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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154

장개석은 어떻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는가? 글: 녕녕(寧寧) 상해로 물러난 손중산은 냉정하게 반성하며 생각을 거듭한다. 손중산은 이 때 북대의 저명한 교수이자 중국공산당 북방지구 지도자인 이대쇠를 만난다. 그는 손중산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찾아왔다. 중국지부에서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보낸 지령을 받았는데, 중.. 2013. 12. 21.
송미령(宋美齡)의 마지막 30년 글: 란혜(欒慧), 복창형(卜昌炯) 남편이 죽은 후 28년만에 송미령도 세상을 떠난다. 호평과 악평이 넘쳐나는 남편과는 달리,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녀는 '퍼스트 레이디'의 우아함과 풍채일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계속 갱신되었고, 그들이 송미령.. 2013. 12. 6.
소련은 왜 서안사변에 반대했는가? 글: 지효민(智效民) 2013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77주년기념일이다. 77년전에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이 장개석을 구금한 후, 연안에는 무대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공개재판을 통하여 장개석을 처형할 생각이었다. 다만, 왜그런지 2,3일후, 연안측에서는 장학량에게 장개석을 풀어주.. 2013. 11. 29.
주불해(周佛海): 절처봉생(絶處逢生)의 매국노 글: 유전(劉典) 중화민국역사에서 신기한 정계의 달인이 한 사람 있다. 그는 흥풍작랑(興風作浪)했고, 견풍사타(見風使舵, 바람부는대로 키를 돌리다)한 정객이며, 일생동안 공산당, 국민당정부, 왕정위친일정부를 오갔고, 그후 항전이 끝나고나서도 목숨을 유지한 중화민국 제3호 "매국.. 2013. 11. 27.
황포군관학교의 4개 분교 글: 마려(馬麗) 제1차국공합작이 실현된 후, 국민혁명사업에 충성하기로 뜻을 세운 군사인재를 배양하기 위하여, 1924년 5월, 손중산(孫中山)은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주 황포에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1926년 3월에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칭함), 간칭 "황포군관학교"를 .. 2013. 11. 24.
9.18사변에서 누구를 가장 질책해야 하는가? 글: 정만군(程萬軍) 2013년 9월 18일은 "9.18사변" 82주년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9.18사변"은 "7.7사변"보다 더욱 큰 치욕이라고 생각해 왔다. 비록 전자로 잃은 영토가 후자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군대와 그 지도자들의 행동은 적국으로 하여금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었기 대문이다. 이 사변에 .. 2013. 11. 11.
장정(長征)때 홍군은 왜 매복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는가? 글: 서염(徐焰) 장정기간동안 홍3군단장, 홍1방면군사령원을 지낸 팽덕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홍군지휘관의 영용과 뛰어난 정찰업무덕분에, 전멸을 피하고 섬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리장정에서, 홍군은 시시때때로 중병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한번도 매복에 걸린 적이 없.. 2013. 11. 10.
일본에서 특권을 누린 바 있는 중국정부 글: 사성상(史成霜) 모두 알다시피 아편전쟁이래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등의 나라는 날카로운 배와 강력한 대포를 가지고 여러번 청나라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면서, 청나라정부를 압박하여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영사재판권, 일방적 최혜국대우, 협정관세등 중.. 2013. 11. 10.
보과과는 왜 청말난세에 태어나고 싶어했을까? 글: 풍청양(風靑揚) 언젠가 인터뷰에서 보과과는 매체에서 "당신이 가장 살고싶지 않은 왕조는 언제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가장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왕조이전의 그 시대이다. 실제로 많은 왕조에 나는 모두 가보고 싶다. 특히 청말. 비록 국가는 혼란스러웠지만, .. 2013. 11. 10.
군벌의 말로: 장종창 암살의 막전막후 글: 유전(劉典) 민국시대에 군벌혼전으로 시국이 어지러웠다. 많은 보잘 것없는 인물들이 기회를 잡아서 일어서서 한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장종창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이 장군의 명성은 실로 사람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국가와 민족에 재앙을 .. 2013.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