려는 마음은 없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이건성은 일국의 태자로서 무력으로 친동생을 진압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후덕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정치적 야심이 명확하고 날로 드러나는 상황하에서도 그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당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당시 이세민은 태자자리를 빼앗겠다는 야심을 완전히 드러낸 상황하에서, 이건성이 자기의 모든 부하와 이연의 황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든 문무관리를 끌어모아도 이세민에 대적할 수 없었을까? 이세민이 그에게 손쓰는 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건성이 이런 군대를 조직하여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까? 한 나라의 태자로서, 황위의 계승자로서 골육의 정에 치우쳐, 직접적인 잔혹한 수단은 쓰지 않고, 부득이 매일 불안하게 지내면서자기의 동생이 잔혹한 수단을 써서 그를 암산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을까? 이건성이 인후하다고 하여 이정도면 문제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더라도 이건성은 가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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