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민국항전시기 3대참안(慘案) : 중경대폭격

중은우시 2006. 10. 20. 17:05

1941년 6월 5일에 발생한 사건이다.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일본군은 중경에 대하여 5년반에 걸친 전략적인 폭격을 가하였고, 많은 인원손실과 재산손실을 가져왔다. 역사기록에서의 "중경대폭격"이 그것이다. 일본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하여 중경정부는 여러 곳에 방공호를 팠다. 대터널도 그 중의 하나이고, 시중심에서 약간 서쪽으로 "십팔제(十八梯)"라고 부르는 곳이다.

 

1941년 6월 5일 저녁 9시경,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4,5천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터널에 1만여명이 몰려들었다. 일곤군의 공습은 5시간정도 계속되었고, 터널에서 큰 불이 일어났다. 사람이 몰려 있고, 산소가 모자라는 바람에 방공호 안에서 많은 사람이 질식하여 죽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2500여명이 질식하여 사망하고, 부상당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938년 2월 18일부터 1943년 8월 23일까지, 일본 육해군의 항공부대는 일본천황과 최고지휘본부의 명령을 받아 중경에 대하여 "항공진격작전"을 전개하였는데, 5년반에 걸쳤다. 이 오년반의 폭격중에서 특히 대터널방공호의 질식사건이 가장 가슴아픈 사건이다.

 

일본군은 상해, 남경을 폭격하고 점령한 이후, 중경은 하루하루 사람들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돈을 거두어서 방공호를 팠다. 국민당정부의 부패에다가 물자, 경비, 기술과 인력의 부족으로 방공동과 방공호를 파는 것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대폭격의 생존자인 중경인쇄공사 삼공장의 퇴직노동자인 이조영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방공동에 들어가려면 한사람마다 10위안정도 하는 "방공증"을 가져야 했고, 80%이상의 일반백성들은 이것을 살 수가 없었다.

 

1941년에 들어서 일본군은 제3차전략폭격을 시작했다. 6월 5일 오후 6시경에 중경에 돌연 공습경보가 울렸다. 24대의 일본기가 밤을 타서 3차로 나누어 중경을 폭격했다. 중경시지역에 순차로 폭격하였는데, 폭격시간은 5시간을 계속되었다. 십팔제 방공동은 당시 중경에서 비교적 큰 방공동이었고, 그래서 대터널이라고 불렀다. 두개의 입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십팔제 관음암이고, 다른 하나는 노의복가 부근이었다. 일본기가 폭격을 시작하자, 시민들은 하나둘 방공동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두개의 입구가 모두 폭격을 맞았고, 입구는 무너진 집으로 막혀버렸다. 그러면서 화재의 짙은 연기가 방공동 안으로 들어왔다. 1만명이 넘는 인원이 비좁게 있는 상황이어서, 산소는 갈수록 부족해 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질식해 죽었다.

 

참안이 발생한 이후, 중국내외의 여론이 분분했다. 일본군의 잔혹함을 비난하는 동시에 국민정부의 방공관리능력에 대하여도 질책이 잇따랐다.

 

국민정부가 발표한 <<조사보고>>에서는 "육오 대터널 참안"에서 모두 9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여론은 모두 이 숫자는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편적으로 인정된 숫자는 사망은 2500명을 초과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보니 당국에서는 부득이하게 군용자동차와 선박을 동원하여 시체를 운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