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중국의 항일승리기념일은 왜 8월 15일이 아닌 9월 3일인가?

by 중은우시 2006. 8. 21.

작자: 이항(李恒) 2005년 8월 30일 씀

===============================

 

9월 3일은 법정의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8월 15일, 9월 2일, 9월 9일은 모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왜 중국은 8월 15일이 아닌 9월 3일이라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보이는 날을 법정의 항일승리기념일로 정했는지.

 

먼저 지적할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초기에는 확실히 8월 15일을 항일전쟁승리기념일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1년만 실행하고 나서, 9월 3일로 바꾸어버렸다. 항일전쟁승리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국민당정부는 1946년 4월에 9월 3일을 항일전쟁승리기념일로 정한 바 있다. 이것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최소한 항일전쟁승리일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이 된다. 왜 9월 3일로 했는지에 대하여 국민당정부의 설명은 잘 모른다. 중앙인민정부의 정무원총리였던 주은래가 1951년 8월 13일에 서명한 9월3일을 항전승리기념일로 하는 공고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본이 실제로 투항한 날짜를 조사해보니, 1945년 9월 2일에 일본정부가 항복조약에 서명한 이후이다. 그래서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은 9월 3일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확실히 승리기념일에 대한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적군이 "항복조약에 서명한"(항복조약이라는 것은 사실상 맞지 않다. 무조건항복에는 서명한 분건이라는 것이 승전측과 패전측이 같이 앉아서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패전국이 승전국이 요구한 모든 조건을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날이라는 것이다. 패전국이 항복에 서명한다는 것은 당연히 승전국이 같은 장소에서 항복을 받는 것이 된다. 항복에 서명한 것과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은 항복을 처리하는 법률절차이다. 법정의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을 확정하는데, 당연히 항복의 법률절차가 완성되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8월 15일은 어쨌든 승리기념일이 될 수 없다. 비록 8월 15일이 9월 2일로 이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8월 15일이 중국인민이 기념하는 날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정식으로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의 4개국 정부에, 무조건적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하였다. 중경의 여름시간 8월 15일 새벽 7시(북경시간 새벽 7시),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의 4개국 정부는 각자의 수도(중경,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에서 동시에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무조건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선포하였다. "8월 15일은 중미영소가 일본의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였고, "8월 15일은 일본천황이 종전조서를 읽는 녹음을 일본 군인과 민간인에게 방송한 날"이다. 중국인민들에게는 이날의 기억이 이러하다. 비록 그러하나, 중국인민에게 있어서 "815"를 기념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중미영소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항일전쟁의 승리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점은 왜곡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승리기념일을 8월 15일로 정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그렇게 정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천황이 읽은 조서에는 "항복"이라는 글자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항복'이나 '패전'은 말할 것도 없고, '종전'이나 '정전'도 없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물을 것이다. 비록 현재 "중미영소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선포하였다는 이 먼지가 묻은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끄집어내었는데, 이것이라면 기념일을 더욱 익숙한 8월 15일로 바꾸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필자는 두 가지 견해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하게 중요한 것은 "표지"이다. 승리일을 확정하는데에는 정식으로 하복한 법률절차와 항복문서서명 및 항복접수가 완성되면 되는 것이다. 일본천황의 조서는 순수하게 일본국내의 공문서이다. 우리는 위에서의 내용에 대하여도 비판할 수 있지만, 승리기념일을 확정할 때는 근본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무조건항복의 항복문서는 원래 승전국이 작성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항복"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이유이지, 일본정부가 스스로 그것이 항복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어떤 사람이 9월 9일을 승리기념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9월 9일에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가장 보편적인 견해로는 중국에 침략한 일본군이 이날 국민당정부를 향하여 항복문서를 전달하였다. 이런 인식에는 오해가 있다. 정확한 답벼는 중국전투지구의 일본군이 정식으로 항복한 것이다.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은 무엇이 "중국전투지구"인가? 사실상 미국이 태평양전쟁터와 협력하기 위하여 선포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최고총사령관은 장개석이다. 전투지구에서 전쟁할 때 어떻게 운용되는지는 필자가 잘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1945년의 항복받을 때의 상황은 알고 있다. 일본이 정식으로 동맹국에 무조건항복을 하겠다고 통보한 후, 미국대통령 트루먼이 승인하고 동맹국의 점령군 최고총사령관인 맥아더장군이 총명령 제1호를 반포하여, 주요한 승전국의 항복접수범위를 획정하였다. 그 중 중화민국(동북3성제외), 대만과 월남 북위16도이북지역내의 일본육해공군과 보조부대의 항복접수는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전투지구가 책임지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9월 9일에 강촌녕차(岡村寧次)가 남경에서 항복문서 제2조에 서명한 내용이다. 장개석 본인은 이 항복문서를 서명한 신분은 "중국전투지구최고총사령관"이었다. 항복을 받았던 장군인 하응흠은 바로 "중국전투지구최고사령관 특급상장 장중정 특별파견대표"였다.

 

분명하게, 중국동북지역을 십여년간 침략했던 관동군은 "중국전투지구"의 항복접수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그들은 동북에 진입한 소련군에 항복했다), 9월 9일의 항복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에 투항"하였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비록 당시의 사람들 심지어 당사자들까지도 그렇게 명확히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항전기념일을 확정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세부적인 것들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9월 9일 남경에서 항복을 받은 것과 9월 2일 동경만의 미주리함에서 항복을 받은 것을 비교하면, 필자는 후자의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먼저 9월 2일의 항복접수는 9월 9일의 항복접수를 이끄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9월 2일의 항복문서상의 서명자의 신분은 9월 9일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일본측면에서 9월 2일의 서명은 "일본천황과 일본정부의 명을 받고 대표하여" 외상인 중광규와 "일본제국대본영의 명을 받고 대표하여" 총참모장인 매진미치랑(일본은 8월 10일 중, 미, 영, 소에 부대조건이 붙은 항복요청이후, 미국정부가 답변을 보내었는데, 그 중에 일본천황이 반드시 일본고급장군과 함께 항복문서에 서명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중, 영, 소 삼국의 의견을 구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이것이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의심했고, 마지막에 원고를 고칠 때 미국측은 영국측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황이 반드시 수권하고 일본정부 및 대본영의 대표가 서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정부와 군대의 대표가 모두 있었다. 그리고 일본국가가 완전히 무조건항복의 운명을 받아들인다고 인정하였다. 이것은 바로 전면적인 항복이다. 동맹국의 측면에서도 맥아더는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에 대하여 작전을 한 각 동맹국을 대표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후 9개 주요한 동맹국의 대표가 이어서 서명하였다. 비록 모두 군인이었지만, 이 9명은 이중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항복문서상의 신분은 각 나라정부의 대표였다(예를 들어, 서영창은 중화민국대표였다). 이로 인하여 승전국으로 보면, 이 서명의식이 바로 정치와 군사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동경만에서 항복한 것이 중국의 항전승리기면일을 확정하는 표지로 보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국민당정부가 9월 3일을 항전승리기념일로 정한 과정에 대하여는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1945년 8월 16일 중경의 <<대공보>> 제2판에는 하나의 소식이 실려있다. "우리나라는 승리를 경축한다. 앞으로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로부터 3일간 경축하기로 정한다. 각기관은 1일을 휴식한다. 일체의 방법은 이미 중앙에서 결정했다. 각 성시에 통보해서 준비하여 공포한 후 시행한다." 이 전에 8월 12일에는 중, 미, 영, 소가 일본의 항복요청에 대하여 답변하였다는 것이 <<대공보>>에 역시 실려있고, 이렇게 예고했다. 일본항복소식은 우리나라와 동맹국이 동시에 선포할 것이다. 승리를 경축하는 일자는 별도로 공포한다" 이로써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당시에 승리기념일을 확정하는 날자는 순수하게 기술적인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요소는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었다. 이 과정은 당연히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 비록 이 기념일이 정식으로 확정된 것은 다음해 4월이었지만.

 

그러나 필자는 왜 동경만에서 항복을 받은 당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을 기념일로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만일 독일이 그 때 서명한 항복문서에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전이 정식으로 발효된다"는 것을 얘기한다면, 일본의 항복에는 그런 것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의 항복문서상의 기재일자는 단지 일본전권대표가 서명한 시간(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4분)과 동맹국 최고총사령관 맥아더가 서명한 시간(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8분)이 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항복문서는 당일로 효력이 이미 발생하였다.

 

2차대전에서 유럽전투지구의 "승리일"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5월 8일과 5월 9일의 두 개가 있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하여, 필자는 널리 알려진 "시차설"은 찬성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것이 소, 미, 영 삼국정부가 승리소식을 선포한 시간이 서로 다름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본문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다). 아시아태평양지구에서 일본에 대하여 작전을 벌인 국가의 승리일에도 통일적인 날짜가 존재하지는 않는다(중국인이 말하는 "세계반파시스트전쟁승리기념일"은 더구나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는 영국과 소련의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영국은 8월 15일로, 소련은 9월 3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측에서는 당시 대통령인 트루먼이 동경만에서 항복을 받은 후 미국에서 국민에게 선포한 연설을 했는데, 그 중에 "1945년 9월의 둘째날, 일요일 - 이것이 일본이 정식 항복한 날자이고, 승리일(V-J Day)이다"라고 하였따. 워싱턴의 시간으로 8월 14일 오후 7시에 4개국이 약정하고 일반에 일본이 이미 동맹국에 정식으로 무조건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고, 트루먼이 발표한 성명에서도 명확히 "대일작전의 승리일은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난 후에 비로소 선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시간상으로 본다면, 동경만에서 항복을 접수한 것은 중국에서는 자연히 9월 2일 오전이고, 소련과 영국은 같은 날 새벽이 될 것이며, 미국은 아직도 9월 1일 밤중이 될 것이다. 트루먼이 발표한 연설의 시간은 워싱턴시간으로 밤 10시였다.

 

필자는 전에 아무 생각없이 알게 된 것이 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행정당국은 1955년에 9월 3일을 "중화민국"의 "군인절"로 정하였다는 것을. 비록 이 명절에서 얘기하는 것이 9월 3일 항전승리기념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항전의 법정기념일은 대만사회에서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어떤 사람들은 고의로 항전의 역사를 희석화시켜, 이미 얼마나 많은 대만 사람들이 '군인절'이 바로 항전승리기념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지 모르겠다. 더욱 놀라운 일은, 심지어 어떤 사람이 동경만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은 날자를 9월 3일로 얘기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2005년 타이페이의 방송국에서 이렇게 보도하였다). 필자는 이런 점을 깊이 느끼고 있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받는 이 영광된 역사에서 중국인들이 보완해야할 상식은 정말 너무 많다고.

 

양식있는 인사의 말과 같이 9월 3일은 14년 항전역사상 당연히 적막해서는 안되는 최대의 기념일이다. 중국에서도 매년 기념대회를 조직하여 9월 3일에 거행한다.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민간에서 어떻게 말을 하든지간에, 국가는 자기가 정한 법규를 엄격히 준수하고 있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충심으로 바란다. 장래 역사교과서를 수정할 때, 9월 3일이라는 이 20세기에서 오사(5.4), 칠일(7.1), 구일팔(9.18), 칠칠(7.7), 십일(10.1)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날자로 자리잡고, 그 배후의 의의를 깨닫게 되기를. 그리고 명확하게 후손들에게 말해주기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융성한 기념활동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똑똑히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9월 3일은 영광스러운 항전승리기념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