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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13

임표(林彪)의 "괴병(怪病)": 임표 운전기사의 회고... 글: 초성서(楚成瑞) 조적(祖籍)은 산동 액현(掖縣)이고 일찌기 관동으로 가서 요녕성 대련에 거주한다. 1945년 영구(營口)에서 동북인민자치군에 참여하고, 입대한지 3년만에 제4야전군의 총사령관 임표의 운전기사가 된다. 임표는 그의 차를 타고, 관외에서 관내로 들어오고, 다시 북평에서 개봉으로 남하하고, 그후에 한구로 진입한다. 1950년초, 꽃을 들고 환영하는 가운데 그와 임표의 '승용차'는 북경으로 돌아온다. 매년 이어지는 전투로 임표는 피로에 지쳐 쓰러졌다. 임표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불면증을 가지고 있었다. 기실 이 병은 일찌감치 평형관전투전에 이미 앓았다. 그때 적군은 강하고 아군은 약했다. 그래도 전투에서 이겨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을 1만명 죽이면서 아군 8천을 잃.. 2021. 11. 25.
화신(和珅)의 "십홀원(十笏園)"의 전세금생(前世今生) 글: 가군(賈珺) 십홀원은 '숙춘원(淑春園)'이라고도 불린다. 북경 해정구에 위치하고 있고, 명학원(鳴鶴園)의 남쪽에 있으며 화신의 교외사원(郊外賜園) 즉 황제에게 하사받은 장원이다. 예친왕 소련의 <숙정잡록>에 따르면, 건륭,가경시기 모든 왕공대신의 서교(西郊)에 있는 화원(花.. 2019. 6. 2.
북양수군의 패망: 이홍장(李鴻章)과 옹동화(翁同龢), 누가 원흉인가? 글: 백가잡평(百家雜評) 중국최초의 근대화 해군함대로서, 북양수군은 이 오래된 제국의 무수한 희망을 안고 있었다. 자료를 보면, 북양수군은 주로 전함이 크고 작은 25척이 있었고, 보조군함이 50척 있었으며, 운수선이 30척, 관병이 4천여명 있었다. 당시 세계9위, 동아시아1위의 수준이.. 2019. 5. 12.
영년(英年): 서태후가 총애한 풍수가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시행하는 광서제는 영대(瀛臺)에 연금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최고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기실 1년전에, 대권을 놓칠까 우려하던 서태후는 이미 광서에제게 손을 쓴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칠왕분(七.. 2019. 1. 20.
"무술변법(戊戌變法)"의 4가지 놀라운 진상 글: 풍학영(馮學榮) 진상1: 서태후는 처음에 변법에 반대하지 않았다. 많은 역사드라마를 보면 서태후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술변법을 반대한 '완고한 보수파'로 그려진다. 기실 진실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서태후는 처음에 광서제의 변법에 대하여 지지했다. 최소한 반대는 하지 .. 2018. 2. 8.
건륭제는 왜 6번이나 강남으로 내려갔는가?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청나라 300년역사중에서 단지 2명의 황제만이 6번 강남을 내려갔다. 한 명은 강희제이고, 다른 한명은 그의 손자인 건륭제이다. 강희제가 강남으로 6번이나 내려간 것은 국계민생을 위해서였고, 적지 않게 실질적인 일들을 했다. 그러나, 건륭제가 6번 강남으로 내.. 2018. 2. 4.
북경의 서양건축물 글: 이방(李芳) 궁전, 정원, 사묘(寺廟)는 고대 북경도시건축문화의 정수이다. 천단, 자금성, 이화원....어디 사람이든간에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한두마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녹수홍장(綠樹紅墻), 청전홍와(靑塼紅瓦)...여기에는 찾아오는 관광객이 넘쳐나고, 국내외 카메라맨이 모여든다... 2016. 8. 6.
중일관계의 역사원류 글: 유사하(流沙河) [이 글은 2014년 12월 28일, 유사하가 성도 만상서성 서서불서점에서 한 강연이다. 유사하는 정말 당세의 살아있는 보물이다. 그의 박학한 역사지식과 깊이있는 인문견해는 전체강의동안 조용하게 만들었고,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은 녹음.. 2015. 2. 10.
왕국유(王國維) 자살의 수수께끼 글: 양혜왕(梁惠王) 1927년 6월(음력 오월 초사흘), 저명한 학자 왕국유는 이화원의 곤명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나이 겨우 51살이었는데, 장년이라고 할 만한 나이였다. 그의 죽음은 중국학술계에 큰 손실이었다. 그래서 저명한 역사학자 고힐강이 쓴 기념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학.. 2015. 1. 19.
왕국유(王國維)의 "육불(六不)" 글: 사비상(史飛翔) 국학대사 왕국유는 학문을 하는데 아주 엄격했고, 조그만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일생동안 그와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1909년, 왕국유는 경사도서관의 편집을 맡는다. 나중에 <국학총간>의 기초선언(起草宣言)을 쓰는데, "학술에는 새 것과 옛 것의 구분.. 2014. 4. 4.