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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오독천자(五毒天子) 조광의(趙光義)

by 중은우시 2015. 1. 14.

글: 문풍탁탁(文風卓卓)

 

송태조 조광윤의 죽음은 대송의 제일의혹사건이다. 천년이래로 풀리지 않는 미제사건중 하나이다. 천백년이래, 사람들은 송태종 조광의라는 최대의 수혜자에게 혐의를 돌리는 동시에 증거를 대지 못하는 고민도 있다. 그리고 조광의가 내놓은 "금궤예맹" 즉, "조광윤의 사후 조광의에게 황위를 넘긴다"는 것에 대하여 반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저명한 학자 왕립군(王立群) 선생의 분석에 따르면, 두태후는 죽기 전에 구두유언을 했다. 그러나 이 유언의 원래 내용은 조광윤의 사후에 둘째동생 조광의에게 황위를 넘기고, 조광의가 죽은 후에는 셋째아들 조정미(趙廷美)에게 넘긴다는 것이다.(조광윤의 형제는 모두 5명인데 첫째와 다섯째는 요절하여 조광윤이 사실상 첫째가 되었다). 조정미 이후에는 다시 조광윤의 아들에게 전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조광윤이 황제를 칭한 후 장기간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오대의 선례로 보면, 황위계승자는 모두 즉위하기 전에 "친왕윤경(親王尹京)"의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조광의는 당시 진왕(晋王)의 신분으로 개봉부윤(開封府尹)을 맡고 있었다. 조광윤은 효자여서, 한편으로 그는 모친의 명령을 어기기를 원치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황위를 조광의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이 있다. 잘라야 할 때 자르지 못하면 오히려 반란을 당한다고. 조광윤은 바로 이렇게 망설이면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고, 조광의는 공전의 압력을 받는다. 그래서 조광의가 먼저 손을 써서 조광윤을 해친 것이다. 이어서 셋째동생 조정미 및 조광윤의 두 아들 조덕소와 조덕방을 제거한다.

 

그 후 조광의는 수정판 <금궤예맹>을 내놓는다. 조광의의 여러 행적은 하나의 단어로 형용할 수 있다. 오독구전(五毒俱全). 이 오독은 바로 "음(陰)", "한(狠)", "음(淫)", "광(狂)", "위(僞)"라고 할 수 있다.

 

조광의는 너무나 음험했다. 고금이래로 황제가 신하를 감시하기 위하여 '특무'를 보내어 신하의 곁에 둔 사례는 너무나 많다. 명나라때 이런 행위는 제도로까지 형성되어 극치를 보인다. 다만 이것은 모두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조광의의 음험함은 바로 '아래에서 위로' 하였다는 것이다.

 

신하인 그는 장기간 내선(內線)을 천자인 조광윤의 곁에 심어두었다. 이는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작용을 한다. 조광윤이 의술에 정통한 정덕현(程德玄)이 처방한 약에 죽는 것이다. 송황후는 송태조가 사망한 사실을 안 후 환관 왕계은(王繼恩)을 시켜 황자 조덕방을 데리고 입궁하게 하였으나, 왕계은은 진왕 조광의를 데리고 입궁한다.

 

사실상 정덕현, 왕계은 두 사람은 모두 조광의의 사람이다. 조광의는 아래에서 위로 천자를 감시했고, 이는 그의 음험한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광의는 너무 악독했다. 만일 두태후의 임종당부가 아니었다면, 조광윤이 앞장서서 조광의를 황위승계자로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광의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모친에 감사해야 하고, 형의 인의에 감사해야 한다.

 

두태후의 이런 유언이 없었더라면, 조광윤은 조광의를 쫓아내거나 혹은 직접 죽여버렸을 것이다. 중국의 송태종이후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조광의는 즉위후, 최대의 수혜자로서 모친의 명까지 따르지 않고 연이어 조정미와 조광윤의 두 아들을 죽인다. 이 과정에서 조광의는 악독한 면목을 드러낸다.

 

조공의는 음탕했다. 남당이 송에 멸망한 후, 이욱(李煜)은 포로가 되어 개봉으로 압송된다. 이때 이욱의 첩인 절색(絶色)이고, 기예(棋藝)가 출중하다는 소주후(小周后)도 끌려온다. 조광의는 소주후에 대하여 침을 흘렸다. 황위를 빼앗은 후, 조광의는 소주후를 여러번 강간한다.

 

매번 소주후는 돌아가면 곡을 하고 욕을 했다. 조광의에 분노했을 뿐아니라, 이욱이 무능하여 망국에 이르게 하여 그녀가 이런 악운을 당하는데 대한 책망도 있었다. 이욱은 극도의 고통과 우울증 속에서 <망강남>, <자야가>, <우미인>등 명곡을 쓴다.

 

고금이래로, 망국의 군주의 부인을 차지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다만 조광의는 '대담'하게 다른 사람에게 명하여 그의 음탕함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것이 바로 <희릉행소주후도(熙凌幸小周后圖)>이다.

 

명나라때 사람 심덕부는 <야획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사람의 그림 <희릉행소주후도>에 태종은 복두(幞頭)를 쓰고, 얼굴은 검은 색이며 몸은 뚱뚱하다. 소주후는 몸이 섬약하여 여러 궁인이 안고 있다. 소주후는 눈썹을 찡그리고 참지 못하겠다는 모습이다."

 

조광의의 광망함은 호대희공(好大喜功)이다. 이는 그의 성격과 큰 관계가 있다. 그는 즉위후 급히 공을 세움으로써 조광윤의 공적을 묻히게 하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조광의는 권모술수에 능했고, 그는 정치적 업적이 적지 않다. 다만 군사적으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광의는 즉위후 있는 힘을 다하여 북한(北漢)을 멸한다. 조광의에 있어서, 요나라의 수중에서 일거에 전략요충지 연운십육주를 회복하는 것이 그의 정치,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북한을 멸망시킨 후, 조광의는 수하장병들이 피로에 지쳐 싸울 힘이 없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완고하게 병사를 몰아 동진하여 연운십육주로 향한다.

 

결과 고량하(지금의 북경 서직문 북쪽)전투에서 참패하고,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한다. 마지막에는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낭패하여 도망친다. 주세종 시영(柴榮)이 요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중원정권은 이전의 약세를 뒤집어 요나라와의 군사대치에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조광윤의 진교병변후에도 송,요 두 나라의 관계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조광윤은 심지어 실력을 축적하여 시기가 성숙되기를 기다려 연운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다만 조광의는 호대희공하여, 요나라를 분노하게 만들고, 북송국경의 형세를 악화시킨다. 그리하여 북송은 양국의 군사대치에서 피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전연지맹이후, 북송의 피동적인 태세는 약간 바뀐다. 마찬가지로, 남쪽에서도 조광의는 점수를 많이 잃는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오대시기까지 1천여년간, 월남북부지구는 중국영토였다. 송태종이 즉위한 후, 여러번 월남을 수복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최종적으로 백등강전투에서 패배하여 부득이 월남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모택동은 <송사.태종본기>를 읽고는 "황제는 심모영단(沈謀英斷)하고, 천하를 평정할 뜻이 있었다"라고 적고는 뒤에 "다만, 무능했다." 조광의가 거란인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는데 모택동은 이런 주석을 달아 놓는다: "이 사람은 병법을 모른다. 거란의 적수가 아니다. 연전연패하는 것은 거란이 모두 적을 깊이 유인한 후 포위섬멸하는 방법을 썼는데, 송나라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조광의는 허위,가식적이다. 송,요의 고량하전투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의 정보통신수단은 오늘날같지 못하여, 조광의는 전란중에 한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라에 하루라고 임금이 없을 수는 없다. 일부 장수는 대송이 태조 조광윤이 세운 것이므로, 참전하고 있던 조광윤의 아들 조덕소(趙德昭)를 황제에 옹립하자고 모의한다.

 

누가 알았으랴. 조광의는 죽지 않았고, 경성으로 돌아온 후, 조광의는 이 일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 수하장병들에게 상을 하사하는 것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관례에 따르면, 출정하고난 후 승패를 불문하고, 천자는 장병들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 조덕소의 각도에서 볼 때, 경성에 돌아온 후에 조용히 있어야 했다. 그래야 다른 혐의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고 솔직한 조덕소는 앞장서서 그의 이 황제 숙부에게 장병들에게 상을 내려야 하지않겠느냐고. 조광의는 원래 그를 옹립한 일에 대하여 마음 속에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조카가 이런 말까지 하자 대노하여 소리친다: "네가 황제에 오른 후에 하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조덕소는 숙부가 자신의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서 자살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의는 그 사실을 듣고는 조덕소의 유체를 안고 대성통곡한다. "멍청한 녀석, 이럴 필요가 있었느냐." 그러나 조덕소가 죽고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조광의는 이번 북벌의 전체 장병에게 큰 상을 내린다. 조광의가 오늘날 살아있었다면, 오스카 남우주연상은 그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조광의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오독구전이라 할 수 있다. 전제시대에 가족의 정, 도덕은 최고통치자에 의하여 언제든지 짓밟힐 수 있었다. 고금애리로 부자,형제간에 권력쟁탈을 위하여 상호 살륙하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본문에서 조광의에게 '오독'이라는 표찰을 붙여준 것은 일반인의 기준으로 본 것이고, 또한 그의 형인 조광윤과 대비하여 본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점은 조광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광의처럼 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당연히 조광의의 정치적 업적도 부정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억무부문(抑武扶文)을 강화한 것이라든지. 다만 이런 것들도 모두 자신에게 이익되는 방향으로 한 것이다. 지나치게 억무부문하면 중앙과 지방정부기구의 관료집단이 지나치게 팽창하고. 재정지출이 많아지는 폐단이 있다. 그리하여 송나라는 거란, 당항 및 여진등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