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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장제현(張濟賢): 송나라때의 밥통재상

by 중은우시 2015. 1. 1.

글: 철마음하(鐵馬飮河)


북송때의 인물인 장제현은 어려서부터 배부르게 먹은 적이 거의 없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크고 힘이 있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므로 식사량도 보통사람보다는 훨씬 많았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거의 양껏 먹지를 못하고 자랐다. 청소년시기의 장제현은 자주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것을 탄식했고,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이상은 매일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다.


하루는 마을의 부잣집에서 스님을 불러서 행사를 할 때, 장제현은 사람들 무리에 끼어들어 공짜로 실컷 먹었다. 그후에도 그는 여전히 양이 차지 않았다고 여겨 주인집에 걸려있는 생소가죽을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생소가죽을 아무렇게나 자른 후 솥에 넣고 끌인다. 반쯤 익은 후에는 맛이 어떤지 따지지도 않고 깨끗이 다 먹어버린다. 이를 보면, 그의 '식사량'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구양수는 <귀전록>에서 장제현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체질풍대(體質豊大), 음식과인(飮食過人)" 이를 보면 그의 몸이 얼마나 크고, 식사량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잘 먹을 뿐아니라 먹는 것은 탐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뱃 속이 비어서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기 그지없는 집안형편으로는 그의 이런 욕망을 채워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항상 배고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공짜로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매일 있는 것은 아니다. 스님 덕분에 실컷 공짜식사를 한 후에 며칠동안은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며칠을 굶은 그는 눈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고, 흙이라도 먹어치울 것같았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장제현은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먹을만한 것은 모조리 먹어치운다. 다른 사람의 집에 길흉사가 있으면 그는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서 도왔고, 그 후에는 낯짝두껍게 한바탕 먹어치웠다. 돈을 내라고 하지 않는 식사라면 모두 찾아다녔다. 하루는, 배고픈 그의 눈에 갑옷을 잘 차려입고 말을 탄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서 먹을 거라도 없나 싶어 생각하다가 대담하게 그 인마를 멈춰세운다. 이 행동이 그에게 운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일생최대의 '시주'를 만난 것이다. 바로 송태조 무덕황제 조광윤이었던 것이다.


조광윤은 낙양으로 서순(西巡)하며 민간의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부국강병의 도리를 가르침받으려 한 것이다. 의복이 남루한 장제현이 대담하게도 조광윤의 인마를 붙잡아 세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게 계책을 바치겠다고 말한다. 일개 포의가 대송황제의 어가마저 붙잡아 세우다니, 그는 절대로 밥을 헛먹은 무리는 아닐 것이고 분명 비범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조광윤도 성격이 활달하고 흉금이 넓은 사람이다. 그가 예의에 벗어나게 막아섰지만, 화를 내지 않고 사람을 시켜 그를 행궁으로 데려오게 한다. 그리고 온화한 안색으로 그에게 무슨 치국안방의 양책이 있는지 묻는다. 장제현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배가 고파서 말할 기력이 없다고 얘기한다.. 그후에 쑥스러운 얼굴로 조광윤에게 먹을 것을 좀 줄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조광윤은 수염을 쓸며 속으로 옷고는 사람을 시켜 그에게 식사를 가져다 주게 한다. 그는  위와 장이 비어있던 장제현은 많은 음식을 보자 바로 두 손을 움직여 마치 호랑이가 양을 잡아먹는 것처럼 더러운 두 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삼킨다. 그는 음식을 마구 입에 집어넣으면서 삼킬 뿐 아예 말을 할 시간은 없었다. 조광윤은 조용히 앉아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도 그가 먹기만 할 뿐 무슨 계책을 올릴 기색이 보이지 않고, 그저 머리를 쳐박고 먹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는 접시와 그릇만 낭자할 뿐 음식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평생 처음으로 이런 '대식가'를 보게 된 조광윤은 깜짝 놀란다. 조광윤은 오래 앉아있어 무료하고, 장제현이 무슨 좋은 계책을 가진 인물로 보이지도 않자, 그는 그가 자신을 속여서 그저 먹으려 한다고 여기고 약간은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몸에 지니고 있던 옥부(玉斧)를 꺼내 가만히 장제현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러면서 그에게 물었다. 너는 먹으러 온 것이냐, 아니면 좋은 계책을 바치러 온 것이냐. 장제현은 입을 닦으면서 서두르지도 않고 조광윤을 바라본다. 마치 가슴 속에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이어서 그는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조리있게 강국, 치군, 부민, 적전, 신형, 거현등 10가지 사항을 건의한다. 조광윤은 그의 말을 듣고는 마치 새로 눈을 뜬 것같이 크게 얻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전의 불쾌함은 금방 사라진다.


변량으로 돌아온 후, 조광윤은 서둘러 동생 조광의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동생의 손을 잡고 말한다: "내가 이번에 서순을 하면서 얻은 최대의 수확은 재주가 아주 뛰어난 기인 장제현을 얻은 것이다. 그는 비록 낙척불기(落拓不羈)하지만 식견이 높고, 크게 쓸만하다. 그는 아직 젊으니, 나는 잠시 그에게  관직을 내리지 않고 그를 단련시키며 시간이 흐르게 할테나, 나중에 아마도 너를 잘 보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경천위지의 영걸이다."


그후 장제현은 송태조와 송태종 두 제왕의 주목과 배양을 받는다. 최고지도자의 관심을 얻게 되니 먹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제현은 그 후에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뛰어난 자질을 바탕으로 열심히 노력하니 그의 경륜은 더욱 뛰어나게 된다.


송태종 태평흥국원년(976년) 장제현은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그때부터 화려한 관직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후에는 관직에서 승승장구하며 나중에는 송태종에 의하여 재상에 임명된다. 송진종 대중상부5년(1012년), 백발의 장제현은 영광스럽게 은퇴한다. 그는 여러 요직을 맡았고, 거의 모든 중요한 직위는 다 맡아보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의 자리에도 근 20년간 있었다. 가히 "득의추(得意秋), 명만봉황루(名滿鳳凰樓), 득지추(得志秋), 분파제왕유(分破帝王憂)"의 수보지신(首輔之臣)이라 할 수 있다. 장제현이 잘 먹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술과 밥만 축내는 자가 아니었다. <서유기>의 그 저팔계처럼 그는 잘 먹지만 일도 잘했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박학다식했고, 출류발췌(出類拔萃)한 기인이었다. 그는 등고망원(登高望圓), 여정도치(勵精圖治)했으며 청렴했다. 그는 관료로서 세상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북송전기의 번영에 큰 공헌을 한다.


장제현은 많이 먹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는 먹어도 잘 먹었고, 먹어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예로부터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먹는 것때문에 견리망의(見利忘義)하고, 심지어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던가. 장제현은 먹는 것을 탐했지만, 먹는 것으로 귀인을 만나고, 천자를 만난다. 그후에 제후에 봉해지고 보월등운(步月登雲)한다.


장제현은 잘 먹어서 세상사람들은 그를 "밥통재상'이라고 놀렸다. 이것은 악의가 있는 놀리는 말이 아니라. 선의로 그를 칭찬하는 우스개일 뿐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잘 먹는 것도 복이다. 이는 그가 뱃속에 배도 넣을 수 있는 도량을 지녔다는 말이고, 멀리 쳐다보는 안목을 지녔다는 말이다. 그가 나중에 송나라의 재상이 된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금린본비지중물(金鱗本非池中物), 노조혜안식영재(老趙慧眼識英才)"라 할 만하다.


장제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옷을 잘 입지 못하였지만, 몸은 장대하고 위맹하며, 천성적으로 큰 위를 가진 사람을 얕보거나 함부로 대하지말라. 그가 장제현과 같은 세상을 구할 재능을 지니고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