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6월 9일.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의 삼개성 44개 현, 시의 2.9만평방킬로미터의 토지가 황하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 지역은 황하가 범람한 지역이라는 의미로 "황범구(黃泛區)"라고 불렀다. 600여만명의 백성들이 홍수의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메뚜기떼, 가뭄, 전투로 인하여 9년간 이지역에서 89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군사적으로는 일본군의 약 4개사단이 황범구에 갇혔고, 2개사단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농해선의 양측으로 무한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은 이로써 분쇄되었다. 일본군부의 자료에 따르면, 황하의 제방을 터뜨림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무한을 점령하는 시간이 최소한 3개월은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1937년 서주가 함락된 후, 일본군은 정주로 진입했고, 요충지인 무한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개석은 20만의 병력을 모아서 예동의 난봉현(지금의 난고현)에서 "난봉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전투에 실패하고, 오히려 예동(하남성 동쪽)의 문호를 크게 열어주는 결과가 된다. 어쩔 수 없어 정주로 물러난다. 1938년 6월 6일에 개봉이 함락되고, 정주도 위험하게 된다.
서쪽으로 철수하는 동시에, 장개석은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한다. 바로 "물로써 병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황하의 물이 범람하게 함으로써 서진을 막겠다는 것이다. 6월 1일, 장개석은 무한에서 정식으로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을 결정한다.
제방을 무너뜨리면 정주는 보호할 수 있지만, 몇 개성의 토지와 백성은 어떻게 할 것인가? 희생이 엄청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당시 2년전에 독일 군사고문단의 총고문이 유사한 건의를 한 바 있었으나, 이러한 결정이 장개석으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6월 9일, 제방을 무너뜨리고 황하를 범람시켰고, 화원구라는 정주 북쪽의 작은 지방은 항전역사상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6월 7일 새벽, 국민혁명군 제53군 제1단은 명을 받들어, 중모현 경내에서 제방을 파기 시작한다. 당시 정주중모하방사령부의 작전과 과장인 노계동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비장한 광경을 기억하고 있다. 제방을 무너뜨리기 전에, 제방파는데 참여한 공병연대의 연대장 황영청은 강둑의 관제묘에서 관우에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관노야, 중화민족이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일본에 의하여 아주 참혹하게 패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쩔 수가 없어서 황하의 물로서 저들을 몰아내고자 합니다. 우리의 백성들도 많이 익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병사들은 모두 관제묘 앞에 무릎을 꿇고 도도히 흐르는 황하를 보면서 방성대곡을 하였다.
이틀밤의 노력을 거쳐 6월 9일 오전 8시부터 물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웅선욱은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생각하기에 며칠 내에 여러개의 현에 물난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 아팠다" 웅선욱이 보기에 6월 10일에 큰 폭우가 내려서 며칠간 그치지 않았고, 이것은 제방을 무너뜨리는데 더 없이 좋은 조건이 되어서 "천우신조"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당시 먼저 생각했던 장소는 중모현 북쪽 25킬로미터의 조구(趙口)였다. 그러나 공사설계가 적절하지 않아서 6월 5일에 구멍을 내서 물을 내보냈으나, 6일아침에도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임시로 화원구로 변경한 것이었다.
6월 9일의 결제(決堤)이후, 갑자기 예동지구에 들어왔던 일본군은 어떤 자들은 피하지 못하여 홍수에 떠내려가고, 어떤 자들은 부상병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일부분은 중국군대에 섬멸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황범구의 동쪽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의 전사실에서 작성한 <<중국사변육군작전사>>에서 "제2군에서만 홍수로 죽은 사람이 7452명에 달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연히 이런 결과를 내는데에는 중국인들의 많은 희생이 따랐다. 대일항전승리후에 화원구에서는 구멍난 제방을 복구하는 공사를 하였다. 1947년 복구한 후에 "도구기념정(堵口記念亭)"을 만들었고, "황하화원구합룡기념비"를 정자내에 세웠다. 비석에는 장개석이 쓴 "제국안란(濟國安瀾)"이라는 글자와 행정원에서 쓴 "안란유경(安瀾有慶)"이라는 8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실상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한 부대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화원구의 결제의 진상이 일단 밝혀진다면 중국인들의 사기에도 영향을 주고, 중국정부의 이미지와 위신에도 불리한 영향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제방에 구멍을 낸 그날 오전에 사전에 작성한 전보를 장개석의 책상으로 보냈다. 전문의 내용은 개략 "9일 상호 8시, 적기 3대가 화원구를 공급하여 제방이 무너졌습니다. 저희는 현재 구멍을 메우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일본군 비행기의 폭탄투하로 화원구의 제방이 무너지고 황하가 범람하였다는 것은 국민당 당국에서의 일치된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이 전해지자 전세계 각국의 여론은 비등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질책하였다. 그런, 일본군에서는 중국의 선전에 대하여 일관되게 반박하였다. 기자들이 현지방문을 하겠다고 할 때, 국민당측에서는 일본기들이 폭격하는 자료를 날조하였고, 폭격현장을 위조하였다.
장개석이 죽은 후, <<장총통전>>과 <<장총통비록>>의 두 책에서 비로소 진상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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