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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의40

송태조 조광윤은 급사한 것이 아니다. 글: 유병광(劉秉光)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죽음은 사학계를 괴롭혀온 천년의 미스테리이다. 역대이래로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의 죽음을 후궁의 스캔들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보통사람들은 조광윤이 비명에 죽었다고 알고 있다. 즉, 하.. 2012. 1. 7.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한족 400년의 아픔 글: 노덕(路德) 936년 봄여름이 교차하는 시기에, 태원(太原)에 주둔하고 있던 후당(後唐)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塘)은 마침내 명의상으로는 처남인 후당황제 이종가(李從珂)와 철저히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른다. 황제와 등을 돌린다는 것은 반란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 2011. 6. 24.
황포가신(黃袍加身): 조광윤은 훌륭한 연기자이다 글: 왕위(王偉) “황포가신”이라는 고사성어는 북송의 개국황제 조광윤(趙匡胤)에게서 유래되었다. 내용인 즉슨 이렇다: 조광윤의 부하가 그에게 황제에 오르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조광윤은 황제가 되고싶어하지 않았다. 부하는 황제가 입는 황색의 곤룡포를 강제로 그에게 입혔따. 조광윤은 어.. 2011. 4. 2.
송태조계와 송태종계: 송나라 황위계승 송나라의 개국군주는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이다. 그는 모친 두씨의 분부를 받들어, 황제위를 동생인 송태종 조광의(趙光義)에게 전한다. 이는 역사상 "금궤지맹(金櫃之盟)"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송태조가 두태후의 유명을 받들어, 주세종이 어린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주어 망국에 이른 전철을 밟지 .. 2008. 6. 24.
소태후(蕭太后) : 거란의 흥성 아름답고 총명한 소작(蕭綽), 아명은 연연(燕燕)이며, 16세에 황후가 되었고, 29세때 태후가 되었다. 그녀는 요(遼)나라의 소태후시대를 열었다. 그녀의 통치하에, 요나라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북송과 유명한 전연지맹(澶淵之盟)을 맺었다. 요나라의 황후는 대대로 소씨집안에서 나왔다. 10세기때.. 2008. 1. 8.
양송(兩宋) 황제전승의 수수께끼 송태조 조광윤 송태종 조광의 글: 장경위(張敬偉) 송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합하면 319년간 존속했고, 남북에 각각 9명의 황제가 있다. 양송은 중국인들에게 아주 감정이 복잡한 황조이다. 한편으로는 경제가 번영했고, 문화가 발달했으며, 감히 문신치세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고, 지금까지도 문인선.. 2007. 12. 24.
천고기원(千古奇寃) : 조광윤의 진교병변에서의 역할 글: 고천유운(高天流雲) 송나라역사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보면, 북송(北宋)의 개국에 관한 장면에 예외없이 이런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후주(後周)의 공제(恭帝) 시종훈(柴宗訓) 현득7년(960년) 원단에 거란이 침범했다.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금군통수, 전전도점검인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 2007. 12. 20.
송효종(宋孝宗) : 10명의 처녀때문에 황제에 오른 인물 송효종 조신(趙昚, 1163-1189년 재위)은 남송(南宋)의 두번째 황제이다. 그는 원래 송고종(宋高宗) 조구(趙構)의 아들이 아니었고, 송나라의 개국황제인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후손으로 조광윤의 둘째아들인 조덕방(趙德芳)의 6대손이며, 어릴 때 이름은 백종(伯琮)이었고 자는 원.. 2007. 10. 25.
역사상의 촉광부영(燭光斧影)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趙光胤)은 서기960년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오른 후, 17년간 황제에 있었따. 그러다가 서기976년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가 병을 앓았다는 기록도 없다. 정사에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명확하게 기재하지 않고 있다. <<송사. 태조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2006. 6. 5.
조보(趙普) : 송태조 조광윤의 군사 조보(922-992) 자는 칙평(則平), 조적은 유주 계현, 나중에 부친을 따라 낙양으로 옮김. 조보와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말은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절반의 논어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다)"이다. 그는 말년에 논어 이십권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어릴 때부터 관.. 2006.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