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추우(李秋雨)
1036년전인 서기979년 6월 3일, 송태종은 북한(北漢)을 멸하고 오대십국의 분열국면을 종식시킨다. 오대후기, 통일의 추세는 나날이 분명해져갔다. 후주(後周)때, 주세종은 개혁을 진행하고, 역량이 크게 증강되었다. 그는 선남정 후북벌(先南征後北伐)의 통일방침을 세우고, 남당(南唐)의 강회(江淮, 장강과 회수)의 사이에 있는 넓은 토지와 다른 일부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로써 이후 통일의 기초를 닦는다. 960년, 후주의 대장 조광윤은 '진교정변'을 일으키고, 북송정권을 건립한다. 조광윤은 바로 송태조이다. 그는 13년의 시간을 들여 남방의 여러 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북한의 도성 태원을 공격한다. 북한은 요(遼)군의 원조하에 송군을 격퇴시킨다. 얼마 후, 송태조는 병사한다. 그의 동생 조광의는 황위를 넘겨받는데 바로 송태종이다. 968년, 송태종은 친히 4로의 대군을 이끌고 북한을 공격한다. 요나라도 계속하여 증원해서 도와준다. 송나라는 결국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오게 된다. 979년, 송태종은 다시 북한을 친정한다. 이때 송나라는 이미 남북을 통일하여 국력이 크게 증강되어 있었다. 요나라의 병사들은 유연(幽燕)에 주력군을 방어하도록 놔두고, 겨우 대동(大同)의 병력만을 지원해준다. 송군은 요나라군대를 격퇴시키고, 태원성을 맹공한다. 6월 3일(송 태평흥국4년 오월 초육일), 밖으로는 원군이 없고, 안으로는 양식이 떨어진 상황하에서 북한의 군주 유계원(劉繼元)이 투항하고, 북한은 멸망한다. 70여년간 계쏙된 오대십국의 분열국면은 이렇게 끝이 났다.
조광윤은 왜 황위를 동생에게 넘겨주었을까? 그리고 나중에 조광의는 왜 다시 황위를 조광윤의 후손에게 넘겨주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는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금궤지맹(金櫃之盟)이고 다른 하나는 촉영부성(燭影斧聲)이다. 961년, 두태후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 조광윤과 조보(趙普)를 병석으로 불러서, 태조에게 묻는다. '강산을 어떻게 얻었는가?' 송태조가 울면서 답한다: '조상의 보우를 받아서입니다' 두태후는 머리를 흔든다. "너의 천하는 주세종(시영)이 어린 아들(시종훈)로 하여금 황제를 하게 해서 얻은 것이다. 만일 주왕조에 성년인물이 황제를 하고 있었다면 천하가 어찌 너의 것이 될 수 있었겠는가? 너와 광의는 모두 나의 아들이다. 장래 황제의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면 나라에 나이든 군주가 있으니 사직이 바로 잡힐 것이다. 그래서 네가 죽은 후에 황위를 동생 광의에게 물려주어야 하고, 광의가 죽으면 다시 셋째 광미(光美)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광미는 다시 너의 장남 덕소(德昭)에게 물려준다. 조광윤은 동의한다. 그리하여 두태후는 승상 조보로 하여금 그들 모자간의 대화를 기록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맹세문을 써서 금궤에 넣어서 봉한다. 이것이 바로 금궤지맹이다.
다만 이런 주장은 사람들이 다 믿는 것같지 않다. 두태후가 죽을 때, 조광윤은 겨우 34살이고, 한창 나이이다. 그의 장남인 조덕소는 이미 14살이나 되었으며, 차남인 조덕방도 이미 8살이었다. 976년에 조광윤이 죽었는데, 그는 17년간 황제를 지냈고 그 당시 나이가 50세이다. 즉, 그때 그의 장남은 이미 28세정도였던 것이다. 이는 어린 황제가 황위에 오르는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후주의 주세종 시영이 7살짜리 고아에게 맡긴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물며, 금궤지맹은 조광의가 등극한 5년후에 비로소 증인을 내세우고 공표하게 된다. 왜 조광윤이 죽었을 때 정정당당하게 공표하지 않은 것일까?
그래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인 촉영부성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개보9년(976년) 십월 십구일 밤, 삭풍이 불고 큰 눈이 날렸다. 송태조는 돌연 사람을 시켜 진왕 조광의를 입궁하게 한다. 조광의가 도착한 후, 송태조는 국가대사를 상의하겠다고 하며 좌우시종을 물리친다. 그리고 혼자서 조광의와 술을 마신다. 전각바깥에 있던 환관과 궁녀는 멀리서 전내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술을 다 마셨을 때는 이미 깊은 방이었다. 조광윤은 눈위에서 옥부(玉斧)로 내려치며 '잘했다. 잘했다'고 말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멀리서 촛불아래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과 옥도끼로 내려찧는 소리만을 들었다. 조광의가 떠난 후, 환관,궁녀들이 들어가 보니 송태조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향년 50세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촉영부성'이다. <신여록(燼餘錄)>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광의는 조광윤의 비인 화예부인에게 침을 흘린지 오래 되었다. 조광윤의 병중에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한밤중에 화예부인을 희롱한다. 그리하여 조광윤이 깨게 되었고, 옥부로 그를 내려친다. 그러나 힘이 딸려서 땅바닥을 내리쳤다. 그래서 조광의는 일단 일을 벌인 김에 끝까지 하자는 식으로 조광윤을 죽이고 집으로 도망쳐 돌아갔던 것이다.
송태조는 후기에 조광의와 사이가 화목하지 못했다. 조광윤은 도성을 개봉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조광의가 개봉부윤으로 너무나 많은 군사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태조는 이미 자신의 동생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느낀다. 조광윤이 마지막에 흐리멍텅하게 죽어버리는데, 송사를 보면 그의 죽음에 관한 기재는 많지 않다. 조광의가 나중에 이후주를 독살한 것을 보면 송태조는 아마도 그의 동생에게 독살당했을 것이다.
조광의가 황제에 등극한 후, 요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다. 유운십육주를 되찾아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고량전투에서 대패하고, 조광의는 겨우 몸만 빼어 도망쳐 온다. 하마터면 포로로 잡힐 뻔했다. 조광의는 대패후 한동안 실종된다. 조정에서는 그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의문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조덕소에게 황위를 잇게 하자고 주장한다. 조광의는 황궁에 돌아온 후에 이 일을 알게 된다. 얼마 후 조덕소는 자살한다(당시 나이 29살). 3년후 팔현왕 조덕방도 급사한다(당시 나이 25살). 조광의는 다시 셋째동생 조정미(조광미)를 친다. 모반을 했다고 모함하여 변방에 유배시킨다. 그리고 황족의 족보를 고쳐서 조정미는 양자라고 하여, 아예 황족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조정미는 유배도중에 병사한다.
조광의가 황족을 박해한 일은 그의 큰아들(태자)의 반대에 부닥친다. 태자는 마지막에 미친 척하고 궁전을 불지르며 항의한다. 조광의는 어쩔 수 없이 둘째아들을 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둘째아들은 집안싸움으로 그의 첩에게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에 황위를 계승한 사람은 송진종인데, 그는 조광의의 막내아들이었다.
음미해볼만한 일은 송태종의 후예는 북송이 멸망할 때 모조리 여진족에게 붙잡혀 북방으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남송의 송고종 조구에게 아들이 없게 되자, 황제위는 송태조의 후손인 송효종(조덕방의 제6대손)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황제위는 계속하여 송태조의 자손이 계승한다. 송태종계통은 이렇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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