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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칭다오(靑島)는 어떻게 미국해군기지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17. 10. 30.

글: 장효언(張曉言)





1945년 8월 14일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체결되고, 이에 기하여 소련은 국민당정부와 공동으로 뤼순해군기지를 사용하는 권한을 얻어냈고, 다롄을 자유항으로 만들었다.


2차대전후, 소련이 중국에서 세력을 증가시키고, 유럽에서의 확장하자 미국의 우려는 가속화된다. 미국은 해군해병대를 반드시 중국에 주둔시켜야겠다고 전략적 판단을 내린다. 이를 위하여, 미국은 중국에서 새로운 해군기지를 건설해야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칭다오가 자연조건이 뛰어나고, 해군이 여름훈련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여겼다. 그리고 칭다오는 지리위치도 아주 중요했다. 전략적으로 소련의 뤼순,다렌의 주둔군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미국은 칭다오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비록 미국이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공개된 장개석과 미국이 체결한 <중미우호통상항해조약>등 협약 및 칭다오시자료관이 미국에서 수집한 미국해군부자료에서의 관련내용을 보면 미국에게 칭다오를 점령하여 해군기지로 삼으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칭다오가 얼마나 중요한가


1945년 8월 10일 미국 참모장연석회의에서는 중국전구미군사령관 위드마이어(Wedemeyer)에게 이렇게 지시한다: "미국해군해병대는 중국전투지역의 핵심항구와 교통요지를 통제하여, 신속히 국민당부대를 중국의 핵심지역으로 운송하라."


동시에 긴급히 해군해병대를 중국에 파견한다. 공개적인 이유는 하루빨리 중국에서의 전투를 종결시키고, 국민당군대를 도와 일본군전쟁포로를 송환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장개석이 승전의 과실을 차지하도록 돕고, 칭다오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었다.


9월 16일 9척의 미국 군함이 시트르(음역)의 지휘하에 칭다오항구로 진입하여, 일본해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다. 10월 11일-12일, 미국해군해병대 제6사단의 2개연대 및 7개 직할 대대 합계 2.7만여명은 사령관 세보르(음역)의 지휘하에 괌에서 칭다오로 온다. 상륙후에는 각각 태평로, 광서로, 대학로, 산동대학등을 점령한다. 당시 국민당 제11전구 부사령관겸 산동정진군 총사령관인 이연년(李延年)은 미군의 칭다오진주에 대하여 이렇게 해명한다: "칭다오는 화북의 중요한 항구이다. 만일 잃게 되면, 국가의 앞날이 아주 위험해진다. 그래서 중앙군이 오기 전에, 특별히 미군에게 부탁하여 칭다오로 와서 우리를 대신하여 치안을 유지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후 미국은 여러 방면에서 군사력량을 파견하여, 칭다오라는 중요한 해군기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전후로 서태평양함대, 해군해병대, 제38특종혼합함대등이 칭다오에 상륙 및 주둔했다.


1945년 10월부터 1946년 6월까지, 미국의 군정요인도 연이어 칭다오를 방문한다. 트루먼 대통령의 사적대리인 로크, 대통령 대리인이자 배상위원회의 바오라이(음역), 태평양함대사령관 가이거(음역), 해군제7함대사령관 바베이어, 커크, 미국의원 해군시찰단단장 라이페이어(음역), 미군중국전구총사령곤 위드마이어등이 전후로 칭다오에 왔다. 한편으로 칭다오에 미군을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당정부와의 협력을 강화했다.


미국과 장개석간의 군사협력필요에 따라, 미국은 전시조차법안을 통하여 "중국원조전함증여"를 명목으로 국민당에 탱크상륙정등 함정을 선물한다. 그리고 해군고문단을 파견하여 국민당정부의 해군훈련을 도와준다. 칭다오에는 국민당정부에서 "중앙해군훈련단"을 설립한다. 미국은 마침대 해군해병대를 칭다오에 주둔시키게 된 것이다.


해군기지를 차지하다.


미국은 일단 칭다오에 군대를 주둔시키고나자, 다시 국민당정부와 <중미우호통상항해조약>등 협정을 체결하여 칭다오의 해군기지합법화를 점진적으로 시도했다.


1946년 6월말, 미해군 제1태평양함대총사령부는 점차 칭다오로 이전한다. 미국군함은 칭다오에 운집한다. 바로 1946년 <해방일보>에 실린 것처럼, "항구이 안팎을 보면, 정박하거나 현재 순시중인 것은 모조리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미국순시선, 함정, 전함들이다." 그 외에 창커우공항등 공군기지도 두었다. 미국의 육해공군이 전면적으로 칭다오기지로 들어온 것이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장개석정부와 해군기지건립의 문제에 관하여 협상을 진행한다. 9월, 미국과 장개석은 <중미30년도크비밀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은 410만달러의 가치가 있는 군사물자와 장비를 주고 상하이와 칭다오 두 곳의 도크 사용권과 '교환'한다. 11월 4일 <중미우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선박이 중국의 "개방된 일체의 항구, 지방 및 영토수역내에서" 자유항해할 수 있고, 긴급시에는 군함을 포함하여 중국의 여하한 비개방 "항구, 지방 및 영토수역"에 진입할 수 있다.


1947년 2월 4일 <전보(前報)>의 보도에 따르면, 1947년 1월, "미국은 이미 장개석정부와 칭다오해군기지사용에 관한 비밀협정을 체결했고, 이 비밀협정에 근거하여,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미국과 중국은 공동으로 칭다오해군기지를 사용한다" 다만 미국 UPI 워싱턴의 소식에 따르면, 미해군부는 이에 대하여 부인했다. 다만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칭다오시자료관은 미국에서 수집한 1947년 2월의 미국해군부가 발표한 중미해군군사협의의 바망록에서 중국에 군함 및 물자원조를 제공하는데 반드시 2개의 전제조건이 있다는 조문을 발견한다: 1. 미국측이 해군고문단을 조직한다; 2. 칭다오에 해군기지를 건립한다. 해군부는 주로 중미관계, 남한의 형세 및 극동의 국제형세를 고려한 것이며, 반드시 중국영해에 함대를 배치해야한다고 하였다. 첫째조건을 통하여 미국은 국민당정부를 지원하고, 국민당정부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중국을 통제한다. 그리고 그중 두번째 조건은 바로 서태평양의 해군기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 기지에 대하여 미국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칭다오를 마음에 두었다.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미국이 국민당에 증여한 것은 함정만  271척이다. 제공한 물자는 더욱 풍부하다. 그리고 미군은 칭다오에서의 배치를 게속 확대한다. 해면에서 육지로, 남에서 북으로 모두 미국군대가 주둔한다. 그후의 신문보도에서는 여러번 칭다오를 미군해군기지로 칭한다. 예를 들어 1949년 1월 20일 <대민보>에서는 "미군은 칭다오의 해군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를 보면 미국인의 요구는 실제로 이미 만족되었다. 미국해군부에서 계속 인정하지 않던 <칭다오해군비밀협정>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통하여, 미군은 한걸음 한걸음 순조롭게 칭다오를 점거한다는 목적을 달성한다.


남을 것인가 철수할 것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칭다오주둔군의 거취는 미국이 결정하기 어려웠던 촛점 이슈였다. 왜냐하면 주둔군의 거취는 칭다오해군기지를 포기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의미하기 대문이다.


1946년 12월 심숭(沈崇) 사건이후, 중국국내의 반미정서가 고양된다. 1947년초, 미국정부는 부득이 6개월내에 해군해병대를 철수시키는 긴급계획을 제정한다. 1월부터 9월까지, 상하이, 텐진, 탕구등지의 해군해병대가 차례로 철수한다. 다만 칭다오해군은 전혀 감원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당시 미국 서태평양해군총사령관인 커크 대장은 칭다오주둔미군을 현재의 1900명에서 4300-4800명으로 증원시켜야한다고 말한다.


1947년 4월, 해방군 산동병단은 춘계공세를 발동한다. 교제철로(칭다오-지난)를 중간이 단절된다. 국민당세력은 그저 지난과 칭다오에만 있어 고립된 도시로 된다. 미국의 칭다오주둔에 대한 결심은 날이갈수록 흔들렸다. 이런 형세하에서, 주칭다오미국 서태평양해군총사령관 바이지르(음역)는 두번에 걸쳐 긴급전통을 보내 해군작전부장 덩페르트에게 '공산군'이 칭다오를 공격할 때 미군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4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A. 국민당군대를 원조하여 도시 및 중요 근교시설(비행장 및 수상시설)을 방어한다; B. 미국 단독으로 중요시설을 방어할 책임을 진다; C. 필요시 신속히 전체 업무인원을 철수시킨다: D. 미국연안시설과 비전투인원은 즉각 철수시키고, 무장부대는 계속 부근 함상에 남겨둔다.


논쟁을 거쳐, 6월 14일, 참모장연석회의는 바이지르에게 통보한다: "A행동방안의 집행을 폐지하고, 형세를 보아 C행동방안을 집행하라."


1948년 9월 24일, 해방군 화동야전군은 지난을 점령한다. 주청도미군의 거취문제는 다시 미국의 핫이슈가 된다. 10월 19일, 미국은 칭다오철군계획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미군은 또한 철저히 칭다오를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948년 11월 4일, 미국 서태평양함대사령관 바이지르 중장은 칭다오에서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기자회견을 열어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서태평양함대는 칭다오기지를 포기할 뜻이 없다. 이 소식은 다음 날 <중앙일보>에 실린다. 실제로는 미국이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연막탄을 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미국의 위신을 보호하고, 국민당군대의 사기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


다만, 장개석정부는 내전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미국은 부득이 철군결정을 내려야 했다.


주칭다오미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다.


미국이 칭다오에서 철군하려는 생각은 1948년 5월부터 시작된다. 월말에는 철수결정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집행한 것은 이미 1년이 지난 후인 1949년 5월이었다. 주요 원인은 미국이 칭다오라는 이 기지에서 철수하고 싶지 않아서이고, 시국의 변화에 따라 한 줄기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중국인민해방전쟁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3대전투를 진행한다. 형세를 되돌릴 수 없게 되자, 국민당이 통제하던 칭다오지구에서도 한 무리의 고관들이 남으로 도망치고, 공장과 기업도 남으로 이전하는 일이 발생한다.


주칭다오미군도 칭다오가 위기일발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철군준비를 한다. 1948년 12월 9일 화동국 통전부가 중앙정보국에 보낸 전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주칭다오미군의 일부 동태는 이러하다: 1. 주칭다오해군고문단은 12월 18일부터 잠정적으로 중국해군훈련을 중지하기로 결정한다. 2. 미국이 칭다오 대항 및 1,2,3호 부두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탄약, 탱크를 모두 11월 27일과 28일 배에 실었다. 3. 주칭다오미해군과 해병대는 이미 사용하지 않는 기자재, 무기, 건축자재를 대부분 3호부두에 모아놓고 배에 실어 운송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4. 미해군 및 해병대는 필요한 경우 일부 자재를 버리고 4시간내에 배에 올라 칭다오를 떠나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칭다오육상부대는 1949년 1월 12일부터 차례로 배에 승선하여 해상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9년 4월 21일, 중국인민해방군은 도강전투를 발동하여 23일 난징(南京)을 해방시킨다. 산동의 전체지역은 칭다오등 몇 개의 고립된 거점을 제외하고 모조리 해방되어 남하부대를 협조한다. 중국인민해방군 산동병단은 5월 3일부터 칭다오 외곽거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주칭다오미군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5월 9일, 미국 주중대사 John Leighton Stuart(중국명 司徒雷登)는 국무원에 전통을 보내어 "서태평양해군사령관이 계속 칭다오기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즉시 다시 고려해주십시오."라고 건의한다. 5월 13일, 국무장관 애치슨은 회신을 보낸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일단 상하이를 점령하면, 미국 해군해병대는 즉시 칭다오에서 철수한다; 만일 상하이를 함락시키지 못하면 다시 기다려라." 다만, 미군의 잠시동안의 망설임도 해방군의 군사공격에서의 승리로 금방 타파된다.


5월 17일, 미해군 서태평양함대사령관 바이지르는 미군철수를 배치한다. 5월 19일 칭다오 외곽은 이미 모조리 해방군에 점령되었다. 바이지르는 신속히 해안의 모든 미군기지설비를 함상으로 옮긴다. 그리고 칭다오도크를 조용히 빠져나간다. 이제 모든 미군함정은 이미 칭다오항구바깥의 수역으로 나갔고, 그저 상하이의 소식만 기다릴 뿐이었다.


5월 25일, 중국인민해방군이 소주하이남의 상하이시지역을 해방시킨다. 전체 상하이도 이제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다. 바이지르는 즉시 최후의 철수명령을 하달한다. 오후 4시, 모든 미국해군은 4년여동안 경영했던 칭다오기지에서 철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