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민국항전시기 3대참안(慘案) : 장사대화재

중은우시 2006. 10. 20. 15:12

1938년 11월 12일 저녁에서 14일까지의 사건이다. 국민당이 장사에서 지른 불이 이틀 밤낮을 태웠고, 수천년된 고성은 잿더미로 변했다. 도시의 63%의 거리와 건물이 불에 탔고, 1900여석의 곡식이 불에 탔으여, 300만위안의 주단이 잿더미로 변했고, 400여개의 무가지보인 한인(漢印)과 많은 문물등이 사라졌다. 그리고 3천여명이 불 속에서 희생되었다.

 

1938년 10월 일본군이 무한을 점령했다. 11월에는 악양이 함락되었다. 악양은 장사에서 13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원래는 항전의 후방기지였던 장사가 졸지에 항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비행기는 계속 공습을 하고 11월 12일이 되어서, 장사는 당시 시장을 맡고 있던 석초림(席楚霖)이 회고록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광풍이 몰아치는 날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다니는 한척의 낡은 배"와 같았다. 전쟁의공포와 어두운 그림자는 온 도시를 휘감았다.

 

오전 9시경, 장개석은 당시 호남성정부 주석이었던 장치중(張治中)에게 밀령을 내린다. "장사가 만일 함락된다면, 모든 도시를 불태워버릴 것.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차질없도록 할 것" 이어서 장치중은 장개석의 시종실 부주임인 임울(林蔚)의 전화도 받는다 내용은 "장사에 대하여 초토정책을 쓴다"는 것이었다.

 

장치중은 즉시 경비사령부의 풍제와 성보안처장인 서권을 부른다. 두 사람은 오후 4시에 "분성계획(焚城計劃)"을 세우고, 장사경비사령부의 제2단 단장인 서곤이 집행하였다. 계획에 따르면, "11월 13일 새벽 2시이전에", "준비위치에 진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계획에는 또한 인화재료의 배급과 통제, 인화명령, 신호, 절차, 규율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규정하였고, 발화지점은 천심각(天心閣)으로 정하였다.

 

장치중은 먼저 명확히 지령을 하달하였다. "반드시 우리 군대가 멱라에서 퇴각한 후에 다시 명을 내려서 행동을 개시한다". 그리고 상세히 배치하였다 "행동개시때, 반드시 먼저 공습경보를 내려서 주민을 피하게 하고, 다시 긴급경보를 발할 때 행동을 개시한다"

 

그러나, 1938년 11월 12일 밤에 제대로 통제가 되지 못하였다. 확실하게는 13일 새벽 2시경에 장사성내의 남문의 모처에서 갑자기 불길이 솟았다. 서권은 사병의 보고를 받고는 부주의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는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이미 철수한 때였기 때문에 불을 끄러갈 사람이 없었다. 15분도 되지 않아 남문에서는 이미 세 곳에 불이 붙었고, 그날 분성총지휘관인 염제의 전화는 계속 통화중이었다. 오래지 않아 천심각에도 불이 솟았고, 이어서 모든 도시에 불이 붙었다.

 

시민들은 잠을 자다가 모두 깨었고, 솟아오르는 불을 보고는 하늘로 올라갈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었다. 당일의 전보기호가 "문(文)"이고 화재가 저녁에 발생하였으므로 이번 대화재를 "문석대화(文夕大火)"라고 불렀다.

 

사실상, 일찌기 11월 12일이전에 장사의 운명은 이미 "초토항전"의 의사결정이 정해진 다음이었다. 1938년 11월 7일, 장개석은 장사로 날아와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장사는 무한, 광주의 사이에 있고, 적들로부터 남북으로 협공을 당할 수 있는 지역이다. 공격하기는 쉬우나 방어하기는 어려우므로, 우세한 적들과 결사적으로 싸울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장사에 대하여는 초토화정책을 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로 장사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저 대화재후에 비행기를 보내어 장사의 상공에서 사진을 찍고, 방송보도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리하여 대화재의 진상은 민중의 강력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1월 16일 장개석은 장사로 갔고, 관련인원을 체포하였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 자는 일률적으로 총살한다. 장치중도 직위를 박탈하고 조사한다" 20일에, 풍제, 서곤과 장사경찰국장인 문중부(文重孚)의 세 사람은 총살형을 당한다.

 

장치중은 이렇게 회고한다. 장개석이 장사의 대화재사건을 처리한 후에, 훈시를 한 바 있다.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연구하면,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전체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잘못을 일으킨 것은 우리의 실패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