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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나라 조정의 대결전: 조보(趙普)와 노다손(盧多遜)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황작비비(黃雀飛飛)

 

조보는 송나라의 제일재상이다. 그의 출신배경에 대하여 사서에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명문거족이나 서향문제(書香門第) 출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관련 사료를 보면, 조보는 진교병변의 주요 기획자이니, 족지다모(足智多謀)하고 공헌이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조광윤이 황제에 오른 후, 바로 그를 재상에 발탁한다. 조정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그의 자문을 받아 결정했다." 조보는 관료로서 뛰어났다. 재능과 지혜가 출중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강퍅하고 독단적이었으며 권력을 독단했으며, 자신과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는 극력 탄압한다. 북송말기 위태(魏泰)가 쓴 <동헌필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보가 재상으로 있을 때, 매번 신료들이 대전에 오를 때면, 먼저 올리는 글을 내놓게 했다. 시정을 비난하는 내용이 없어야 비로소 대전에 오르게 했다." 조보는 9년간 재상으로 지내는데, 그동안 조정신하들의 원망이 많이 쌓인다. 그리하여 송태조의 불만을 불러온다. 그의 정치적 라이벌 중에서, 노다손은 가장 실력있는 사람이었다.

 

노다손은 서향문제출신으로 집안 4대가 관료를 지냈다. 그 본인은 주태조 곽위(郭威)의 현덕초년(954년)에 진사가 된다. 이때 조보는 막 영흥절도사 유사벽(劉詞辟)의 수하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고급잡역부라고 할 만했다. 건륭3년, 노다손은 집현전수찬(6품)으로 지제고(知制誥)(조령을 초안하는 것)를 맡아. 송태조의 가까운 신하가 된다. 그리고 조보는 이미 뛰어난 재지로 송태조를 도와 강산을 평정하고, 관직이 추밀사, 검교태보에 이르러, 지위가 노다손보다 휠씬 높아졌다. 개보4년(971년) 겨울, 노다손은 한림학사(정3품)에 임명되어 황제의 고급고문이 된다. 이때 조보는 이미 재상으로 7년이나 있었다.

 

<송사.노다손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다손은 "경사에 박학하고, 총명하며 힘이 있었다. 글재주가 있었으며 임수(任數)를 잘 했다. 모략이 있어 여러번 적중했다." 그는 관료로서 여러해동안 단련을 거쳤으니, 아주 재능있는 관료라 할 수 있다. 사관의 관리들에게 부탁하여 조광윤이 가져가서 읽는 책의 제목을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하고는 밤을 새워 그 책을 읽고 연구했다. 황제가 책안의 내용을 물으면, 그는 항상 막히는 것없이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조광윤의 인정을 받는다(사람들은 노다손이 잔머리를 굴려서 황제의 비위를 맞추었다고 많이 말하는데, 필자는 이것이 그의 업무태도라고 본다. 어쨌든 그는 황제의 시종, 고문이니가 그의 직책이 그러한 것이다). 글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조보와 경사에 두루 능통한 노다손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조보는 노다손을 좋게 보지 않았다. 노다손은 이로 인하여 승진이 아주 느렸다. 아마도 이것이 두 사람간 갈등의 근원일 것이다. 처음에, 노다손이 지제조로 있을 때, 조보의 작태에 불만을 가진다. 그때 그는 지위가 비교적 낮아서, 조보에 위협이 될 수가 없었다. 한림학사를 맡은 후, 매번 송태조가 물을 때마다 그는 조보가 불법적으로 땅을 차지하고,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등 여러가지 불법행위들을 얘기했다. <속자치통감장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개보6년 사월, 송태조는 노다손을 강남생신국신사(江南生辰國信使)로 임명한다. 그리하여 강남국의 군주인 이욱(李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간다. 노다손은 이 기회에 강남도경(江南圖經)을 속여서 얻는다. 그리하여 남당19주의 산천지리, 군사배치, 호적인구등 상세한 내용을 손바닥보듯이 알 수 있게 된다. 조정으로 돌아온 후, 남당의 국력이 미약하니 병력을 일으켜 강남을 통일할 것을 주장하여, 조광윤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개보6년 팔월, 조보는 탄핵하에 파직되어 하양으로 간다. 얼마후 노다손은 중서사인, 참지정사에 임명된다. 조광의가 황제에 오른 후, 다시 재상에 임명하니, 일시에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게 된다.

 

이치대로라면 노다손은 조보와 그저 일처리방식이 다를 뿐이고, 그다지 큰 이익충돌은 없었다. 조보의 하야에 노다손이 한 역할은 한계가 있다. 다만 노다손은 속이 좁았고, 계속하여 조보와 그 가족을 박해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갈등이 격화된다. 조보의 매부인 태상박사 후인보는 낙양의 명문거족이고, 느긋하게 생활하며 관직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조보가 재상으로 있을 때, 그를 고향인 낙양의 관리로 임명한다. 조보가 재상에서 쫓겨나자, 노다손은 후인보를 배척하여 그를 옹주로 쫓아버린다. 그리고 장기간 그를 불러들이지 않는다('삼년일천; 즉 삼년에 한번식 임지를 옮기는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옹주는 지금의 광서 남녕일대로 당시로서는 야만의 땅이다. 생활조건이 아주 열악했다. 태평흥국5년(980년), 후인보는 조보의 기획하에 송태종에게 <취교주책(取交州策)>을 올려서 교주의 내란을 틈타 교주(지금의 광서남부와 월남북부)를 차지하자고 건의한다. 후인보의 본 뜻은 명을 받아 경서으로 가서 황제를 대면하여 보고하고, 다시 기회를 만들어 경성에 남는 것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노다손이 핑계를 대며 이를 막았고, 그를 교주수륙계도전운사(교주전쟁지구의 물자조달책임을 맡는 것. 실제로는 옹주군대의 주장임)에 임명했고. 결국 호인보는 전사하고 만다. 이 일은 조보를 화나게 만들었다. 노다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조보의 장남 조승종(趙承宗)에게 칼끝을 겨눈다.

 

송태종이 즉위한 후, 멀리 하양(지금의 하남 맹현)에 있던 조보는 박해를 받을까 우려하여, 태평흥국2년 삼월 경성으로 돌아가서, 태조의 능을 지키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송태종은 그를 태자소보(종2품)로 임명하여 그를 경성에 남긴다. 태자소보는 직권이 없는 한직이고, 표면적으로 볼 때는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보가 여러번 조정에 청했지만, 노다손이 계속 방해하여 조보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조보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태평천국6년 구월, 조승종이 연국대장공주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녀는 송태종의 친외조카딸이다. 당시 조승종은 담주지주(지금의 장사 일대)로 있었다. 황명으로 개봉으로 돌아와 혼인식을 치른다. 혼인후 1달이 되지 않아, 노다손은 조승종에게 경성을 떠나 부임지로 가라고 한다. 조보는 송태종과 사돈을 맺은 것은, 원래 군신간의 갈등을 해소시켜, 동산재기하고자 함이었다. 노다손이 계속하여 핍박하자, 조보는 극히 분노하여 반격을 시작한다. 이때 송태종은 즉위합법성과 황위승계의 양대 난제를 안고 있었다. 조보는 송태종과 정치적 동맹을 맺는다. 그리하여 '금궤지맹' 유훈을 내놓는다. '형종제급'의 합법화를 시도하고, 그 공로로 조보는 사도, 재상이 되고, 양국공에 봉해진다. 태평흥국7년 삼월, 조광의의 심복인 시우석(柴禹錫), 왕현(王顯)등이 황제의 동생 조정미(趙廷美)가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한다. 송태종은 '교만방자(驕恣), 모란(謀亂)'의 죄명으로 그를 서경유수로 좌천시킨다.

 

다시 재상에 오른 조보는 노다손을 완전히 뿌리뽑을 생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송사.태종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보가 재상에 다시 오른 후, 노다손은 더욱 불안해 했다. 조보는 여러번 노다손을 놀리며 물러나도록 요구한다. 노다손은 권력에 대한 탐욕이 있어,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 조보는 그저 노다손이 급류용퇴하기를 요구했으나, 노사돈은 내심으로 두렵고 불안했지만, 권세에 대하여 미련을 거두지 못했고,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조보는 노다손과 조정미가 내왕한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고, 이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라 여겼다(왜냐하면, 조정미는 준후계자이고, 개봉부윤이며, 노다손은 재상이므로 두 사람간에 내왕이 없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보의 조종하에, 여러 신하들이 조정미와 노다손이 "서로 바라보며 저주했고, 대역무도했다"고 상소를 올린다. 사월, 노다손은 파직되고, 온 집안이 애주(지금의 해남 삼아)로 유배된다. 오월, 조보는 개봉부윤 이부(李符)를 시켜, 상소를 올려, "조정미는 반성하지 않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먼 곳으로 보내어 만일의 변고를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를 방주로 유배보내 안치시킨다(지금의 호북성 방현)/

 

조보와 노다손의 다툼과정에서, 이부는 원래 작은 인물이다. 이부는 후한시기의 하급관리부터 시작하여 개인능력에 의존하여 한걸음 한걸음 승진한 관리였다. <송사.이부전>에 따르면 그는 "재임때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은 그를 위하여 생사(生祠, 살아있는 사람을 기리는 사당)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주 재능이 있었다. 개보5년 팔월, 송태조는 이부를 경서남면전운사(장관급의 고위관직)에 임명한다. 친필로, "이부가 가는 곳에서는 짐이 직접 행차한 것처럼 맞이하다."고 써서 준다. 그를 큰 깃발에 수놓게 하여 은총을 보였다. 다만 이부는 재능이 있었지만, 인품은 엉망이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상관에게 아부하여 승진했다" 조보가 막 재상의 자리로 돌아오자, 이부는 바로 그에게 아부하여 빌붙었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태평흥국7년 삼월, 친왕 조정미가 서경유수로 나간다(낙양). 이부는 그의 뒤를 이어 개봉부사(수도의 행정장관)가 된다. 노다손사건이 발발한 후, 조보는 그를 애주로 유배보낸다. 이부는 진언한다: "주애(珠崖)는 비록 멀리 바닷가운데 있지만, 물과 흙이 아주 좋다. 춘주는 비교적 가깝지만 장독이 심하니 그 곳에 가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원컨대 노다손을 춘주로 보내십시오." 춘주는 지금의 광동성 양춘시이다. 광동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송나라때 이곳은 생존환경이 열악하여, 죄를 받고 유배되면 반드시 죽었다고 한다. 조보는 그의 말을 듣고는 마음 속으로 역겨움을 느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팔월, 이부가 '용형부당(用刑不當)'하다는 핑계를 잡아 그를 영국군사마로 좌천시킨다. 해가 바뀌어, 미덕초가 추밀사 조빈이 사병을 회유하여 자신이 황제에 오르려고 한다고 무고한다. 조보는 조빈이 무고를 당했다고 얘기하며, 왕현, 시우석등과 함께 황제를 대면하여 얘기한다. 송태종은 대노한다. 미덕초의 일가족을 경주에 유배시킨다. 이부는 미덕초의 일당이다. 일찌기 미덕초를 추천한 바 있으므로, 연대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하여 조보가 붓을 휘둘러 그를 "가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춘주로 보내어버린다. 1년후 이부는 거기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