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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장선운(蔣先雲): 황포군관학교 최고의 천재

by 중은우시 2018. 7. 7.

글: 유계흥(劉繼興)


다시 대학입학시험의 계절이 돌아왔다. 필자는 황포군관학교 사상 최고의 천재인 장선운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모든 시험과목의 수석을 차지한다. 황포군관학교상 '유일무이'한 기적을 이루었을 뿐아니라, 이는 국내외학교의 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중국현대사상 천재는 아주 많다.그러나 장선운처럼 군사과목이건 문화과목이건 모든 과목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은 경우는 절대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는 중국현대역사상 최고의 시험천재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장선운은 호남성 신전현 사람이다. 1917년 호남성제3사범학교에 입학한다. "5.4"운동때, 모택동의 영도하에 장선운은 호남학생연합회의 제1기 총간사를 맡는다. 그리고 하명한(夏明翰), 황정원(黃靜源)과 공동으로 호남남부25개현의 학생수업거부운동을 조직한다. 그는 재학때 혁명단체 "심사(心社)"를 조직하고, <의록경종(嶷麓警鐘) 월간지를 창간한다. 이렇게 호남남부혁명조직의 선구를 이룬다.


호남남부학생운동의 지도자로서, 장선운은 모택동의 칭찬을 받는다. 1921년, 모택동의 소개로, 장선운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다음 해 장선운은 이입삼(李立三), 유소기(劉少奇)가 조직한 안원노광(安源路鑛) 대파업에 참가한다.  그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한다.


1924년 봄,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을 모집했다. 전국이 뜻을 품은 청년들이 속속 입학신청한다. 장선운은 중국공산당 호남당조직에서 선발하여 파견된다. 모택동, 하희(夏曦), 원달시(袁達時)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간다. 당시 시험은 까다로웠다. 응시자는 반드시 초시(初試), 복시(復試), 총고시(總考試)의 세 단계를 거쳐야 했다. 먼저 전국19개성시에서 응시생의 초시를 진행한다. 이어서 다시 상해,중경등 대도시로 가서 복시를 친다. 합격한 후에 비로소 광주로 가서 총고시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국민당 중앙후보집행위원을 맡고 있던 모택동은 국민당 상해집행부의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상해지구(장강유역 및 그 이북의 각 성)의 응시생 복시업무를 책임진다. 장선운은 초시, 복시에 합격한 후, 광주로 가서 총고시를 친다. 총고시는 국문, 수학, 역사, 지리등의 과목이 있었다. 1200여명의 응시생중 장선운은 1등을 한다.


놀라운 점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장선운은 모든 과목의 1등을 다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갱(陳賡), 하충한(夏衷寒)과 더불어 "황포삼걸(黃埔三傑)"이라 불렸다. 그리고 학교의 결정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하여, 공산당과 국민당의 두 당에 모두 가입한 당원이 된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국공양당으로부터 모두 인정받는 인재가 되고, 스승들이 총애하는 제자가 되어, 학교내외의 기치를 든다. 장개석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장래 혁명성공후에 군복을 벗으면, 황포군관학교같은 이런 용호지사는 단지 장선운만이 지휘할 수 있을 것이다."


1924년 3월 19일, 장선운은 먼저 상해에서 장사로 가고, 이지흔(李祗欣, 호남성 예릉현 사람, 이입삼의 여동생, 중국공산당원)과 결혼한다.


장선운은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기간동안 아주 활발했다. 중공황포군관학교특별지부의 제1기 서기가 된다. 그리고, 요중개, 주은래의 도움으로 그는 중국청년군인연합회를 앞장서서 창건하고 주석이 된다. 그리고 여러 편의 혁명글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그는 황포군관학교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명망이 있는 학생이 되어, 많은 청년군인들에게 영향을 준다(개국원수 서향전, 홍군고위장군 좌권을 포함한다). 많은 뜻을 지닌 청년군인들은 "청년군인연합회"를 그들 혁명정신의 의지처로 삼는다. 회원은 처음에 2000여명에서 신속히 2만여명으로 발전한다. 활동범위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광동의 군대와 운남, 귀주, 호남에 설립된 군사학교들까지 포함하고 나아가 전국으로 퍼져간다. 그리하여 일대 청년군인중 대부분이 혁명의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 된다. 나중에 황포군관학교에서 많은 공산당원을 배출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원인은 장선운등이 사상을 선전하고 고취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5년초, 장선운은 졸업후 학교에 남아 교장 장개석의 비서가 된다. 2월 "소장(小蔣, 장선운)"은 "대장(大蔣, 장개석)"을 따라 처음으로 동정(東征)에 참가한다. 그 동안 두번 부상을 입는다. 6월, 광주에서 '양류(楊劉)"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단지 1개연대를 이끌고 시중심으로 쳐들어간다. 그리하여 전군(滇軍)총지휘부를 점령하는 큰 공을 세운다. 8월에는 제2차 동정에 참가한다. 이미 1군 3사 단의 당대표를 맡고 있던 그는 세번째 부상을 입고서도 친히 결사대를 지휘하여 일거에 "역사상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헤주성(惠州城)을 점령한다.


장선운은 비록 장개석의 총애와 인정을 받았고, 신속히 발탁되었지만, 그는 믿음이 분명했고, 강정불아했다. 1926년 "중산함사건"이 발생한 후, 장개석은 "중장교육장"의 직위로 장선운에게 공산당을 탈당하도록 권유했지만, 이중당적을 지니고 있던 장선운은 오히려 제1차로 국민당을 공개탈당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1926년 7월 북벌전쟁이 개시된 후, 장선운은 북벌군총사령부의 기요비서가 된다. "북벌의 문서는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후에 보충제5단의 단장을 맡고, 육군소장의 계급으로 광동, 호남, 강서, 호북을 전전한다. 장개석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장선운을 부르고 그에게 제1군 제1사 사장의 직위를 주겠다고 했으나, 전제조건이 있었다. 바로 '공산당을 탈당한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선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1926년말, 장선운은 장개석을 떠나 무한으로 간다. 그리고 호북 전성총공회 공인규찰대 총대장이 된다. "4.12"정변이 발생한 후, 무한의 각계는 "반장위원회(反蔣委員會)"를 설립한다. 모두 장선운을 주석으로 추대한다. 무창의 열마장에서 거행된 삽십여만명의 '토장대회(討蔣大會)"에서 <반장선전대강>, <고황포군교각기전체동학서>등 문건이 통과되고, <토장특간>도 출판한다. 소리높여, "옛날의 교장은 오늘의 학교적이다." "장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세상에 편안한 날은 없다." 장선운이 발표한 비분강개한 토장연설은 장개석과 철저히 결별한다는 굳은 입장을 보여준다.


1927년 4월, 25세된 장선운은 가슴 가득 혁명의 열정을 안고, 제2차북벌에 참가한다. 그리고 11군 26사 77단의 단장 겸 당대표에 임명된다. 5월 28일, 부대를 이끌고 하남 임영(臨潁)에서 봉계(奉係)군벌과 전투를 벌일 때, 앞장서서 싸우다가 불행히 총탄을 맞고 장열히 희생된다.


1927년 6월 8일, 무창중앙군사정치학교 운동장에서는 중공중앙이 장선운 열사의 추도식을 거행한다. 무한국민정부요인, 국민혁명군고위장성 그리고 각계인사 6만여명이 추도회에 참석한다. 주은래는 추도회를 주재하며 침통한 연설을 한다. 운대영(惲代英)이 추도사를 읽고, 나장룡(羅章龍)이 추도시를 읽는다.


동남북전투유간(東南北戰鬪猶艱), 전사승등무승관(戰士昇騰武勝關), 천고비풍임영로(千古悲風臨潁路), 중원인견장성잔(中原忍見將星殘)"


중공중앙의 간행물 <향도>198기에는 <도장선운동지>라는 글을 싣는다. 그리고 국민혁명정부는 그에게 중장계급을 추서한다.


1984년, 장선운의 황포군관학교때 동기인 중국인민해방군 원수 서향전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선운은 나의 스승이며 친구였다. 그는 투쟁에 견결했고, 작전에 용감했으며 두뇌는 민첩했다. 청년군인의 모범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