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사원지(文史園地)
1945년 5월 25일 미군이 칭다오에서 철수한다. 청도에서 철수하기 전에, 미군은 어떻게 거취에 대한 이해득실을 평가했을까? 미국은 어떤 고려를 했을까? 미국은 무엇을 중시했을까? 최근 얻은 미국의 기밀해제문건은 우리로 하여금 그 역사의 진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군은 2차대전후 칭다오에 주둔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다. 얄타회담에서의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와 소련최고지도자 스탈린의 밀약에 기하여, 동북(만주)에 출병한 소련은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점령하고, <중소우호동맹조건>에서 소련의 이런 지위는 중국측의 인정을 받는다. 뤼순 군항은 중소양국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다롄은 자유항으로 되어 소련이 상당한 특권을 갖게 된다.
소련의 뤼순, 다롄 통제에 대하여 미국은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글로벌 군사배치의 필요에 기하여, 미국은 눈길을 칭다오로 돌린다. 칭다오를 통제한다면, 서태평양지역에서 소련에 대한 군사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북방해안의 양호한 군항으로서 칭다오는 군사시설이 완비되어 있을 뿐아니라, 전략적인 위치도 중요했다. 미군이 칭다오에 주둔하면, 군사력이 산동반도에 미칠 뿐아니라, 황해까지도 영향력이 미쳐서 소련의 뤼순 다롄의 군사존재를 견제할 수 있었다. 미군으로서는 칭다오에 주둔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장개석과 비밀협정을 체결한다.
1945년 10월 9일, 미국해군해병제 제6사령부가 칭다오에 상륙한다. 1945년 10월 11일부터 12일까지, 2.7만명의 미군이 연이어 칭다오 항구로 상륙한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미군은 칭다오에 4년여동안 주둔했다. 1946년 5월 13일,미국해군 제7함대는 칭다오에 도착한다.
미군의 행동에 대하여 장개석은 허가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는 미군이 칭다오에 진주하는 것이 장개석의 내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칭다오에서, 미국측은 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당정부가 중앙해군훈련센터를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1945년 11월, 국민당 제8군 이미(李彌) 부대는 제7함대의 호위를 받아 칭다오로 상륙하여, 칭다오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인수인계를 성공적으로 받았을 뿐아니라, 교제선(칭다오-지난철도)의 연안을 따라 관련도시들을 차례로 장악한다. 그후 미군은 다시 국민당군이 칭다오로 상륙하도록 도와주고, 국민당군이 교제선을 장악하도록 역량을 보태어 준다.
1946년 11월 미국정부는 국민당정부와 <칭다오해군기지비밀협정>을 체결한다. 이때부터 미군의 칭다오주둔은 국민당정부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는다. 칭디오는 이때부터 미군의 극동 주요해군기지가 된다. 미국과 장개석간의 이 협정은 잠재적인 동맹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미국의 UPI의 당시 보도를 보면 간단하고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미국은 중국과 공동으로 칭다오기지를 사용할 것이다."
미국측은 국민당군대가 그렇게 형편없을 줄 몰랐다.
1946년 6월, 중국에서는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한다. 미국측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은 자신이 지지하는 국민당정부가 전투에서의 전적이 갈수록 나빠졌다는 것이다. 먼저 보무당당하게 전면진격을 일으켰는데, 이어서 부득이 중점공격으로 바꾸고, 마지막에는 몇개 대도시를 고수하는 것으로 바뀐다.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지위는 완전히 상실한다.
산동을 보면, 1947년 3월 내지 4월, 교제선은 다시 해방군에게 차단된다. 1948년초, 전체 산동반도에서 국민당은 겨우 지난과 칭다오 두 개의 도시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의 소련을 견제하는 기지로서 칭다오도 해방군의 공격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미국측은 칭다오를 포기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측은 자신의 칭다오주둔을 아주 중시했다. 칭다오는 국민당해군의 훈련센터일 뿐아니라, 미국측의 소련견제의 중요거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측은 국민당측의 칭다오방어능력을 믿을 수 없다고 보았지만, 쉽게 칭다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외에 미국측의 "우호적인 이웃나라"라는 입장을 지지한다는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설사 중공측의 칭다오공격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쉽게 칭다오에서 철군한다고 내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측의 관련인원은 미국이 칭다오에 병력을 증원하거나 완전히 철수하는 것은 모두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군사력에서는 작전부대의 규모를 3,600명가량으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미국측이 1948년 5월의 검토사항이다. 다만 해방군이 이해 4월에 탄현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칭다오를 보위하는 것이 아주 현실적인 문제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측은 해방군이 칭다오를 진격할 경우의 4가지 처리방안을 가정했다.
미국측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시기의 국민당은 군사물자면에서의 손실이 지나치게 컸고,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칭다오의 방어역량을 믿을 바가 못되었다. 그리고 해방군이 이미 산동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기하여, 미국측은 해방군이 칭다오를 공격한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4가지 처리방안을 검토했다.
A. 국민당군대를 지원하여, 그들이 도시와 근교의 설비(비행장과 수상시설)을 보위할 수 있도록 해준다.
B. 국민당에 의존하지 않고, 미국측이 단독으로 중요시설을 보위한다.
C. 일단 필요하면, 미국측인원과 시설을 국공내전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철수한다.
D. 미국의 설비와 비전투인원을 철수하고, 무장부대는 계속 부근 함상에 머문다. 그리고 중국내전의 진행상황을 보아 그 이후의 행동을 결정한다.
미국측의 분석인원은 A방안이 외교적으로는 훌륭하지만, 미국측이 당시에 국민당의 방어능력에 믿음이 없었다. B방안은 군사적으로는 정확하지만, 정치적으로 중공방면에 미국이 침략했다고 선전할 구실을 줄 수 있다. C방안은 비록 안전하지만, 국민당측에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줄 수가 있다. 미국의 '자유국가'의 맹주로서의 이미지에 불리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D방안이 하나의 절충방안이고 가장 적절했다. 당연히 미국의 철수에 대하여, 분석보고서에서는 이렇게 직언한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체면상하는 일이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일은, 미국측이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간 분석을 했다는 것이다. 국민당 방면의 산동 4개 중요군사거점을 비교하여 해방군의 다음 진격방향이 아마도 칭다오가 아니라 산동의 성회도시 지난(濟南)일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유일하게 미군이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라면, 지난이 너무 빨리 함락되었다는 것이다. 1948년 9월, 해방군은 지난을 공격하는 전투를 시작한다. 겨우 8일이 지나서 지난을 해방시킨다. 그리하여 칭다오는 국민당의 산동에서의 유일한 군사거점이 된다. 이렇게 되자 미군은 부득이 다시 미군의 칭다오에서의 거취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이번에 미국측은 여러 방면과 긴급히 협의한 다음 중공측에서 이미 지난을 함락시켰으므로, 칭다오를 점령할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미군이 계속 칭다오세 머무는 것은 중공과 개전을 벌이게 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미국의 이익에 손해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칭다오에서 철수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미국은 이렇게 평가한다. 이런 퇴각은 소련사회주의국가에 아주 좋은 선전자료를 주게 될 것이다. 다만 방법이 없다. 미국측이 우려한 것은 일부 동남아국가,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가 미국의 퇴각을 미국이 쇠약한 표시라고 인식할까 하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의 동남아에서의 이익에 손해될 것을 우려했다. 미국측은 칭다오가 중공에 의미는 크지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중공은 해군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해군이 칭다오를 이용할 수 있고, 그들의 다롄의 기지와 연결시키면 소련의 화북에서의 군사와 경제면의 우세를 강화시키게 될 것이고, 나아가 중공과 조선에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해방군이 칭다오로 진군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하여 미국측의 분석은 모호했다. 어떤 곳에서는 미래 6개월내에는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어떤 곳에서는 이런 가능성이 없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미국측은 칭다오의 미군함대는 한편으로 비전투인원과 설비를 함상으로 옮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방어를 강화하는 겉모습을 보인다. 미국측이 이렇게 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중공이 진공할 때, 미국측이 신속히 철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방어를 강화하는 겉모습을 보인 것은 국민당측에 보여주고, 중공이 칭다오로 진격하는 것을 겁주기 위한 것이다.
미국측은 국민당을 따라 샤먼(廈門)으로 철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쨌든 철수한다고 바로 철수하는 것은 체면상하는 일이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은 "호의"로 장개석에게 중앙해군훈련센터를 칭다오에서 샤먼 혹은 타이완으로 옮기라고 권유한다. 그때 미군의 설비도 따라서 칭다오에서 철수하면, 자연히 세상 사람들에게 미국이 혼자서 철수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군의 이런 설비이전방향은 일본본토와 괌이었다. 국민당을 따라서 샤먼이나 타이완으로 가지 않았다.
미국내부에서는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다. 미국측은 미군이 일본기지건설을 공고히 하고, 사실상 다시 타이완에 기지를 건설할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일단 중공이 화남지구를 점령하면, 타이완의 전략적인 지위는 미군이 공산주의세력에 항거하는 기지역할을 맡기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외에, 미군은 다시 중국의 어느 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면, 아마도 미국과 중공의 충돌을 가져올 수 있을 뿐아니라, 중공에게 미제국주의의 중국침략이라는 구실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미국의 국제적인 이미지에도 불리하다. 미국측의 이러한 고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측이 이미 소련에 저항하는 동방의 맹우를 장개석정권에서 일본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내전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직접개입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데서도 아주 명백하다.
미군은 이미 칭다오에서 철수할 결심을 굳혔지만, 구체적인 철군일정에서는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인은 철수하기 싫은 것때문이다. 그외에 칭다오주둔의 가치를 써먹을 대로 써먹으려 해서이다. 1949년 4월 난징(南京)이 해방된 후, 미국측은 다시 철수시간을 상해해방이후로 늦춘다.
1949년 5월 3일, 해방군은 칭다오 지모(卽墨)전투를 시작한다. 칭다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미구능 정식으로 철수일정에 들어간다. 1949년 5월 25일, 상해해방(1949년 5월 27일) 전에, 미군은 칭다오에서 철수한다. 미군의 군사역량이 더 이상 중국대륙에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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